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2 이기심

영어 원본

이기심

이기심의 분석

이기심은 행위(action)와 체험(experience)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들의 경향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이기심은 자신의 참된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 인간 의식은 기나긴 의식의 진화 과정 동안 축적되어온 다양한 종류의 인상들(impressions)에 의해 흐려져 있다. 이 인상들은 스스로를 욕망으로 표현하며, 의식의 활동 범위는 이 욕망들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이 인상들, 즉 산스카라들(sanskaras)은 의식의 활동 범위 주변에 일종의 테두리를 형성한다. 산스카라들이 형성하는 이 테두리는, 개체의 의식이 벗어나지 못하는 한정된 영역을 구성한다.

어떤 욕망은 잠재적으로 남는 반면, 어떤 욕망은 스스로를 행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행동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려는 욕망의 역량은 그 욕망과 관련된 산스카라들의 양과 강렬함에 달려있다. 기하학적인 비유를 든다면 욕망이 행위로 옮겨질 때, 욕망은 그 욕망과 연관된 산스카라들이 형성하는 원의 반지름과 같은 길이를 거친다고 할 수 있다. 충분한 힘을 모으게 되면, 그 욕망은 충족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행동으로 표출한다.

원함(wanting)은 불만족으로 끝난다

이기심의 범위는 욕망들의 범위에 정비례한다. 갖가지 다양한 욕망들로 인해, 영혼은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충분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삶은 편협해지고 자기 중심적(self-centered)이 된다. 개인적인 에고(ego)의 생애는 ‘원함'(wanting)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원함’은 변하고 사라질 것들을 통해 충족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을 말한다그러나 일시적인 것들을 통해서는 참된 충족이 있을 수 없다. 삶의 무상한 것들로부터 얻어지는 만족은 오래 가지 못하며, 결국 인간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걱정거리와 함께 전반적인 불만족만이 남게 마련이다.

육욕(lust), 탐욕(greed), 그리고 분노( anger)

좌절된 에고가 찾게 되는 표현의 주된 형태는 육욕, 탐욕, 분노다. 육욕(lust)은 많은 면에서 탐욕과 아주 흡사하지만,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르다; 육욕은 물질적 영역(gross sphere)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육욕은 물질적 신체(physical body)를 매개체로 스스로를 표현하며, 육체(flesh)와 연관된다. 이것은 물질적 영역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탐욕(greed)은 초조한 가슴(heart)의 상태이며, 주로 권력욕과 재산욕으로 구성된다. 재산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욕망들을 충족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시도들은 오직 부분적인 충족만을 가져온다; 이러한 부분적인 충족은 욕망을 소멸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길을 부채질하여 증가시킨다. 따라서 탐욕에는 정복해야 할 영역이 늘 끝없이 펼쳐지며, 개체에게는 끝없는 불만족만이 남게 된다. 탐욕의 주된 표현은, 인간의 감정적인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 탐욕은 기적 영역(subtle sphere)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분노는 짜증난 마음의 분출이다. 이것은 욕망의 좌절로 인해 생겨난다. 분노는 제한된 에고를 먹여살리며, 지배와 공격에 사용된다. 분노의 목표는 욕망의 충족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의 제거다. 분노의 광란은 이기주의와 자만을 키우며, 제한된 에고를 지지하는 최대 후원자 역할을 한다. 분노의 거처는 마음(mind)이며, 분노는 주로 마음의 활동으로 표현된다. 분노는 정신적 영역(mental sphere)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육욕, 탐욕, 분노는 그들의 표현적 매개체로서 각각 육체(body), 가슴(heart), 마음(mind)을 사용한다.

악순환의 고리

인간은 육욕, 탐욕, 분노를 통해 실망을 체험한다; 그렇게 좌절한 에고는 또다시 육욕, 탐욕, 분노를 통해 더 큰 만족감을 찾는다. 의식은 이렇게 해서 끝없는 실망의 악순환에 말려들게 된다. 실망은 육욕, 탐욕, 분노 중 어느 하나의 표현이 좌절됨으로써 생긴다. 따라서 실망은 물질적, 기적, 정신적 얽매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실망은 육욕, 탐욕, 분노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우울함이며, 이기심과 이 세 가지는 늘 공존한다. 이들 세 가지 악덕 요소의 공통 기반인 이기심은, 모든 실망과 걱정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기심은 자멸적이다. 이기심은 욕망을 통해 충족을 구하지만, 오직 끝없는 불만족에 이를 뿐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불만과 실망으로밖에 이끌지 못한다;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의 문제는 욕망들을 버릴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러나 욕망은 기계적 억압을 통해서는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 욕망의 소멸은 오직 참지식(Knowledge)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대가 단 몇 분만이라도 생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신중히 생각해본다면, 욕망의 공허함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지난 몇 년간 겪어온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을 생각해보라. 그대가 평생 동안 즐겼던 모든 것들은 오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가 평생 동안 겪었던 모든 괴로움도 지금은 지나가고 없다. 모두 다 환상이었다.
행복함이 그대의 권리인데도, 그대는 온갖 것들을 원함으로써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한다. 원함은 끝없는 초조함의 원천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대는 실망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더욱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다시 불행해진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라고 외쳐라, 그리고 행복하라. 원함의 헛됨을 지속적으로 자각하는 것이 그대를 마침내 참지식(Knowledge)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자아-지식(self-knowledge)은 그대를 원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며, 항구적인(abiding) 행복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원함의 단념

‘원함’과 ‘필요’는 주의깊게 구별해야 한다. 자만심, 분노, 탐욕, 육욕은 모두 ‘필요’와 다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필요하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실수다. 만일 그대가 사막에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시원한 물이지 레몬주스가 아니다.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필요한 것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필요들은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원함’은 상상에 심취한 결과물이다. 행복함이 있으려면, ‘원함’들을 주의깊게 죽여야 한다. 이기심은 그 자체가 욕망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원함’의 단념은 곧 죽음의 과정이 된다. 일반적인 의미로 죽음은 육체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낮은 욕망들의 단념을 뜻한다. 성직자들은 천국와 지옥에 대한 우울한 그림을 그려 사람들로 하여금 가짜의 죽음을 준비하게 한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이 지속되기 때문에, 이러한 죽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진정한 죽음은 욕망의 중단으로 이루어지며, 이 죽음은 서서히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사랑과 봉사(보시)

밝아오는 사랑의 여명은 이기심의 죽음을 수월하게 한다. 존재란 사랑함으로써 죽어가는 것이다. 그대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기심의 한계성들은 무지(無知: ignorance)에서 비롯된다. 한 개인의 관심사와 활동 영역을 확대하면, 그는 더 명예로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봉사(보시)의 삶으로 향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은 선한 욕망들을 많이 품게 된다. 그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도와줌으로써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한다. 이러한 선한 욕망에도 간접적, 잠재적으로 흔히 자아가 수반된다; 그럼에도 선행은 편협한 이기심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선한 욕망들도 악한 욕망들과 마찬가지로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더 깨어나고 확장된 이기심의 한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한 욕망들을 계속 품다 보면, 그 사람의 이기심은 결국 이기심 자체의 종말을 가져올 더 넓은 사고관을 포용하게 된다이렇게 되면 그는 고작 남의 눈에 띄고 주목을 끌려고 한다거나 소유욕을 발휘하는 대신, 남에게 유용해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기심의 발생

개인적 에고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욕망들은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 둘 중 하나다.보통 나쁜 욕망들은 이기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좋은 욕망들은 이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나 이기심과 이타심을 구분하는 명확한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둘 다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차이는 대체적으로 범위의 차이일 뿐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수많은 생을 걸친} 개인적 에고의 생애에서 크게 두 단계를 형성하나, 이들은 계속적으로 이어진다. 
이기심은 모든 욕망들이 좁은 개체성을 향해 집중될 때 생겨난다. 이타심은 이 욕망들의 투박한 구조가 붕괴되어 욕망들이 더 넓은 범위로 분산될 때 생겨난다. 이기심은 제한된 범위로 관심의 폭이 좁혀지는 것이고, 이타심은 더 넓은 범위로 관심의 폭이 확장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기심은 제한된 형태의 이기심이고, 이타심은 더 넓은 활동 범위로 확장된 이기심이다.

이기심을 전환시켜 이타심으로 

이원성의 영역을 완전히 초월하려면, 먼저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선행을 끈기있게 지속적으로 행하면 이기심은 닳아 없어진다. 선행의 형태로 확장되고 표현되는 이기심은, 이기심 자체를 파괴하는 도구가 된다.  이기심의 번성과 소멸을 좌우하는 핵심 고리가 바로 선(善)이다. 애초에 악한 성향을 낳았던 이기심은, 선행을 통해 결국 스스로의 패배를 불러오는 영웅이 된다. 악한 성향들이 선한 성향들로 완전히 대체될 때, 이기심은 이타심으로 전환된다. 즉 개체적인 이기심이 우주적 공익(universal interest)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선하고 사심없는 삶도 여전히 이원성(opposites)에 얽매어 있긴 하지만, 선함은 이원성(opposites)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다. 선함은 영혼이 스스로의 무지를 전멸시키는 수단이다.  

우주적 자아(Universal Selfhood)

영혼은 선(善)을 거쳐서 신(神)에게로 간다. 이때 이타심은 옳고 그름, 미덕과 악덕 등 마야(환상, 무지)의 모든 이원적 측면을 초월하는 우주적 자아 속으로 녹아든다. 이타심이 절정에 이르면, 모든 것과 하나임(oneness)을 느끼기 시작한다. 해탈의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이기심도 이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 둘은 모두가 다 나라고 느끼는 전체-자아감(전체-자아임, selfness for all) 속으로 흡수, 융해된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깨달음에는 헤아릴 수 없는 지복(bliss)과 평온함이 동반된다. 반면, 어떤 식의 영적 침체나 상대적 가치관의 망각(소멸 obliteration)도 가져오지 않는다. 전체-자아감은 흔들림 없는 조화를 가져오면서도 분별력은 전혀 상실시키지 않는다; 또한 흔들림 없는 평온을 가져오면서도 주변에 대한 냉담함은 야기하지 않는다. 이 전체-자아감은 고작 주관적인 {상상력으로} 합성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포함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union)을 실제로 이룸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다.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

모든 욕망들을 제거하고 오직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만을 갈망함으로써, 그대의 가슴을 열어라. 궁극적 실재는 외부 환경의 변하는 것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존재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대의 가슴(human heart) 안으로 그대의 영혼이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가슴의 문은 잠겨 있고 그 안은 수많은 욕망들로 가득차 있다. 가슴의 문을 닫고 있지 말아라. 변함없는 지복의 원천이 사방팔방에 있는데도, 무지에서 비롯되는 욕망들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하고 있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목표가 온전히 환하게 펼쳐지려면, 제한된 에고와 그것에 따르는 모든 욕망들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소멸되어야만 한다.

영성은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다

‘욕망의 단념(renunciation)’는 금욕주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뜻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의 삶의 부정은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신성(Divinity)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영성(Spirituality)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야만 한다. 영성은 인간의 모든 선하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들을  해방시키는 긍정적인 태도다. 또한 영성은 주변 환경에 있는 모든 자애롭고 아름다운 것들의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영성은 세속적 활동의 외형적 단념을 요구하지 않으며, 세속적 의무와 책임의 회피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영성이 단지 요구하는 것은, 세속의 활동을 하는 중이나 한 개인의 특정한 자리나 위치에서 비롯되는 의무를 이행하는 와중에도 그의 내적 정신(spirit)이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채로 있는 것이다. 완벽함이란, 이원성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얽매임들로부터의 자유는 제약 없는 창조성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얽매임이 두려워서 삶에서 도망가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도피는 삶의 부정이다. 완벽함은 자연의 이원적 표현들로부터 움츠러드는 것에 있지 않다. 삶의 얽매임들에서 도피하려는 시도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암시된다. 영성은, 이원성(opposites)에 의해 압도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고 완전하게 삶을 맞이하는 것에 있다. 영성은 모든 환상들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해야만 한다 – 그 환상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강력하다 해도. 완벽한 인간(Perfect One)은 삶의 다양한 형태들과의 접촉을 피하지 않으면서 강렬히 활동하는 와중에도, 완전히 초연한(complete detachment) 채 기능을 완수한다.

담론 1 신인류

영어 원본

신인류(New Humanity)   

신성적 계획(Divine Plan)

인류의 역사에서 모든 위태롭고 결정적인 시기들이 그러했듯이, 인류는 현재 영적 부활의 고통스러운 산고를 겪고 있다당장은 엄청난 파괴의 힘들이 진행중이며 우세한 듯 하지만, 인류를 구원할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힘들 역시 여러 경로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비록 이 빛의 세력들의 작용이 주로 소리없이 진행되긴 하지만, 그들이 가져올 변화들은 결국 안전하고 꾸준한 인류의 영적 진보를 초래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굶주리고 지쳐있는 이 세상에, 영원하고 유일한 진실을 새롭게 베풀기 위한 신성적 계획(Divine Plan)의 일부에 속한다.

전쟁, 더 심각한 원인에서 비롯되는 증상

현재 인류가 당면한 긴급한 문제는, 삶의 다양한 영역에 자리잡은 모든 기적(subtle), 물질적(gross) 형태의 경쟁, 다툼, 승부욕을 없앨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물론, 군사적 전쟁이 혼란과 파괴의 가장 명백한 원인이다. 하지만 전쟁 자체가 인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전쟁은 보다 심각한 근원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증상이다. 전쟁들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온갖 고통은 단지 반전 선전(propaganda)으로 완전히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을 없애려면, 전쟁의 뿌리에 있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전시가 아닌 때에도, 개인들이나 개인이 모인 집단들은 끊임없이 경제적인 경쟁뿐 아니라 여러 미묘한 형태의 분쟁을 하고 있다.  군사적 전쟁과 이에 수반되는 온갖 잔학 행위들은, 그 밑바탕에 깔린 근본적인 원인들이 악화되었을 경우에만 발생한다.

자기중심주의{이기주의}와 이기심

전쟁에서 촉발되는 혼란의 원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이를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얽매여있는 환상적 가치(Illusory Values)의 삶이다. 진실(Truth)을 직면하는 것은, ‘각양각색으로 발현된 모든 생명이 두루 하나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진실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깨달음 속에서 자신의 한정된 자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전쟁은 불필요하고 불합리하다

참된 이해의 여명이 밝아오면, 전쟁의 문제는 즉시 사라질 것이다. 전쟁의 불필요함과 불합리성은 아주 명백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면 당장의 시급한 과제는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상태의 원인이 되는 사고 방식{attitude of mind}을 영적인 측면에서 공략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진실의 빛’ 안에서는, 협조적이고 조화로운 삶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류의 재건에 깊은 뜻을 품은 이들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류를 에워싸고 있는 영적 무지를 불식시키기{없애기/ 해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아가 제거되어야만 한다

전쟁은 단지 물질적인 부분의 교정{조율}만을 위해 일어나진 않는다. 흔히 전쟁은 사람이 서로간의 어울림을 통해 어떤 편파적인 공동체의 이권과 자신의 정체성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여, ‘나의 것'(mine)이라 여기는 영역에 그 공동체를 포함시킴으로써 생기는 결과물이다. 물질적 교정/조율(Material Adjustment)은 보다 광범위한 문제인, 영적 교정/조율(spritual adjustment)을 이루는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영적 교정/조율은 삶의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이성적, 감정적, 문화적 측면에서도 자아의 제거를 요구한다.

물질적 교정{조율}에는 영적 이해가 전제된다

인류의 문제를 단지 식량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것은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설령 인간이 물질적 안정의 확보라는 한정된 목표만을 추구한다 해도, 올바른 영적 이해가 있을 때에만 그 시도에 성공할 것이다. 이기심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계획적이고 협력적인 경제활동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달아야만, 무난한 경제적 교정/조율이 가능해진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물질적 영역(material spheres)에서 최첨단 장비와 최고 효율을 갖춘다 해도 인류는 결코 분쟁과 결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의 올바른 자리

현재의 고난과 역경에서 떠오를 신인류(New Humanity)는 과학과 그 실용적인 성과들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을 반-영적(antispiritual)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실수이다. 과학은 쓰이는 용도에 따라 영성에 도움이 될 수도,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참된 예술이 영성을 표현하듯이, 과학도 올바르게만 다뤄진다면 영성의 표현과 충족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육체와 물질적 세계(gross world)에서의 육체의 생애에 관한 과학적 진실들은, 영혼이 스스로를 아는 데에 유용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이러한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진실이 더 확장된 영적 이해에 올바로 접목되어야만 한다. 올바른 영적 이해에는 참되고 영원한 가치들에 대한 꾸준한 인식(perception)이 포함된다. 이러한 영적 이해가 없다면, 과학적 진실과 성취들은 상호 파괴적인 용도로 사용되기 쉬우며 영혼을 묶는 사슬을 강화하는 삶에 이용되기 쉽다. 모든 방면에서의 인류의 진보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손잡고 함께 나아갈 때만 보장될 수 있다.

영적 체험의 필요성

다가올 신인류(New Humanity)의 문명은 메마른 지적 교리가 아닌, 살아 숨쉬는 영적 체험에 의해 혼 들릴(ensouled) 것이다. 영적 체험은 단지 이성(理性)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더 깊은 진실들을 다룬다; 영적 체험은 원조받지 않은 지성만으로는, 나올 수 없다. 때에 따라 영적 진실이 이성적으로 표현되거나 문장화될 수는 있다. 그리고 영적 체험에 대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이성이 어느 정도는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성 그 자체만으로는 영적 체험을 가져오기에 충분치 않으며, 그 체험에 대해 남들과 소통하기에도 충분치 않다. 두 사람이 두통을 앓아본 경우, 그들은 이성의 기능을 활용해서 두통의 증상에 대해 협조하여 조사하고 그 체험을 함께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두통을 앓아본 적이 없다면, 그에게 지적인 설명을 아무리 한다 해도 두통이 무언지 제대로 이해시키기엔 부족할 것이다. 지적인 설명이 결코 영적 체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이성은 기껏 해야 영적 체험을 위한 준비 과정, 그 이상은 안 된다.

영적 체험의 본질과 자리

영적 체험에는 이성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 이상이 포함된다. 많은 경우 영적 체험을 ‘신비 체험'(mystical experience)이라고 부름으로써, 이런 점이 강조된다. 신비주의는 반-이성적이며(anti-intellectual),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현실적인 것, 그래서 실제 체험과는 상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진정한 신비주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신비주의는 실재에 대한 일견(一見)이며, 실재에 대한 일견(一見)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도 비합리적인 부분이 없다. 진정한 신비주의는 완전히 명백한 지각/인식/관점(perception)이며 아주 실제적이어서, 삶의 매순간마다 실천할 수 있으며 일상의 의무를 수행하는 도중에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신비주의와 체험은 너무도 깊이 연관되어 있어, 어떤 면에서 모든 체험의 최종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체험을 신비주의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초자연적이거나 인간 의식의 이해를 완전히 넘어선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신비주의적’이란 말의 의미는, 제한된 인간의 지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지성이 자체의 한계를 초월하여, ‘무한’을 직접적으로 깨달아 계몽될(illumined) 때까지는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 체험으로 향하는 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이 말은, 인간이 인간의 한계들을 버리고 ‘신의 무한한 삶'(infinite life of God) 속에 자리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영적 체험은 영혼의 본성을 깨달아 더 높은 경지의 의식으로 오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이것에는 세속의 의무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도 포함된다. 일상생활의 다양한 면들과 연결성을 잃는다면, 우리의 그 체험은 영적 체험과는 거리가 먼 신경증적(neurotic) 반응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영적 체험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신인류에게 힘이 되고 활력을 불어넣을 영적 체험이, 현실 세계의 엄중하고 곤란한 요구사항들에 대한 도피적인 반응이어서는 안 된다. 삶의 흐름에 적응할 능력이 안 되는 이들은 현실에서 후퇴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창조한 환상의 요새를 은신처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반응은 삶의 요구들로부터 자신의 ‘분리성'(separate existence)을 보호함으로써 그것을 영속시키려는 시도다. 이는 거짓된 안정감과 거짓된 자기-완성감을 마련하여 삶의 문제들에 대한 헛된 해결책(pseudo-soulution)이 될 뿐이다. 이는 실제적이며 영속적인 해결책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오히려 진정한 ‘영적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저항할 수 없는 새로운 삶의 파도들에 의해 자신만의 환상의 요새들에서 거듭 밀려나게 될 것이다; 또한 도피를 통해 자신의 분리된 존재성을 보호하려는 시도들은 온갖 새로운 형태의 고난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신인류는 외형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도피를 통해 자신의 분리된 체험(separative experience)에 매달리듯이, 어떤 형식, 의례, 의식이나 전통, 사회적 관습과 자신의 정체성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분리된 체험에 매달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형식, 의례, 전통, 관습들은 무한한 삶(inifinite life)의 발현을 속박한다. 만일 이것들이 무제한적 삶(unlimited life)의 표현에 유용한 수단이었다면, 지구상의 신성한 삶을 충족시키는 데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들은 겉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달리, 그들만의 권리를 주장하고 위신과 명성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 형식, 의례 등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삶의 극단적인 축소와 제한됨으로 이어진다.
신인류는 제한적인 삶(life of limitations)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성의 창조적 삶이 펼쳐질 수 있는 활동 공간을 마련할 것이다; 신인류는 외적인 형태(형식)들에 대한 집착을 부수어, ‘영성의 요구'(claims of the spirit)에 외적 형태를 순종시키는 길을 배울 것이다. 이 때, 환상과 거짓된 가치의 한정된 삶은 끝없는 진실의 삶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리고 분리적 자아(separative self)의 삶을 유지시켜 왔던 한정성들(limitations)은 ‘참된 이해’의 손길이 닿는 순간 시들어갈 것이다.

편협한 집단과의 동일시도 ‘한정된 자아’의 한 형태다

사람이 현실도피나 외적 형태와의 동일시를 통해 ‘분리된 존재성’에 매달리려고 하듯이, 어떤 편협한 사회적 계급이나 교리, 종파, 종교 또는 성(sex)에 근거한 구분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분리된 존재성’에 매달리려고 할 수도 있다.  이 때, 그 개인은 더 큰 집단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분리성'(separative existence)을 잃은 듯 하다. 그러나 사실상 많은 경우, 그는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분리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동일시는 그가 다른 계층, 국적이나 교리, 종파, 종교, 성별에 속한 사람들과의 분리감을 은근히 즐길 수 있게 해준다.

한정된 자아는 반대되는 요소들(opposites)을 통해 유지된다

분리성은 상대되는 두 요소(opposites) 중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상대와의 차이점을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성과 힘을 얻는다. 개인은 대립되는 이념들 중 한 쪽과 동일시하거나 자신이 생각하는 악에 대립되는 선의 개념과 동일시함으로써 분리성(separative existence)을 보호하려고 할 수 있다. 편협한 집단들이나 한정적인 이념과의 동일시는 결코 ‘분리된 자아'(separative self)의 진정한 융해가 아니다 – 겉보기에만 녹아든 듯 보일 뿐이다. 우주적인 삶의 바다 속으로 한정된 자아가 진정으로 녹아들기 위해서는, 모든 형태의 ‘분리성’의 완전한 포기가 요구된다.  

미래에 대한 희망

인류의 대부분은 분리적 경향과 자기주장적 경향의 족쇄에 얽매여있다. 인류를 얽매고 있는 이 족쇄의 광경에 현혹된 이에게, 인류의 미래는 극심한 절망뿐일 것이다. 현재 인류가 처한 곤경을 올바른 시각으로 보려면, 오늘날의 현실을 더 깊숙이 들여다봐야 한다. 신인류의 진정한 가능성들은 세계 상황의 표면만을 관찰하는 이들에게는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들은 실제로 존재하며, 영적 이해의 불씨만 있다면 전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육욕(lust), 증오(hate), 탐욕(greed)의 세력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과 혼돈을 양산한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장점이 하나 있다면, 파괴적인 힘들의 한복판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랑은 한계들(limitations)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심지어 전쟁마저도 협조적 기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 협조적 기능의 범위는, 한정된 집단이나 이념과의 동일시에 의해 인위적으로 제한된다. 전쟁도 많은 경우에, 일종의 사랑을 통해 유지된다; 하지만 이 사랑은 올바로 이해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제한적이고 자유로워야 한다. 사랑은 인간 삶의 모든 단계에 늘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잠재되어 있거나 제한되어 있으며, 개인적 야심이나 인종적 우월감, 편협한 충성심, 승부욕에 의해 오염되었다; 또한 성(性), 국적, 종파, 계급, 종교에 대한 집착에 의해 오염되었다. 인류의 부활이 있으려면, 새로운 사랑이 그 안에 탄생할 수 있도록 인류의 가슴이 열려야 한다 – 오염을 모르는 사랑, 개인적 탐욕과 집단적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이 싹틀 수 있도록.

사랑은 그 스스로 전해진다.

신인류는 무한히 많은 사랑의 방출을 통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방출은 완벽한 스승들이 불러오는 ‘영적 깨어남'(spiritual awakening)을 통해 올 수 있다. 사랑은 단지 결심만으로는 생겨날 수 없다; 의지만으로는 아무리 해도 의무감 이상은 안 된다. 애쓰고 노력하여,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개념에 외적 행위를 억지로 끼워맞출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사랑의 내적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에 영적으로 공허하다.
사랑은 내면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솟아나야 한다; 사랑은 그 어떤 형태의 내적, 외적 강요(force)에도 타협하지 않는다. 사랑과 강요는 공존할 수 없다;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반면, 사랑 그 자체에 의해 일깨워질 순 있다. 사랑은 그 스스로 전해진다; 사랑을 지니지 못한 이들은 사랑을 지닌 이들에게서 전염된다. 다른 이에게 사랑을 받은 이들은 사랑의 본질 자체인 반응을 누군가에게 내줄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사랑은 정복할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다. 사랑은 결국에 가서 닿는 모든 이를 변화시킬 때까지, 계속해서 힘을 모아가며 자신을 퍼뜨린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구속없이 자유로이 주고받는 순수한 사랑을 통해, 인류는 새로운 형태의 존재와 삶에 이를 것이다.

신성한 사랑(Divine Love)을 통한 인류의 구원 

모든 이와 모든 것을 예외 없이 포괄하는 ‘우주적인 신성한 삶'(universl divine life)보다 더 위대한 시대적 요청(claim)은 없다는 사실이 인식될 때, 사랑은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영역에 평화와 조화와 행복을 확립시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그 자체의 순수와 아름다움으로 빛날 것이다. 신성한 사랑은 이원성(duality)의 맹공격에 한 치의 틈도 주지 않으며, 신성함 그 자체의 표현이다. 바로 이 신성한 사랑을 통해서 신인류는 신성의 계획(divine plan)에 주파수를 맞출 것이다. 신성한 사랑은 영원한 향기와 무한한 지복(至福)을 개인의 삶에 가져올 뿐 아니라, 신인류의 새시대도 열리게 할 것이다. 신성한 사랑을 통해 신인류는 조화롭고 협력적인 삶의 예술을 배울 것이다. 이는 죽은 형식(허례허식)의 폭압으로부터 신인류를 자유롭게 하여, 영적 지혜의 창조적인 삶을 해방시킬 것이다; 신인류는 모든 환상을 버리고 진실(Truth) 안에 자리잡게 될 것이며, 평화와 변치않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하여 신인류는 영원한 삶(life of Eternity)의 입문자가 될 것이다.

메허 바바의 유니버설 메시지

“Meher Baba’s Universal Message”:
메허바바의 만유적 메시지 /우주적 메시지/ 유니버설 메시지

I have come not to teach but to awaken. Understand therefore that I lay down no precepts.

나는 가르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깨우기 위해서 왔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계율(Precepts)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이해하라.

Throughout eternity I have laid down principles and precepts, but mankind has ignored them. Man’s inability to live God’s words makes the Avatar’s teaching a mockery. Instead of practicing the compassion he taught, man has waged crusades in his name. Instead of living the humility, purity and truth of his words, man has given way to hatred, greed and violence.

영원을 거쳐 나는 여러 원칙과 계율들을 주어왔지만 인류는 그것들을 무시하였다.  인간이 신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화신(아바타)의 가르침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그가 가르치는 자비심을 실천하는 대신에 신의 이름으로 인간은 온갖 영적전쟁(crusades)만을 벌려왔다.   그의 말씀에 담긴 겸허함, 순수함 그리고 진실 대신에 인간은 증오심, 탐욕, 그리고 폭력의 길을 밟아왔다.

Because man has been deaf to the principles and precepts laid down by God in the past, in this present Avataric form I observe silence. You have asked for and been given enough words — it is now time to live them. To get nearer and nearer to God you have to get further and further away from I, “my,” “me” and “mine.” You have not to renounce anything but your own self. It is as simple as that, though found to be almost impossible. It is possible for you to renounce your limited self by my grace. I have come to release that grace.

과거에 신이 내려놓으신 원칙과 계율들을 인간이 무시하였기에, 이번 아바타적 형상(Avataric form)에 있어 나는 침묵을 지킨다.  그대들은 많은 말씀(가르침)을 요구하였으며 많은 말씀(가르침)을 받았다 — 이제는 그 가르침대로 살때가 왔다.  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선 우선  ‘나’, ‘내’ ‘나의’, 그리고 ‘내것’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한다. 그대가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자아일 뿐이다.  말 그대로 너무나 간단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찾게 된다.  그대가 스스로의 한정된 자아를 단념하는 것은 나의 은총(grace)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나는 이 은총을 배풀러 {이 세상에} 왔다.

I repeat, I lay down no precepts. When I release the tide of Truth which I have come to give, men’s daily lives will be the living precept. The words I have not spoken will come to life in them.

다시한번 말한다; 나는 그 어떠한 계율도 내려놓지 않는다.  나는 진실의 밀물을 풀어주러 왔으며, 내가 그 진실(Truth)의 밀물 풀어 줄때 인간의 하루 하루 사생활은 살아 숨쉬는 계율이 될 것이다.  내가 발언도 하지 않았던 말씀들은 인간의 생활(인생)속에서 살아 숨쉬게 될 것이다.

I veil myself from man by his own curtain of ignorance, and manifest my glory to a few. My present Avataric form is the last incarnation of this cycle of time, hence my manifestation will be the greatest

나는 인간 스스로의 무지를 커튼으로 내 자신을 감춘(veil)다; 그리고 소수에게만 나의 영광을발현한다. 나의 요번 아바타적 형상은 이 주기의 마지막 화신이다; 따라서 나의 발현도 가장 위대할것이다. 
When I break my silence, the impact of my love will be universal and all life in creation will know, feel and receive of it. It will help every individual to break himself free from his own bondage in his own way. I am the Divine Beloved who loves you more than you can ever love yourself. The breaking of my silence will help you to help yourself in knowing your real Self.

내가 침묵을 깨트릴 때, 내 사랑의 여파는 만유적일 것이며 온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은 그 사랑의 여파를 알고 느끼고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의 여파는 일체 모든 개체들로하여금 나름대로의 방법대로 스스로의 자신을 속박으로부터 석방시키는 대에 있어 도움이 될것이다. 바로 내가 그대를 그대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그대의 신성적 비러벳(Divine Beloved)이다.  나의 침묵의 깨트림은 그대의 진정한 참나(real Self)를  그대가 스스로 알수 있도록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All this world confusion and chaos was inevitable and no one is to blame. What had to happen has happened; and what has to happen will happen. There was and is no way out except through my coming in your midst. I had to come, and I have come. I am the Ancient One.

이 세상의 온갖 혼란과 혼돈은 불가피하였으며{필현적이었으며}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일어나야할 일들은 다 일어났으며; 앞으로 일어나야할 일들도 다 일어날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내가 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과거에도 지금도) 탈출은 언제도 없다.  나는 왔어야만 했으며, 왔다.  나는 고대의 그이다.  / 내가 바로 고대의 그이다.

로드 메허 4447p

 

유 와 무 00장 메허 바바의 생애

Biographical

메허 바바의 생애


Merwan S. Irani, named Meher Baba (“The Compassionate One”) by His early disciples, was born in 1894 in Poona, India. Between the years of 1913 and 1921, the five Perfect Masters, or Sadgurus, of that time led Him to realize His identity and universal mission as the Avatar of the Age – the God-Man, the Buddha, the Christ. After working intensively with an intimate group of disciples for some years, Baba beganto observe silence in 1925, and throughout the more than four decades of His spiritual activities on Earth, He did not utter a word. From His work in India and the East with the mad, infirm, and poor and with spiritually advanced souls to His contact with thousands of people in the West, Meher Baba has awakened innumerable persons to the quest for higher consciousness and their own ultimate reality.

초기의 제자들로부터 ‘메허 바바'(자비로운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메르완 이라니(Merwan S. Irani)는, 1894년 인도의 푸나에서 태어났다. 1913 ~ 1921년의 기간에 당시의 5명의 완벽한 스승들, 즉 삿구루들은 아바타(Avatar) – 갓맨, 붓다, 그리스도 – 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우주적인 임무를 깨닫도록 인도하였다. 바바는 친밀한 제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과 몇 년간 집중적인 작업을 한 뒤 1925년부터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으며, 지구에서 영적 작업을 하는 40년이 넘는 동안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인도와 동양에서 미친 사람들과 병약자들, 가난한 사람들과 영적으로 진보된 영혼들을 만나며, 또한 서양에서 수천의 사람들을 접촉하며 무수히 많은 이들이 더높은 의식과 그들 내면의 궁극적인 실재를 추구하도록 일깨웠다.

Throughout the years, Meher Baba indicated that the breaking of His Silence would come in a way and at a time that no one could imagine, and that His “speaking the Word” after the appearance of utter defeat would be His only miracle in this incarnation as God in human form: “When I break My Silence, the impact will jolt the world out of its spiritual lethargy. . . What will happen when I break My Silence is what has never happened before. . . The breaking of My Silence will reveal to man the universal Oneness of God, which will bring about the universal brotherhood of man.”

메허 바바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의 침묵이 깨질 것이라고 수 년에 걸쳐 밝혔으며, 완전한 패배로 보이는 모습 이후에 발언될 ‘그 한 마디’는 신이 인간의 형태로 온 이번의 화신으로서 행하는 유일한 기적이 될 것이라고 얘기하였다; “내가 나의 침묵을 깨는 순간, 그 충격은 영적인 혼수상태에 잠겨있던 세계를 갑자기 뒤흔들어 깨울 것이며… 내가 나의 침묵을 깨는 순간, 이전에는 결코 일어난 적 없었던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나의 침묵의 타파’는 우주적인 하나됨을 인류에게 드러낼 것이며, 인류의 우주적 형제애를 불러올 것이다.”

Declaring that His work had been completed 100% to His satisfaction and that the results of that work would soon begin to manifest, Meher Baba dropped his body on January 31st, 1969.

메허 바바는 ‘그의 작업이 100% 만족스럽게 완료됐으며, 머지 않아 그 일의 결과들이 드러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1969년 1월 31일, 자신의 육신을 버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