담론 5 산스카라의 형성과 기능

산스카라의 형성과 기능

인간적 체험의 분석

인간적 체험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 주관적(subjective) 측면과 객관적(objective) 측면이다. 주관적 측면에는 인간체험의 주요 성분을 구성하는 ‘정신적 작용'(mental processes)이 있으며, 객관적 측면에는 그 정신적 작용이 소재로 삼는 대상과 사물들이 있다. 정신적 작용은 부분적으로는 당장 앞에 주어진 객관적 상황에 달려 있고, 또 부분적으로는 과거의 체험들로부터 축적해 온 인상들(산스카라들)에 달려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mind)은 과거 산스카라들의 거대한 바다와 광대한 객관적 우주 사이에 껴있다.

산스카라는 체험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과거의 체험들을 통해 마음에 저장된 인상들(impressions)의 작용에 기반을 둔다. 모든 생각, 감정, 행위의 뒤에는 인상들의 무리가 있다; 이 인상의 무리들을 객관적으로 보면 마음을 변형시키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이 인상들은 과거의 체험들로부터 축적돼 온 것들이며, 현재와 미래 체험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마음은 체험을 하는 중에, 계속해서 이러한 인상들을 창조하고 거둬들이고 있다.
이 세상의 물질적 대상들(즉 신체, 자연, 각종 사물들 등)에 열중할 때, 마음은 소위 표면화되어 물질적 인상들(gross impressions)을 창출한다. 마음이 (이미 존재하는 산스카라들의 표현인) 스스로의 주관적인 생각(정신작용)에 열중할 때, 마음은 기적 인상과 정신적 인상들을 창출한다. 산스카라가 먼저냐 체험이 먼저냐 하는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과 같다. 양쪽 모두 서로의 조건이 되며, 나란히 공존하며 발전한다. 따라서 인간적 체험의 의미를 이해하는 문제는, 산스카라의 형성과 기능을 이해하는 문제의 주위를 맴돈다.

자연적 산스카라와 비자연적 산스카라

산스카라에는 두 종류가 있다; 존재하게 되는 방식에 따라, 자연적(natural) 산스카라와 비자연적(nonnatural) 산스카라로 나뉜다. 유기적 진화 과정(organic evolution) 중에 영혼이 거둬들이는 산스카라들은 자연적이다. 이 자연적 산스카라들은 영혼이 인간 이하의 다양한 형태들을 연달아 취하고 버리면서 발생한다; 즉 생명력이 없는 듯한 돌이나 금속의 형태로부터 의식이 완전히 발달된 인간의 단계에 점차적으로 이르기까지 거둬들인 산스카라들이다. 영혼이 인간 형태에 도달하기 전까지 영혼의 주위를 둘러싸는 모든 산스카라들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자연적 산스카라’라고 한다. 이 자연적 산스카라들은, 인간 형태에 도달한 이후에 영혼이 일구는(cultivate) 산스카라들과 주의깊게 구분해야 한다.
인간 단계에서 영혼에 덧붙은 산스카라들은 옳고 그름, 미덕과 악덕을 선택할 수 있는 의식의 도덕적 자유 안에서 일구어지기 때문에 책임이 따른다. 이러한 산스카라들을 비자연적 산스카라라고 한다. 이러한 인간 이후의 산스카라들도 직접적으로 자연적 산스카라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조건 아래서 창조되었으며, 자연적 산스카라들에 비해 비교적 더 근래에 생겨났다. 자연적 산스카라와 비자연적 산스카라는, 형성된 조건과 형성된 기간에 따라 영혼에 부착되는 접착력이 달라진다. 비자연적 산스카라의 근절은, 고대의 유산을 지녀서 더 굳게 뿌리내린 자연적 산스카라의 근절만큼 어렵진 않다. 삿구루(Sadguru), 즉 완벽한 스승의 은총과 개입을 받지 않고서는, 초심자에게 자연적 산스카라들의 소멸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생(生)의 현상은 절대존재(Absolute)의 의식하고픈 의지에서 솟아난다

비자연적 산스카라들은 자연적 산스카라들에 의존하며, 자연적 산스카라들은 진화 과정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이 다음의 중요한 질문은, 무한한 이 ‘절대적 실재'(absolute Reality)에서 왜, 다양한 진화적 단계를 거치는 생(生)의 현상(manifested life)이 솟아나야만 했는가?’이다.생의 현상의 필요성은, 절대존재의 스스로를 의식하고픈 충동으로부터 솟아오른다.진화 과정을 통해 꾸준히 진행되는 생의 현상은 궁극적으로 무한(the Infinite)에 내재되어 있는, 스스로를 의식하고픈 의지에서 비롯된다. 생각의 차원에서 천지창조를 이해하려면, 현상이 벌어지기 전에 절대존재 안에 그 ‘의식하고픈 의지’가 잠재된 상태로 있었던 것으로 상정해야 한다.

절대존재 안의 라하르(lahar)를 바다의 파도에 비유한다면

천지창조에 대한 지적인 설명을 위해 절대존재(the Absolute) 안에 있는 이 충동을 ‘스스로를 의식하고픈 의지’로 표현하긴 했지만, 이 충동을 일종의 고유한 욕망으로 서술하는 것은 그것의 진정한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즉흥적으로 솟아오르는 불가해한 충동(impulse)으로서 라하르(lahar)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며, 이것을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것은 그 실상을 망치는 것이다. 모든 지적인 분야들은 필연적으로 천지창조의 신비를 파악하는 데 부족하기 때문에, 이 충동(라하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가장 근접한 방법은 지적 개념보다는 유사한 예로 비유를 드는 것이다.
잔잔한 바다의 표면을 가로지르는 파도의 물결이 무수한 거품들을 휘저어(stir) 올리듯이, 라하르는 대령(大靈, Oversoul)의 불가분한 무한함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개체적 영혼들을 창조한다. 하지만 ‘일체를 포괄하는'(all-abounding) 절대존재는, 모든 개체적 영혼들을 밑받침해주는 일종의 지층(substratum)으로 변함없이 남아있다. 개체적 영혼들은 갑작스럽고 즉흥적인 충동의 창조물이다; 그래서 그들은, 최초의 흔들림(stir)이 순환적 주기를 거쳐 마지막에 가라앉을 때까지 자신의 운명이 계속될 거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 절대존재의 한결같은 어딘가에서 신비한 한 점(the Om Point)이 탄생한다; 그리고 이 한 점에서 천지창조의 만물(manyness)이 솟아나온다. 몇 분의 1초 전만 해도 얼어붙은 듯 고요했던 ‘그 거대한 깊음'(the vastly deep)의 표면이 휘저어져(astir) 살아 움직이는 무수한 거품의 자아들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 자아들은 자기-제한(self-limitation)을 통해 분명한 크기와 형태를 지님으로써 자신의 분리성을 확보한다.  

절대존재는 발현되는 바하스(bhas)에 영향받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단지 비유에 불과하다. 절대존재에 잠재되어 있던 의식하고픈 의지의 라하르(lahar)가 작용하여 현상 세계에 존재를 불러일으킬 때, 절대존재 내에 어떤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실수다. 절대존재 안에서는 그 어떤 진화 과정이나 역진화 과정도 있을 수 없다; 실제적인 그 무엇도 절대존재에서 나올 수 없다; 실제적인 그 어떤 변화일지라도 필연적으로 절대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현상세계의 창조에 암시되는 변화는 ‘절대적 실재'(absolute Reality)의 존재 그 자체에 생기는 변화가 아니다; 즉 존재론적(ontological) 변화가 아니다. 이것은 외관상(apparent)의 변화일 뿐이다. {즉, 어떤 변화가 있는 듯한(apparent) 것일 뿐이다.}
현상의 발현은, 어떤 면에서 무제한적인 절대존재에 일종의 확장이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현상의 발현을 통해 전혀 의식이 없었던 무한(the Inifinite)은 스스로의 의식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재의 확장이 자기-제한을 통해 다양한 생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현상의 발현을 무기한적 축소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상의 발현을 실재의 확장으로 보든 끝없는 축소 과정으로 보든, 여기에는 최초의 충동(initial urge) 또는 움직임이 선행된다; (생각의 관점에서) 이 충동은 잠재적으로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는 ‘의식하고픈 욕망’으로 볼 수 있다.
천지창조의 다양성과 개체적 영혼들의 분리성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창조세계의 존재성 또는 현상 세계의 존재성은 바로 바하스(bhas), 즉 환상에 기반한다; 따라서 무수히 많은 개체적 영혼들이 발현됨에도 불구하고, 대령(大靈, Oversoul)은 조금도 확장되거나 축소되거나 증가되거나 감소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남아있는다. 대령은 바하스, 즉 환상의 개체화에 의해 그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다; 다만 대령이 수많은 개체적 영혼으로 분화되는 듯 보이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가장 원초적인 바하스(bhas)

대령을 유혹한 가장 원초적인 바하스(환상)의 발생은 첫 인상(impression)의 발생과 일치한다. 따라서 가장 원초적인 바하스의 생겨남은, 산스카라 형성 과정의 시작과 일치한다. 산스카라들의 형성은 영혼의 개체성이 발현되는 첫번째 초점인, 가장 한정된 중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물질적 영역에서 이 첫번째 초점의 발현은 가장 원시적이고 부분적인 의식을 지닌, 삼차원적이고 불활성적인 돌의 형태로 (대표적으로) 표현된다. 이 희미하고 미발달된 의식의 상태는 자신의 모양과 형태마저 명확히 인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령이 스스로를 알고자 시작했던 천지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속수무책으로 불충분하다.
돌 단계에서 의식이 지니는 지극히 미비한 양의 의식마저도 돌의 물질적 신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대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돌의 물질적 신체와 별개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령은 먼저 스스로를 의식과 동일시한 후, 그 의식을 통해 돌의 물질적 신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의식의 발달은 돌의 물질적 신체와 무기력(침체 상태)에 사로잡혀 저지된다; 그래서 보다 높은 형태의 진화가 필요해진다; 즉, 보다 높은 매개체의 발현이 필수불가결해진다. 의식의 발달은 그 의식을 조건화*(역자 주)하는 물질적 신체의 진화와 나란히 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령의 광대함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의식하고픈 의지’는 신성적 일념(一念)/결단에 의해, 표현적 매개체의 점진적인 진화를 추구하게 된다.

의식과 형태의 점진적 진화

그래서 대령은 스스로의 새로운 표현적 매개체로서, 의식이 좀더 발전된 금속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금속의 단계에서조차 의식은 아주 초보적이기 때문에, 보다 높은 형태인 식물과 나무의 단계로 옮겨가야 한다; 식물과 나무의 단계에 도달하면, 생장 부패 및 번식의 생명 유지 과정을 통해 의식 발달에 현저한 진보가 일어난다. 보다 더 발달된 의식 형태의 출현은 대령이 곤충, 새, 동물의 본능적 생명을 통해 발현되고자 할 때 가능하다; 곤충, 새, 동물은 자신의 신체와 주변에 대해 충분히 의식하며, 자기 방어적 감각도 계발되며, 주변 환경을 통제하는 능력을 갖추고자 한다.
고등 동물에서는, 어느 정도의 지능 즉 추리(推理)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지능의 기능은 자기 방어 본능과 자식을 돌보고 보호하는 본능과 같은 본능들의 작용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그래서 의식의 발달은 동물의 단계에서조차 완료되지 못한다; 따라서 참나-계몽(Self-illumination)을 이루려는 대령의 최초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인간 의식

마침내 대령은 의식의 발달이 끝까지 완료되어 자신과 주변 환경을 완전히 의식하는 인간의 형태를 취한다. 인간 단계에서의 추론(推論) 능력은, 가장 광범위한 활동 영역을 지니며 그 범위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대령은 자체의 의식을 통해 물질적 신체(gross body)와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따라서 의식은 대령의 본성을 깨우치려는 목표에 여전히 기여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의식은 인간 형태에 이르러 최대한도로 발달이 완료됐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참나-깨달음(Self-realization)을 이룰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진화 과정을 시작한 그 ‘의식하고픈 의지’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꽃인 삿구루, 즉 맨갓(Man-God)에 이르러 결실을 맺는다. 

산스카라의 감김

대령은 평범한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는 참나-지식을 얻지 못한다; 인간의 일반적인 의식은 무수히 많은 산스카라들, 즉 인상들(impressions)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 의식은 겉보기에 생명이 없는 듯한 돌이나 금속의 상태에서 나무들의 식물 상태를 거쳐, 계속해서 곤충, 새, 동물의 본능적 상태를 지나, 마침내 인간 상태의 완성된 의식에 도달하는데,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산스카라들을 창출하고 그것들에 감싸인다. 이 자연적 산스카라들은 인간 상태에 도달한 후에도, 다양한 체험과 수많은 활동을 통한 비자연적 산스카라들의 창출과 함께 계속 증가한다. 이처럼 산스카라들의 축적은 진화 과정 도중만이 아니라 그 후의 인간 활동 시기에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진행된다. 산스카라들의 획득 과정은 막대기에 실을 감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여기서 실은 산스카라를, 막대기는 개체적 영혼의 마음(mind)을 의미한다. 실은 천지창조의 기원에서부터 감기기 시작하여, 모든 진화 단계들과 인간 형태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감긴 실은 자연적 산스카라만이 아니라 비자연적 산스카라 모두를 상징한다.

인상들이 지닌 효력의 예

인간의 삶에서 끊임없이 창출되는 새로운 산스카라들은, 의식이 당면하는 온갖 다채로운 사물들과 생각들로 인해서 생겨난다. 이 산스카라들은 여러 다양한 의식 상태에 중요한 변화들을 가져온다. 아름다운 사물들에 의해 창출되는 인상들은 의식 안에 아름다움을 즐기고 감상하는 선천적 능력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우리가 좋은 음악을 듣는다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이 대상들로부터 받은 인상들은 열광의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가 어떤 사상가의 인격을 접할 때 새로운 방식의 사고에 흥미를 느끼고 이제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열정에 의해 영감받을 수 있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인상 뿐 아니라, 어떤 아이디어와 미신에 대한 인상마저도 의식의 상태를 결정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미신에 대한 인상들

미신에 대해 인상들이 지닌 효력은 귀신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인간 생각의 다양한 영역 중에서 미신이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영역은 귀신과 관련된 영역이다; 민간 신앙에 의하면, 귀신들은 자신의 희생자들을 기묘한 방법으로 괴롭히고 고문한다고들 한다. 아주 먼 옛날 무굴 제국이 인도를 다스리던 시절, 귀신 이야기에 매우 회의적인 높은 학식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귀신 이야기를 자신의 체험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마바스야(한 달 중 가장 어두운 밤) 밤에 어느 묘지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었다; 그 묘지에는 무시무시한 귀신이 살고 있는데, 묘지 안의 땅에 쇠못을 망치로 박으면 틀림없이 그 귀신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마바스야날 밤에 한 손에는 망치를, 한 손에는 쇠못을 들고 그 묘지로 곧장 걸어들어갔다; 그리고는 쇠목을 박기 위해 잔디가 없는 맨땅을 골랐다. 땅은 어두웠고 그의 느슨한 망토도 똑같이 어두워졌다. 그가 땅에 앉아 망치로 못을 박으려 할 때, 땅과 못 사이에 망토의 끝자락이 끼였고 그는 그 위로 망치질을 하였다. 망치질을 끝낸 그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실험 결과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려고 할 때, 땅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고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과거 인상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자신을 마지막에 붙든 것은 유령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생각이 주는 충격이 너무나도 커서, 이 가엾은 남자는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미신이 창출하는 인상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산스카라들에서 자유로울 때, 체험은 조화로워진다  

인상들의 힘과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인상은 ‘결정화된 힘'(solidified might)이다; 불활성(不活性)으로 인해 인상은 움직이지 않고, 끈질기게 오래 간다. 인상들은 인간의 마음에 너무도 깊숙이 새겨져 있어서 우리가 아무리 전심전력으로 뿌리뽑으려 해도,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자체의 효력을 행위로 옮겨내는 고유의 시간과 방식을 지닌다. 마음에는 여러 다른 종류의 산스카라들이 들어있다; 이 산스카라들은 각자의 의식적 표현을 추구하는 도중에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의식은 이러한 산스카라들의 충돌을 정신적 갈등으로 체험한다. 모든 산스카라들(산스카라가 좋든 나쁘든)로부터 의식이 해방될 때까지, 체험은 혼란스럽고 수수께끼 같으며, 온갖 갈등과 복잡한 얽히고 설킴, 오락가락 하는 동요로 가득찰 수밖에 없다. 체험이 진정으로 조화롭고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식이 모든 인상들로부터 해방될 때 뿐이다.

산스카라들의 종류와 의식의 상태들 

산스카라들은 그들이 관여하는 영역의 본질적 차이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그들이 관여하는 각기 다른 존재 영역에 따라, 산스카라들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1) 물질적(gross) 산스카라들은, 영혼이 물질적 매개체를 통해 물질적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영혼이 스스로를 물질적 신체와 동일시하게 만든다. (2) 기적(subtle) 산스카라들은, 영혼이 기적 매개체를 통해 기적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영혼이 스스로를 기적 신체와 동일시하게 만든다. (3) 정신적(mental) 산스카라들은, 영혼이 정신적 매개체를 통해 정신적 세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영혼이 스스로를 정신적 신체와 동일시하게 만든다. 개체적 영혼이 지닌 의식 상태의 차이는 전적으로 그 의식에 실려있는 산스카라들의 종류에 달려있다. 따라서 물질적 의식을 지닌 영혼들은 물질적 세계만을 체험하고, 기적 의식을 지닌 영혼들은 기적 세계만을 체험하며, 정신적 의식을 지닌 영혼들은 정신적 세계만을 체험한다. 이 세 종류의 영혼들이 질적으로 다른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은, 각기 지닌 산스카라들의 본질적 차이 때문이다.

참나-의식(Self-conscious)을 지닌 영혼들은 산스카라들로부터 자유롭다

참나-의식(Self-conscious)을 지닌 영혼들은 참나(Self)를 매개체로 대령을 체험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영혼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반면 다른 모든 영혼들은 자신이 지닌 신체와 그 신체에 해당되는 세계만을 체험한다.참나-의식을 지닌 영혼과 다른 영혼들이 극단적으로 다른 이유는, 대부분 영혼들의 의식은 각종 산스카라들의 제약을 받지만 참나-의식을 지닌 영혼의 의식은 모든 산스카라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이다. 의식이 어떤 산스카라에 의해서도 흐려지거나 제약받지 않을 때만이, 최초의 ‘의식하고픈 의지’가 스스로의 최종적이고 진정한 결실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절대존재의 불가분한 일원성과 무한함을 의식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산스카라들의 제거를 통한 마음의 정화 작업/ 해체 작업(deconditioning)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담론 4 천지창조의 기원과 종결

‘천지창조’의 기원과 종결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있는 그대로의 궁극적 실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은 천지창조의 기원과 목적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있어 벽에 부닥치게 되어 있다. /미궁에 빠지게 되어 있다. /미로를 헤매이게 되어 있다/ 궁지에 처하게 되어 있다. 고대의 과거는 불가해한 신비에 가려진 듯 하고, 미래는 완전히 봉인된 책인 듯 하다. 인간의 마음은 마야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선 기껏해야 우수한 추측 이상은 할 수가 없다. 인간의 마음은 이들에 대한 최종적 지식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 관해서 무지한 상태로 만족하지도 못한다. “어디에서부터?”와 “어디로?”는 인간의 마음에 신성한 초조함을 일으키는, 불후의 절실한 두 질문이다.

기원과 종결

인간의 마음은 이 세계의 기원을 찾는 연구에 있어, ‘무한 후퇴 이론'(infinite regress)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목적도 끝도 없이 그저 변해만 가는 것이라는 이론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만일 진화 과정에 있어 최초의 원인이 없다면, 그것은 이해불가한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도달할 종점도 없다면 진화에는 그 어떤 방향도 의미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진화 과정에 있어 최초의 원인도 도달할 종점도 없다면, 그것은 방향도 의미도 없는 이해불가한 것이 될 것이다. 어디에서부터?”와 “어디로?”, 이 두 질문은 진화하는 창조세계에 기원과 종결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진화의 시작이 시간의 시작이며, 진화의 끝이 시간의 끝이다. 진화에 기원과 종결이 있는 것은, 시간에도 기원과 종결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고 있는 이 세상의 시작과 끝 사이에는 수많은 주기들(cycles)이 있다; 그러나 ‘우주적 진화 과정’은 이 주기들을 관통하여 계속해서 일어난다. 진화 과정의 실제적 끝을 마하프랄라야(Mahapralaya) 또는 ‘이 세상의 최종적 전멸’이라고 한다; 이때 온세상은 기원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즉, 무(Nothing)가 된다. 세계의 마하프랄라야는 사람의 잠에 비유될 수 있다. 사람이 깊은 잠에 들 때 다양한 체험의 세상이 완전히 사라지듯이, 마하프랄라야가 올 때 마야의 창조물인 객관적 우주 전체도 완전히 사라져 무(nothingness)가 된다. 이 때 우주는 전혀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진다. 

실재는 영원하고(timeless) 절대적이다

진화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우주는 그 자체로 상상에 불과하다. 사실은 불가분하고 영원한 단 하나의 실재(Reality)가 있을 뿐이며, 이것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실재는 시간을 초월한다. 이 무기한적인(timeless) 실재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과정(time-process) 전체는 순수한 상상에 불과하며, 지나간 수십억 년과 다가올 수십억 년은 단 1초의 가치도 없다. 마치 이 모두가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가 그 유일한 실재(One Reality)로부터 나온 실질적인 결과물이라 볼 수는 없다. 만일 이 우주가 유일한 실재의 결과물이라면, 실재는 하나의 상대적 개념(relative term)이 되거나 {실재와 상상이 합성된} 일종의 합성적인 존재(composite being)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유일한 실재는 절대적이다.

실재와 무

유일한 실재는 안에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실재는 유(Everything)다; 그러나 자체의 그림자로 무(Nothing)를 지닌다. ’전체-포괄적인 존재'(all-inclusive existence)라는 개념에는, 그 무엇도 존재의 바깥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 암시된다.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비존재(nonexistence), 즉 무(Nothing)의 개념은 존재(being)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정의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비존재’ 즉 ‘무’는 ‘존재’를 보완하는 측면이 된다. 그렇다고 ‘무’가 고유의 분리되고 독립된 존재성을 갖췄다고 볼 수는 없다. ‘무’는 그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다. ‘무’는 그 자체만으로는 그 무엇의 원인도 될 수 없다.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는 ‘무’, 그 자체만에서 나온 결과물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유일한 실재에서 나온 결과물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는 과연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실재(Reality)와 우주

다면적으로 진화하는 우주는, ‘유일한 실재’와 ‘무’가 혼합되면서 발생한다. 우주는 ‘유일한 실재’의 배경에 ‘무’가 비추어질 떄, ‘무’에서 솟아난다./우주는 ‘무’가 ‘유일한 실재’를 배경으로 드리워질 때, ‘무’에서 솟아난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가 부분적이나마 유일한 실재의 결과물이라거나, 조금이라도 실재하는 요소를 지닌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주는 ‘무’에서 나온 결과물이며, 아무 것도 아니다. 우주는 존재성을 지닌 듯할 뿐이다. 우주가 존재하는 듯한 원인은, ‘유일한 실재’가 말하자면 ‘무’의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즉 ‘무’가 ‘유일한 실재’에 더해질 때의 결과물이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유일한 실재’는 이로 인해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다. ‘유일한 실재’는 절대적이기에, 그 어떤 더함이나 뺌에 의해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 ’유일한 실재’는 언제나 있던 그대로 있으며, 그 자체로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무’로부터 솟아난 천지창조의 파노라마와는 무관하게 관심도 없이 남아있다. ‘무’는 수학의 영(0)의 가치에 비교될 수 있다. 영(0) 스스로는 양(+)의 가치가 없으나, 다른 번호에 덧붙었을 때 다수(many)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는 ‘무’가 유일한 실재와 결합될 때, ‘무’로부터 솟아난다.

자신과 주변 환경 사이의 상상의 분리  

진화 과정 전체는 상상의 영역 안에서 벌어진다. ‘유일한 실재의 바다'(one ocean of Reality)에 실체 없는(apparent) 상상의 동요가 일어나면, 이로부터 각각의 분리된 의식의 중심들로 구성된 다면적 세계가 솟아난다. 여기에는 생(生)을 자아(self)와 비-자아(not-self)로 나누는, 즉 ‘나’와 ‘환경’으로 나누는, 기본적인 분리가 수반된다. 그러나 의식은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는 전체성을 상상으로 나눈 일부인) 이 ‘한정된 자아’와의 동일시에 영원히 만족할 순 없다; ‘한정된 자아’의 허위성과 불완전성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은 끊임없는 초조함에 갇히게 되고, 이 초조함은 의식으로 하여금 ‘비-자아’와의 동일시를 시도하게 만든다. ‘비-자아’적 부분 즉 주변 환경 중에서 의식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 성공한 것들은, ‘내 것’의 형태로 자아와 연계된다. 그리고 ‘비-자아’적인 부분 중에 자신과 성공적으로 동일시하지 못한 부분들은 주변환경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그 자아를 제한하고 자아와 대립되는 요소가 된다.
따라서 의식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이원성의 종말에 이르는 대신, 그것의 변형에만 이르게 된다. 의식이 헛된 상상의 작용에 지배받는 한, 이원성을 끝내는 데 성공할 수 없다. 비-자아적인 요소들(즉, 주변환경)과 동화되려는 의식의 다양한 시도들은, 애초의 이원성을 무수히 다양한 형태의 생소하지만 전과 다름없는 이원성으로 대체하는 결과만을 낳는다. 주변 환경의 특정 부분들에 대한 수용과 거부는 각각 ‘원함’과 ‘원하지 않음’으로 표출된다; 이에 따라 즐거움과 고통, 좋음과 나쁨 등의 반대극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수용’도 ‘거부’도 결코 이원성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올 수 없으며, 그래서 의식은 이 반대극들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게 된다. 개체의 전체적 진화 과정은 이 반대극들 사이를 진동하며 오가는 특성을 지닌다.

산스카라의 철저한 결정론

한정된 개체의 진화 과정은, 수억겁에 걸쳐 그 개체가 축적해온 산스카라들에 의해 완전히 정해진다; 이 모든 것도 환상에 속하긴 하지만, 산스카라의 결정론은 자동적이며 철두철미하다. 모든 행위와 체험은 (아무리 짧은 순간의 것일지라도) 정신적 신체(mental body)에 인상(impression)을 남긴다. 이 인상은 정신적 신체에 객관적(objective) 수정을 가한다; 같은 하나의 정신적 신체가 계속 유지되듯이, 개체가 축적해온 인상들도 여러 생애를 거쳐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축적되어 온 산스카라들이 (정신적 신체에 단지 잠재적으로 남는 대신) 스스로를 표현하기 시작하면, 개체는 이것을 욕망으로서 체험한다; 즉 그 욕망을 주관적(subjective)으로 감지한다. 객관성과 주관성은 산스카라의 두 측면이다: 객관성은 산스카라가 잠재된 수동적 상태고, 주관성은 산스카라가 발현되는 활동적 상태다.
축적된 산스카라들은 활동적인 단계를 통해, 한정된 자아가 체험해야 할 각각의 체험과 행위를 일일이 정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많은 양의 필름이 필요하듯이, 한정된 자아의 하나의 동작을 결정하는 데도 많은 경우 수많은 산스카라들이 관여된다. 산스카라들은 이런 식으로 ‘표현’과 ‘충족’(실현)의 체험을 통해 소모된다. 약한 산스카라들은 정신적으로(mentally) 소모되고, 좀더 강한 산스카라들은 욕망의 형태 내지는 상상 속의 체험을 통해 기적으로(subtly) 소모되며, 강력한 산스카라들은 육체적 활동을 통해 표현됨으로써 물질적으로(physically) 소모된다.
산스카라들이 소모되는 과정은 이렇게 계속해서 진행되지만, 산스카라들로부터의 해방에는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행동을 할 때뿐 아니라 이미 있는 산스카라들을 소모하는 과정에서도 불가피하게 새로운 산스카라들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산스카라의 짐은 계속해서 늘어만 가고, 개체는 스스로 그 짐을 떨쳐버리는 문제에 대해 무력함을 맞이하게 된다.

반대극들을 통한 균형

어떤 특정한 행위나 체험을 통해 축적된 산스카라들은, 그와 비슷한 행위나 체험으로 마음이 유인되도록 한다. 그러나 그 경향이 한계점에 이르면 자연적인 반작용에 의해서 정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고, 이제는 반대편 산스카라들이 작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간이 마련된다.
많은 경우, 두 개의 반대적 요소들이 동일한 ‘일련의 상상'(chain of imagination)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유명 작가로 부와 명예, 좋은 아내 등 삶의 모든 유쾌한 것을 체험한 사람이 말년에는 부와 명예, 아내 등 삶의 모든 좋은 것을 잃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련의 상상’의 두 반대 요소들이 한 생애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평생을 강력한 왕으로 전쟁에서 늘 승리만 거두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는 다음 생에서 패배나 이와 비슷한 체험을 거듭함으로써, 체험의 균형을 이루어 ‘일련의 상상’을 완성해야 한다. 이처럼 산스카라들의 순수-심리적인 지배력은 영혼의 더 깊은 목적론적(teleological) 필요에 종속된다.

살인의 예

어떤 사람이 이번 생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자. 이 행위는 그의 정신적 신체(mental body)에 ‘살인’의 산스카라들을 예치시킨다. 만일 의식이 단지 이 산스카라들이 창출하는 초기의 경향성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그는 무한정 계속해서 살인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그 행위를 할 때마다 탄력이 붙어, 그와 비슷한 행위를 이후에 더더욱 하게 될 것이다. 만일 ‘체험의 논리’(logic of experience)에 이런 경향을 전환시키는 기제가 마련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풀이되는 결정론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쪽 체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머지 않아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대쪽으로 넘어가려고 하게 된다.
따라서 살인을 하는 체험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살인을 당해야 하는 심리적 필요성과 살인을 유도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가 연관된 전체 상황의 한쪽 부분, 즉 죽이는 부분만을 체험한 것이다. 전체적인 상황의 반대쪽 짝인 살인당하는 역할은 아직 그에게 낯설고 생소한 정보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체험에 소개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겪은 상황의 반대쪽 체험을 유인하여 전체 체험을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며, 의식에는 이 새롭고 절실한 필요성을 충족시키려는 경향이 생겨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전체 상황을 완성하기 위해 살인당하려는 경향을 머지 않아 계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다음 생에 나타나 그를 죽일 사람은 누구인가?” 다음 생애에 그를 죽일 살인자는 그가 전생에 죽인 사람일 수도 있고, 비슷한 산스카라를 지닌 어떤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개체들 사이에 오가는 행위와 상호-행위(inter-action)의 결과로, 산스카라적 인연 또는 연결고리가 생겨난다; 새로운 물질적 신체를 취할 때, 개체는 과거에 산스카라적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과 더불어 태어날 수도 있고, 비슷한 산스카라들을 지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환생에 대한 이러한 조절은, 이원성의 진화 과정이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구성된다.

반대들을 통한 반대들의 초월

옷감을 짜는 베틀의 북이 왔다 갔다 하듯이, 인간의 마음(mind)도 양극 사이를 오가는 씨실과 날실처럼 삶(생애)이라는 옷감을 짠다.영적인 삶의 발달 과정은 직선 코스라기보다는, 지그재그 코스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강의 양쪽 둑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강둑이 없었더라면, 강물은 사방으로 흩어져 목적지인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의 생명력(life-force)도 반대극들의 양 끝 사이에 한정되지 않았더라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한없이 흩어져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삶이라는 강의 양쪽 둑은 두 개의 평행선이라기보다는, 점점 가까워져서 종국에는 해탈의 지점에서 만나는 두 선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양극 사이의 교호작용/ 진동작용(oscillation)은 개체가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줄어들다가, 마침내 목표를 실현했을 때 완전히 멈추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오뚜기의 움직임이 중력에 의해 서서히 줄어들다가 가만히 앉는 자세에 이르는 것과 같다. 오뚜기를 흔들면 한동안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흔들림의 진폭은 점차 짧아지다가, 결국 고정된 상태에 이른다. 우주적 진화의 경우에, 반대극들 간의 작용과 반작용(교호작용)이 이렇게 점차 감소되어 멈추는 것을 마하프랄라야(Mahapralaya)라고 한다; 그리고 개체의 영적 진화의 경우에 이를 해탈(Liberation)이라고 한다.

의식의 역진화(involution)의 경지들

이원성(duality)의 단계에서 비이원성(non-duality)으로 가는 것은, 다만 의식 상태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 두 단계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의 차이는 무한하다. 이원성은 ‘신-아닌 상태'(not-God state)고 비이원성은 ‘신의 상태'(God-state)다. 이 두 경지 사이의 무한한 차이는 6경지 의식과 7경지 의식을 가르는 심연을 이룬다. 그 아래에 있는 6개의 의식의 경지들*도 상당히 먼 계곡들로 서로 갈라져 있다. 이들 사이의 차이는 광대하지만, 그래도 무한하지는 않다; 이 경지들은 모두 (양극 사이의 교호 작용으로 이뤄진) 한정된 체험의 양극성(bi-polarity)의 지배를 동일하게 받기 때문이다.
1경지와 2경지의 차이, 2경지와 3경지의 차이, 이런 식으로 6경지에 이르기까지 각 경지들의 차이는 엄청나긴 하지만, 무한하진 않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원성에 속한 여섯 경지들 중 그 어느 것도 실제로 7경지와 더 가깝다고 할 순 없다. 6경지와 7경지의 차이가 무한한 것처럼, 여섯 경지 중 그 어느 경지와 7경지의 차이도 무한하다. 여섯 경지를 거쳐 오르는 영적 진보는 상상 속에서 벌어지지만, 7경지의 깨달음은 상상의 멈춤이다; 그리하여 깨어난 개체는 참진실-의식(Truth-consciousness)에 드는 것이다. 

내적 경지를 거쳐가는 영적 진보

하지만 여섯 경지를 거쳐가는 환상의 영적 진보를 전적으로 피해갈 수는 없다.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상상이 완전히 소진되어야 한다. 완벽한 스승이 있는 경우, 그 제자는 반드시 여섯 경지를 모두 거쳐가야 한다. 완벽한 스승은 제자를 경지들로 이끌 때, 제자의 눈이 뜨인 상태 내지는 눈을 베일로 가린 채로 이끈다. 만일 두 눈을 가린 채 이끌어서 제자가 자신이 거치고 있는 경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제자의 욕망은 7경지 직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두 눈을 뜨게 한 채 이끌어서 제자가 자신이 거치고 있는 경지를 의식한다면, 제자의 욕망은 5경지에 도달할 때부터 사라지고 없다. 만일 완벽한 스승이 우주적 작업을 위해서 왔다면, 그는 주로 제자의 눈을 가린 채 이끈다; 왜냐하면, 눈을 가린 상태의 제자가 눈을 뜬 상태의 제자보다 우주적 작업에 있어 현실적으로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경지들을 거쳐가는 내내, 산스카라의 풀림(unwinding) 과정이 동반된다. 이러한 산스카라의 풀림 과정(unwinding)은 산스카라의 소모 과정(spending up)과 주의깊게 구분해야 한다. 산스카라의 소모 과정에서는, 산스카라들이 동력화되어 행위나 체험으로 방출된다. 그러나 이 소모 과정은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최종적 해방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축적되는 새로운 산스카라들이 소모되는 산스카라들을 대체하고도 남으며, 게다가 소모 과정 자체도 또다른 산스카라들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풀림 과정에서는, 무한을 갈망하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산스카라들은 약해지고 소멸된다.

무한에 대한 갈망은 심한 영적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고통의 강도와, 경지들을 건너가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영적 고통의 격렬함은 비교도 할 수 없다. 일반적인 고통은 산스카라에서 야기되는 효과이고, 영적 고통은 산스카라의 풀림(unwinding)에서 야기되는 효과다.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하면, 사람은 기절을 해서(무의식이 돼서) 고통에서 구제받는다; 하지만 영적 고통에는 그런 식의 자동적인 구제가 없다. 그래도 영적 고통에는 일종의 쾌감도 때로는 섞여 있어서 지루해지지는 않는다.

깨달음의 평온함

무한에 대한 갈망은 절정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격렬해지고 극심해진다; 그리고 극에 달한 뒤 점차 식어가기 시작한다. 갈망이 식어간다고 해서, 의식이 무한에 대한 갈망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무한을 깨닫겠다는 일념은 그대로 지속된다. 갈망이 식었지만 잠재된 이 상태가, 무한을 깨닫기 위한 {최종} 예비단계다. 이 단계에서 ‘무한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망들을 전멸시키는 도구이며, 이제는 그 갈망마저 무한함의 불가해한 고요함 속으로 삼켜질 준비가 된 것이다. ‘무한에 대한 갈망’이 무한을 깨달음으로써 충족되기 위해선, 우선 의식이 제6경지를 너머 제7경지에 도달하여야 한다. 의식이 이원성을 넘어 비이원성에 도달하여야 한다. 즉 의식이 상상 속을 헤매는 대신, 상상의 끝에 도달해야만 한다.
완벽한 스승은 하나뿐인 실재가 유일한 실재임을 이해하고, 무(Nothing)는 단지 실재의 그림자라는 것을 안다. 그에게 시간은 이미 영원 속에 삼켜지고 없다. 그는 실재의 무시간성(timeless aspect)을 깨달았기에 시간을 넘어서 있으며, 스스로의 존재 안에 시간의 시작과 끝을 담고 있다. 그는 다수들(many)의 활동과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현상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은, 천지창조(creation)의 시작과 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거대하고 불가피하게 보이는 세상 만사의 행진에 압도된다; 이것은 그가 시간에 사로잡혀 올바른 시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산스카라의 충족 또는 불충족의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깊은 혼란을 느낀다. 그에게 있어 객관적 우주 전체는, 극복하지 않으면 인내해야만 하는 달갑지 않은 제약으로 보인다.
반면 완벽한 스승은 이원성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이원성의 특징인 산스카라들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는 모든 한정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우주의 온갖 폭풍과 스트레스도 그의 존재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온갖 북적거림은(건설적인 과정이든 파괴적인 과정이든), 그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는 영원한 의미가 머무는 참진실/진실(Truth)의 안식처로 이미 들어갔기 때문이다; 영원한 의미는, 환영처럼 스쳐가는 창조세계의 찰나적 가치들 안에서는 부분적이고 어렴풋하게 비춰질 뿐이다. 완벽한 스승은 일체 모든 존재를 자신의 존재 안에서 헤아리며, 펼쳐지는 현상세계 전체를 그저 놀이로 본다.

담론 3 신과 개체


신과 개체


신만이 유일한 실재(Reality)다

신(神)은 무한하다. 신은 선과 악, 옳고 그름, 미덕과 악덕, 탄생과 죽음, 쾌락과 고통 등의 이원성을 넘어서 있다. 이러한 이원적 측면들은 신의 것이 아니다. 만일 신을 하나의 분리된 독립체로 본다면, 신은 하나의 상대적 존재가 될 것이다. 이것은 선과 악이 서로 대응관계에 있듯이 신을 비-신(not-God)과 대응관계로 보는 것이며, ‘무한’을 ‘유한’의 반대편으로 보는 것이다. ‘유한’과 ‘무한’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이들을 둘로 구분한 것이며, 이 때 ‘무한’은 이미 이원성의 한 쪽 측면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무한은 상대가 없는 비이원적(non-dual) 존재에 해당한다. 만일 ‘무한’을 ‘유한’의 대응 상대로 본다면 이러한 ‘무한’은 ‘유한’의 상대로서 ‘유한’의 바깥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더이상 ‘무한’하다기보다는 일종의 ‘유한’이 될 것이다. ‘무한’은 ‘유한’의 대응 상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듯한 ‘유한’의 존재성도 거짓이다. 오직 ‘무한’만이 홀로 실재한다. 신은 이원성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하나의 존재만이 실재하며, 그 존재는 바로 우주적 대영혼(Universal Soul)이다. 모든 유한하거나 한정된 것들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며, 존재하는 듯할 뿐이다.  

 존재하는 듯한 ‘유한’

그대는 무한하다.  그대는 실제로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육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한된 존재로 여긴다. 그대가 지금 자리에 앉아있는 몸을 자신이라고 여긴다면, 그대의 참된 본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내면으로 들어가 자기 영혼의 참된 본성을 체험한다면, 그대가 천지창조(all creation)를 넘어서는 무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한다. 이 그릇된 동일시는 무지에서 기인한다; 이 무지는 마음(mind)을 매개체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자신이 물질적 신체(physical body)라고 생각한다. 영적으로 진보된 사람은 자신이 기적 신체(subtle body)라고 생각한다. 성자는 자신이 마음(mind)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 중 그 누구도 직접적인 참나-지식(Self-knowledge)을 지닌 영혼은 없다. 즉 이들은 환상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생각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대영혼(Soul)으로서의 영혼(soul)은 무한하며, 육체와 마음을 넘어서 있다; 그러나 무지로 인해 마음의 지배를 받게 되고 ‘생각하는 이’가 된 것이다; 따라서 때로는 자신을 육체로 여기고, 때로는 마음으로 여기게 된다. ‘마야’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한정된 관점으로 보면, 무수히 많은 개체들이 존재하는 듯 하다. 수많은 개체들이 있는 만큼 마음과 육체도 수없이 있는 듯 하다. 사실, 존재하는 것은 우주적 대영혼(Universal Soul) 하나뿐이다; 단지 개체가 다른 개체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할 뿐이다. 서로 다른 듯한 여러 개체들의 마음(mind) 가장 뒷편에는 단 하나의 같은 대영혼(Soul)이 자리하며, 이 대영혼은 그들을 통해 다양하게 이원성을 체험한다. 여럿(many) 속의 하나(One)가 여럿(many) 중의 하나(one)로 스스로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거짓된 사고(thinking), 즉 상상 때문이다.

거짓된 사고(false thinking)의 원인   

사고(thingking)가 잘못되는 이유는, 의식의 진화 과정 동안 축적해온 산스카라들(sanskaras)의 간섭 때문이다. 의식의 기능은 -욕망으로 나타나는- 산스카라들의 작용에 의해 왜곡된다. 의식은 여러 생을 거치면서, 체험들로부터 비롯되는 후유증의 부담을 계속적으로 받고 있다. 영혼의 지각(perception)은 이 후유증들에 의해 제한된다. 영혼의 생각은 산스카라들이 만들어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의식은 자체의 거짓된 사고가 투영한 환상에 꼼짝없이 사로잡힌 포로가 된다. 이러한 사고의 왜곡은 의식이 부분적으로 발달된 동물뿐 아니라, 의식의 발달이 완료된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완성된 의식의 활동범위

돌의 단계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진보되는 의식의 진화과정은, 인간의 단계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진화의 역사는 의식의 점진적인 발달의 역사다. 진화의 결실은 완성된 의식(full consciousness)이며, 완성된 의식은 인간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 완성된 의식마저도 먼지로 뒤덮인 거울과 같다. 산스카라들의 작용 때문에, 의식은 영혼의 본질에 관한 참되고 명백한 지식을 비추지 못한다. 의식이 완전히 발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진실 대신 상상의 피조물만을 낳게 된다;  이는 의식의 기능이 산스카라들의 무게에 의해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더불어 의식은 자체의 욕망들이 만들어낸 새장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활동범위도 제한된다. 

의식의 개체화

의식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산스카라들에 의해 정해지며, 의식의 기능 역시 욕망들에 의해 정해진다. 욕망들이 자기 만족을 추구하면서, 의식의 전체는 자기 중심적이 되고 개별화된다. 이 의식의 개체화는 어떻게 보면, 욕망의 소용돌이(vortex of desires)에서 초래되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은 온갖 욕망들에 휘말려 그 욕망들이 구성하는 제한된 개체성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영혼은 스스로가 테두리를 상상하고는, 자기-최면(self-hypnotized)에 걸려든다. 영혼은 스스로를 다른 개체들과 분리된, 한정된 존재로 보게 된다. 영혼은 개체적 존재성에 얽매이고, (각각의 육체와 마음을 지닌 수많은 개체들로 이루어진) 각양각색으로 분리된 존재들의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분리됨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태양빛이 프리즘을 관통하면, 빛은 굴절작용에 의해 분산되어 갈라지게 된다. 만일 각각의 광선들이 의식을 지닌다면, 그들은 자신을 다른 광선들과 분리된 존재라고 여길 것이다; 그들은 프리즘을 관통하기 전에 근원에서는 분리된 존재성이 없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식으로, 유일한 존재(One Being)는 마야(Maya)의 영역으로 내려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양성을 지니게 된다. 이 개체들의 분리성(separateness)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하나뿐인 우주적 대영혼(Universal Soul)이 스스로를 분리된 존재로 상상한다; 이 분리됨으로부터 ‘나’와 ‘내 것’, 이것에 상대되는 ‘너’와 ‘네 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영혼은 실제로는 나뉨이 없는 절대적인 단일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상상작용에 의해 다양하게 나누어진 존재인 듯 보이게 된다. 상상은 실재(Reality)가 아니다. 그 아무리 우수한 상상이라 해도,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상상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개체화된 에고로서 영혼이 축적해온 모든 체험들은 전부 상상이다. 이 체험들은 모두 영혼의 헛된 인식일 뿐이다. 우주적 대영혼(Universal Soul)의 상상으로부터 수많은 개체들이 탄생한다. 바로 이것이 마야(Maya) 즉 무지다.  

객관적 우주

분리되고 한정된 개체의 탄생과 나란히 더불어 객관적 우주(objective universe)도 존재하게 된다. 한정된 개체의 분리적 존재성이 사실이 아닌 상상에 불과하듯이, 객관적 우주도 그 어떤 독립적이고 분리된 실재성이 없다. 객관적 우주는, 유일한 우주적 참나(one universal Self)가 이러한 속성들을 통해 두번째 역할로 발현된 것이다. 마야의 영역으로 하강할 때, 영혼은 스스로 ‘온갖 다양한 존재'(manifold existence)의 제한성을 취한다. 영혼이 취하는 이 자기-제한(self-limitation)은, 의식의 제단에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영혼은 ‘불변의 무한한 절대적 존재’로 영원히 남지만, 시간, 다양성, 진화의 세계로 내려오는 현상적 하강을 통해 일종의 ‘무기한적 수축'(timeless contraction)을 겪는다. 그러나 실제로 진화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그 영혼의 의식뿐이다 – 이 의식의 한계들 때문에 제한된 개체성이 생기게 된다

3중 얽힘과 이원성

한정된 개체(limited individuality)의 역사는, 마음, 에너지, 물질(몸)과의 3중 얽힘이 발전되는 역사다. 이 세 영역은 모두 이원성(duality)의 지배를 받는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이원성을 초월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역들 속으로 얽매여 들어간다. 이원성에는 긴장을 통해 서로를 제한하고 균형을 잡아가는 반대극들(opposites)의 존재가 암시된다. 좋고 나쁨, 미덕과 악덕은 이러한 반대극들의 예다. 이원성에 휘말려 있는 무지한 영혼은, ‘좋음’과 ‘나쁨’ 둘 다에 얽매여 있다. ‘좋음’과 ‘나쁨’의 이원성은 무지로 인해 발생한다;  하지만 한 번 얽히기 시작한 영혼은 이원성의 지배를 받는다.
물질(몸), 에너지, 마음과의 3중 얽힘의 진화과정 도중에, 무지한 영혼은 계속해서 원함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 영혼은 물질세계(gross world)의 좋고 나쁨을 원하고, 기적세계(subtle world)의 좋고 나쁨을 원하고, 정신세계(mental world)의 좋고 나쁨을 원한다. 이러한 좋고 나쁨의 구별로 인해, 영혼의 원함도 좋거나 나쁜 원함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원함도 끊임 없이 계속되는 반대극들의 긴장에 의해 필연적으로 제한된다. 이 긴장은 (영원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무한한 상태에 도달하는 대신)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진동을 야기한다. 무한함은 이원성의 영역을 넘어선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먼저 의식이 산스카라의 장벽들을 부수고 나와 한정된 개체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협곡(chasm)

이제까지 우리는 의식의 활동 가능 범위가 산스카라들에 의해 어떻게 제한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제한됨은 인간의 정신구조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그 중 한 부분은 의식할 수 있는 범위에 해당되며, 다른 한 부분은 의식을 넘어선 범위에 해당된다. 이 무의식적인 부분의 전체적인 규모는 물질(matter)이 존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힘(power)과 동일하다. 이것을 정통 종교들(orthodox religions)에서는 하나님(신, God)이라고 부른다. 이런 개념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그 궁극적 실재를 완전히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뿐이다. 의식의 확장은, 전에는 무의식의 일부였던 것을 의식하게(being conscious)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의식이 무의식을 점진적으로 정복해가는 과정은, 무한한 범위와 무제약적 기능을 지닌 ‘완벽한/무상의 의식'(consummate consciousness)에 도달할 때 절정에 이른다. 이 최고 상태의 의식과, 평범한 인간이 지닌 (완성된 상태지만) 제한적인 의식 사이에는, 약 49개의 의식 계몽(illumined consciousness)의 단계들이 있다. 이 단계들은 점차적으로 계몽되어 가는 의식의 주요 단계들을 말한다.

영적 진보

평범한 인간의 흐릿한 의식과 완벽한 스승(Perfect Master)의 완전히 계몽된 의식 사이의 커다란 격차는 ‘이기주의'(egoism)를 일으키는 산스카라들에 의해 만들어진다.이 산스카라들은 완벽한 성품, 헌신, 사심 없는 봉사를 통해 제거될 수는 있으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완벽한 스승(Perfect Master)의 도움을 받는 길이다. 영적 진보는 의식을 계속 더 발전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인간의 단계에서 의식은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적 진보는 의식을 오히려 산스카라들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  의식은 모든 다양한 상태의 존재 안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하지만 의식이 무지의 그림자 한 점 없이 무한함의 참지식을 비추지 않고는 결코 정점에 도달할 수 없다; 또한 존재의 다양한 영역들을 비추는 창조의 전체 범위를 다루지 않고는 의식의 정점에 이를 수 없다. 의식은 모든 다양한 상태의 존재 안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하지만 의식이 한 치의 무지 없이 무한에 대한 지식/참지식을 비추지 못한다면 결코 절정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의식이 천지창조의 전체 규모와 존재의 모든 다양한 영역들을 비추어보지 못한다면, 결코 절정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깊은 잠

매번 잠들 때마다, 그대는 무한한 실재(Infinite Reality)와 무의식적으로 합일된다. 이 합일은 무의식이 의식 위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협곡이 연결된다. 그러나 그대는 이 합일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의식적으로 얻지 못한다. 그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전날 하던 일상적인 행동과 체험으로 돌아오고, 이전 그대로의 인간성을 지닌 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일 이 최상의 실재(Supreme Reality)와의 합일이 의식적으로 일어났다면, 잠에서 깰 때 그대는 완전히 새롭고 무한히 풍요로운 삶을 맞이했을 것이다. 

무한한 실재와의 의식적 합일

완벽한 스승은 무한한 실재와 의식적으로 합일되어 있다. 그의 경우, 의식과 무의식을 가르는 협곡이 연결돼 있다; 그의 상태는 사람이 깊은 잠을 즐길 때처럼 무의식이 의식 위로 확장된 것이 아니라, 의식이 무의식 위로 확장된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는 동요는 한정된 개체에게만 해당된다. 완벽한 스승의 경우는, 의식이 무의식을 최종적으로 영구히 정복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참나-지식(Self-knowledge) 상태는 변함없이 지속되고 깨어지지 않으며, 한 치의 감소도 없이 같은 상태로 남아있다. 완벽한 스승의 경우는, 의식이 무의식을 최종적으로 영구히 정복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참나-지식(Self-knowledge) 상태는 끊임없이 지속되며, 한 치의 변화도 감쇠도 겪지 않는다. 이를 통해, 완벽한 스승은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수면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몸을 쉴 때에도 단 한 순간도 의식의 단절을 체험하지 않는다.

완벽의 상태

완벽의 상태에 든 ‘완성된 의식’은 계몽(Illumination)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이 사라짐으로써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정복이 완료된 것으로, 그 인간은 밝게 타오르는 계몽(Illumination)의 영광 속에 끊임없이 거하며, 계몽과 하나가 된 채 남는다. 그는 계몽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원성의 지배를 받아 여전히 각양각색의 체험들을 참되고 최종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아직 무지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최종적 이해의 단계에 도달한 인간은, 둘도 없는 하나(one)인 무한(The Infinite)이 유일한 실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한은 편재하며, 그 어떤 경쟁자도 남김 없이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지닌 사람은 최고의 의식 상태를 달성한 것이다. 이 상태는 진화의 열매인 ‘완성된 의식’을 보유한 채, 산스카라와 욕망들이 야기하는 한계들을 완전히 초월한 상태다. 무지의 창조물인 한정된 개체성은(individuality), 무제한의 ‘신성한 인격'(Divine Inidividuality)으로 전환된다. 제한불가한(illimitable) ‘우주적 대영혼’의 의식이 (그 어떤 형태의 환상도 일으키지 않고) 하나의 인격으로 집중되어 개체화(individualized)된다./’우주적 영혼’의 광대한(illimitable) 의식이 그 어떤 형태의 환상도 일으키지 않고, 하나의 인격에 집중된 것이다. 그 사람은 모든 자기 중심적인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며, 신성을 표현하는 ‘지고의 우주적 의지'(supreme and universal will)가 자발적으로 흐르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개체성은 모든 무지가 사라짐으로써 무한해진다. 개체성은 마야의 분리성과 이원성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면서, 거리낌 없는 기쁨, 순수한 존재, ‘대상 없는 자각'(objectless awareness)을 누리는 해탈의 상태를 즐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고 당황하게 만드는 일체의 환상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 어떤 면에서 그는 죽은 사람이다. 분리감의 근본적 원인인 개인적 에고가 이미 영원히 전멸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정복될 수 없는 사랑과 영원한 지복을 누리며 그는 영원히 살아있다. 그는 전지전능하며, 전체 우주는 그의 영적 작업인 인류의 완벽화를 위한 터전이다.

담론 2 이기심

영어 원본

이기심

이기심의 분석

이기심은 행위(action)와 체험(experience)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들의 경향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이기심은 자신의 참된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 인간 의식은 기나긴 의식의 진화 과정 동안 축적되어온 다양한 종류의 인상들(impressions)에 의해 흐려져 있다. 이 인상들은 스스로를 욕망으로 표현하며, 의식의 활동 범위는 이 욕망들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이 인상들, 즉 산스카라들(sanskaras)은 의식의 활동 범위 주변에 일종의 테두리를 형성한다. 산스카라들이 형성하는 이 테두리는, 개체의 의식이 벗어나지 못하는 한정된 영역을 구성한다.

어떤 욕망은 잠재적으로 남는 반면, 어떤 욕망은 스스로를 행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행동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려는 욕망의 역량은 그 욕망과 관련된 산스카라들의 양과 강렬함에 달려있다. 기하학적인 비유를 든다면 욕망이 행위로 옮겨질 때, 욕망은 그 욕망과 연관된 산스카라들이 형성하는 원의 반지름과 같은 길이를 거친다고 할 수 있다. 충분한 힘을 모으게 되면, 그 욕망은 충족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행동으로 표출한다.

원함(wanting)은 불만족으로 끝난다

이기심의 범위는 욕망들의 범위에 정비례한다. 갖가지 다양한 욕망들로 인해, 영혼은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충분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삶은 편협해지고 자기 중심적(self-centered)이 된다. 개인적인 에고(ego)의 생애는 ‘원함'(wanting)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원함’은 변하고 사라질 것들을 통해 충족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을 말한다그러나 일시적인 것들을 통해서는 참된 충족이 있을 수 없다. 삶의 무상한 것들로부터 얻어지는 만족은 오래 가지 못하며, 결국 인간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걱정거리와 함께 전반적인 불만족만이 남게 마련이다.

육욕(lust), 탐욕(greed), 그리고 분노( anger)

좌절된 에고가 찾게 되는 표현의 주된 형태는 육욕, 탐욕, 분노다. 육욕(lust)은 많은 면에서 탐욕과 아주 흡사하지만,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르다; 육욕은 물질적 영역(gross sphere)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육욕은 물질적 신체(physical body)를 매개체로 스스로를 표현하며, 육체(flesh)와 연관된다. 이것은 물질적 영역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탐욕(greed)은 초조한 가슴(heart)의 상태이며, 주로 권력욕과 재산욕으로 구성된다. 재산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욕망들을 충족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시도들은 오직 부분적인 충족만을 가져온다; 이러한 부분적인 충족은 욕망을 소멸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길을 부채질하여 증가시킨다. 따라서 탐욕에는 정복해야 할 영역이 늘 끝없이 펼쳐지며, 개체에게는 끝없는 불만족만이 남게 된다. 탐욕의 주된 표현은, 인간의 감정적인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 탐욕은 기적 영역(subtle sphere)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분노는 짜증난 마음의 분출이다. 이것은 욕망의 좌절로 인해 생겨난다. 분노는 제한된 에고를 먹여살리며, 지배와 공격에 사용된다. 분노의 목표는 욕망의 충족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의 제거다. 분노의 광란은 이기주의와 자만을 키우며, 제한된 에고를 지지하는 최대 후원자 역할을 한다. 분노의 거처는 마음(mind)이며, 분노는 주로 마음의 활동으로 표현된다. 분노는 정신적 영역(mental sphere)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육욕, 탐욕, 분노는 그들의 표현적 매개체로서 각각 육체(body), 가슴(heart), 마음(mind)을 사용한다.

악순환의 고리

인간은 육욕, 탐욕, 분노를 통해 실망을 체험한다; 그렇게 좌절한 에고는 또다시 육욕, 탐욕, 분노를 통해 더 큰 만족감을 찾는다. 의식은 이렇게 해서 끝없는 실망의 악순환에 말려들게 된다. 실망은 육욕, 탐욕, 분노 중 어느 하나의 표현이 좌절됨으로써 생긴다. 따라서 실망은 물질적, 기적, 정신적 얽매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실망은 육욕, 탐욕, 분노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우울함이며, 이기심과 이 세 가지는 늘 공존한다. 이들 세 가지 악덕 요소의 공통 기반인 이기심은, 모든 실망과 걱정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기심은 자멸적이다. 이기심은 욕망을 통해 충족을 구하지만, 오직 끝없는 불만족에 이를 뿐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불만과 실망으로밖에 이끌지 못한다;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의 문제는 욕망들을 버릴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러나 욕망은 기계적 억압을 통해서는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 욕망의 소멸은 오직 참지식(Knowledge)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대가 단 몇 분만이라도 생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신중히 생각해본다면, 욕망의 공허함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지난 몇 년간 겪어온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을 생각해보라. 그대가 평생 동안 즐겼던 모든 것들은 오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가 평생 동안 겪었던 모든 괴로움도 지금은 지나가고 없다. 모두 다 환상이었다.
행복함이 그대의 권리인데도, 그대는 온갖 것들을 원함으로써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한다. 원함은 끝없는 초조함의 원천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대는 실망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더욱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다시 불행해진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라고 외쳐라, 그리고 행복하라. 원함의 헛됨을 지속적으로 자각하는 것이 그대를 마침내 참지식(Knowledge)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자아-지식(self-knowledge)은 그대를 원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며, 항구적인(abiding) 행복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원함의 단념

‘원함’과 ‘필요’는 주의깊게 구별해야 한다. 자만심, 분노, 탐욕, 육욕은 모두 ‘필요’와 다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필요하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실수다. 만일 그대가 사막에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시원한 물이지 레몬주스가 아니다.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필요한 것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필요들은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원함’은 상상에 심취한 결과물이다. 행복함이 있으려면, ‘원함’들을 주의깊게 죽여야 한다. 이기심은 그 자체가 욕망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원함’의 단념은 곧 죽음의 과정이 된다. 일반적인 의미로 죽음은 육체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낮은 욕망들의 단념을 뜻한다. 성직자들은 천국와 지옥에 대한 우울한 그림을 그려 사람들로 하여금 가짜의 죽음을 준비하게 한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이 지속되기 때문에, 이러한 죽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진정한 죽음은 욕망의 중단으로 이루어지며, 이 죽음은 서서히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사랑과 봉사(보시)

밝아오는 사랑의 여명은 이기심의 죽음을 수월하게 한다. 존재란 사랑함으로써 죽어가는 것이다. 그대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기심의 한계성들은 무지(無知: ignorance)에서 비롯된다. 한 개인의 관심사와 활동 영역을 확대하면, 그는 더 명예로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봉사(보시)의 삶으로 향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은 선한 욕망들을 많이 품게 된다. 그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도와줌으로써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한다. 이러한 선한 욕망에도 간접적, 잠재적으로 흔히 자아가 수반된다; 그럼에도 선행은 편협한 이기심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선한 욕망들도 악한 욕망들과 마찬가지로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더 깨어나고 확장된 이기심의 한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한 욕망들을 계속 품다 보면, 그 사람의 이기심은 결국 이기심 자체의 종말을 가져올 더 넓은 사고관을 포용하게 된다이렇게 되면 그는 고작 남의 눈에 띄고 주목을 끌려고 한다거나 소유욕을 발휘하는 대신, 남에게 유용해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기심의 발생

개인적 에고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욕망들은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 둘 중 하나다.보통 나쁜 욕망들은 이기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좋은 욕망들은 이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나 이기심과 이타심을 구분하는 명확한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둘 다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차이는 대체적으로 범위의 차이일 뿐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수많은 생을 걸친} 개인적 에고의 생애에서 크게 두 단계를 형성하나, 이들은 계속적으로 이어진다. 
이기심은 모든 욕망들이 좁은 개체성을 향해 집중될 때 생겨난다. 이타심은 이 욕망들의 투박한 구조가 붕괴되어 욕망들이 더 넓은 범위로 분산될 때 생겨난다. 이기심은 제한된 범위로 관심의 폭이 좁혀지는 것이고, 이타심은 더 넓은 범위로 관심의 폭이 확장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기심은 제한된 형태의 이기심이고, 이타심은 더 넓은 활동 범위로 확장된 이기심이다.

이기심을 전환시켜 이타심으로 

이원성의 영역을 완전히 초월하려면, 먼저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선행을 끈기있게 지속적으로 행하면 이기심은 닳아 없어진다. 선행의 형태로 확장되고 표현되는 이기심은, 이기심 자체를 파괴하는 도구가 된다.  이기심의 번성과 소멸을 좌우하는 핵심 고리가 바로 선(善)이다. 애초에 악한 성향을 낳았던 이기심은, 선행을 통해 결국 스스로의 패배를 불러오는 영웅이 된다. 악한 성향들이 선한 성향들로 완전히 대체될 때, 이기심은 이타심으로 전환된다. 즉 개체적인 이기심이 우주적 공익(universal interest)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선하고 사심없는 삶도 여전히 이원성(opposites)에 얽매어 있긴 하지만, 선함은 이원성(opposites)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다. 선함은 영혼이 스스로의 무지를 전멸시키는 수단이다.  

우주적 자아(Universal Selfhood)

영혼은 선(善)을 거쳐서 신(神)에게로 간다. 이때 이타심은 옳고 그름, 미덕과 악덕 등 마야(환상, 무지)의 모든 이원적 측면을 초월하는 우주적 자아 속으로 녹아든다. 이타심이 절정에 이르면, 모든 것과 하나임(oneness)을 느끼기 시작한다. 해탈의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이기심도 이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 둘은 모두가 다 나라고 느끼는 전체-자아감(전체-자아임, selfness for all) 속으로 흡수, 융해된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깨달음에는 헤아릴 수 없는 지복(bliss)과 평온함이 동반된다. 반면, 어떤 식의 영적 침체나 상대적 가치관의 망각(소멸 obliteration)도 가져오지 않는다. 전체-자아감은 흔들림 없는 조화를 가져오면서도 분별력은 전혀 상실시키지 않는다; 또한 흔들림 없는 평온을 가져오면서도 주변에 대한 냉담함은 야기하지 않는다. 이 전체-자아감은 고작 주관적인 {상상력으로} 합성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포함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union)을 실제로 이룸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다.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

모든 욕망들을 제거하고 오직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만을 갈망함으로써, 그대의 가슴을 열어라. 궁극적 실재는 외부 환경의 변하는 것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존재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대의 가슴(human heart) 안으로 그대의 영혼이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가슴의 문은 잠겨 있고 그 안은 수많은 욕망들로 가득차 있다. 가슴의 문을 닫고 있지 말아라. 변함없는 지복의 원천이 사방팔방에 있는데도, 무지에서 비롯되는 욕망들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하고 있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목표가 온전히 환하게 펼쳐지려면, 제한된 에고와 그것에 따르는 모든 욕망들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소멸되어야만 한다.

영성은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다

‘욕망의 단념(renunciation)’는 금욕주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뜻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의 삶의 부정은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신성(Divinity)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영성(Spirituality)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야만 한다. 영성은 인간의 모든 선하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들을  해방시키는 긍정적인 태도다. 또한 영성은 주변 환경에 있는 모든 자애롭고 아름다운 것들의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영성은 세속적 활동의 외형적 단념을 요구하지 않으며, 세속적 의무와 책임의 회피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영성이 단지 요구하는 것은, 세속의 활동을 하는 중이나 한 개인의 특정한 자리나 위치에서 비롯되는 의무를 이행하는 와중에도 그의 내적 정신(spirit)이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채로 있는 것이다. 완벽함이란, 이원성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얽매임들로부터의 자유는 제약 없는 창조성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얽매임이 두려워서 삶에서 도망가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도피는 삶의 부정이다. 완벽함은 자연의 이원적 표현들로부터 움츠러드는 것에 있지 않다. 삶의 얽매임들에서 도피하려는 시도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암시된다. 영성은, 이원성(opposites)에 의해 압도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고 완전하게 삶을 맞이하는 것에 있다. 영성은 모든 환상들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해야만 한다 – 그 환상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강력하다 해도. 완벽한 인간(Perfect One)은 삶의 다양한 형태들과의 접촉을 피하지 않으면서 강렬히 활동하는 와중에도, 완전히 초연한(complete detachment) 채 기능을 완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