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10 폭력과 비폭력

폭력과 비폭력

구호를 넘어서

인간은 유행하는 구호(catchwords)에 달라붙어 이 글귀에 담긴 살아있는 지각(living perception)을 자신의 행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도 않은 채, 자신의 행동이 거의 기계적으로 결정되도록 허용하는 경향이 있다. 삶에 있어 단어들은 그들 고유의 몫과 용도가 있다; 그러나 행동이 현명해지려면 이 단어들이 전하려는 뜻에 대한 주의깊은 분석이 필요하며 그들이 지닌 뜻을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탐구가 필요한 단어들 중에 ‘폭력’과 ‘비폭력’만큼 중요한 단어는 많지 않다. 이 단어들은 이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뿐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tenor)까지도 좌우한다. 

영적 이해는 공식을 넘어선다

영적인 삶의 과제는 지각 전환(perception)의 문제지, 아무리 우수한 가치를 지지하는 규칙(rules)이라 해도 그 규칙에 대한 기계적인 순응은 아니다. 이러한 지각에는 언어나 공식이 담을 수 없는 이해가 함축된다. 모든 언어와 공식은 진실(Truth)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공식들의 근원에 있는 참뜻을 끌어내려는 이들은 많은 경우 공식화된 원칙을 연구하기 위해 나서게 된다; 그들은 생활에서 찾아지는 구체적인 예들을 계속해서 동원하여 그들의 연구를 보충해나간다.이는 특히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두 반대되는 개념의 공식화된 ‘적용 원칙’(guiding principles)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상황들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폭력’과 ‘비폭력’ 두 단어는 현실의 너무도 다양한 상황들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설일지라도 완전하려면 그 다양한 상황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상황들을 해설의 시점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해설을 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 두 단어에 해당되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고려할 필요는 없다. 가장 대표적인 상황들만 고려해도 충분하다. 아래에 예로 드는 대표적인 상황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두 개념의 중심에 있는 근본적인 가치들을 충분히 보여주기 때문에 선택된 것들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

제1번 상황 :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판에, 주변에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 그를 구조하려고 한다고 하자. 물에 빠진 사람은 구조하러 온 사람을 필사적으로 붙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구조를 방해해서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구조자마저 익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구조자가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를 세게 쳐서 기절시킨 후에 구조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를 치는 것은 ‘폭력’으로도, ‘비폭력’으로도 볼 수 없다.

수술의 경우

제2번 상황 : 수술을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고통받고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 병이 남에게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과 의사가 감염된 부위를 잘라내야 할 수도 있다. 이 때 칼로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행위 역시 ‘폭력’이나 ‘비폭력’으로 볼 수 없다.

침략국의 경우

제3번 상황: 만일 공격적인 국가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약한 국가를 침략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다른 국가가 약한 국가를 구하려는 오직 고귀한 영감에 의해서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에 나섰다고 하자. 약한 국가를 방어해주기 위한 이런 싸움을 ‘폭력’이나 ‘비폭력’이라 볼 수 없다; 대신 ‘비폭력적 폭력’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미친 개의 경우

제4번 상황: 만일 초등학교 주변에 날뛰는 광견이 있어서 선생들이 학생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그 광견을 죽였다고 하자.이 광견을 죽이는 것은 ‘폭력’을 의미하지만, 그 안에 증오(hatred)는 없다. 

강자의 비폭력

제 5번 상황 : 만일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에게 더 약한 체격의 거만한 사람이 얼굴에 침까지 뱉어가며 모욕했다고 하자. 이 거만한 사람을 짓밟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강한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해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게 사랑의 복음을 이야기했다. 이 행동은 ‘비폭력’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강자의 비폭력’이다.

섬세한 고려의 필요성

위에 언급된 첫 세 상황들은 그 상황이 폭력 또는 비폭력을 암시하는지의 여부에 대답하려면, 우선 그 상황의 다양한 세부적인 내용과 여러 미묘하고 섬세한 점들 그리고 그 행위를 하게 된 동기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대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준다. 마지막 두 상황은 폭력과 비폭력이 암시되면서도, 그 상황의 특정한 요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폭력’과 ‘비폭력’의 의미를 넘어서는 경우들을 보여준다. 

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1번 상황을 좀더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비록 피해자의 사전 동의 없는 무력(force)의 사용이 연관되지만, 빠진 사람을 살리려는 좋은 의도였음을 보여준다. 당하는 이의 동의 없이 무력(force)을 사용하는 것은 폭력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력(force)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이익을 주려고 사용되었지 그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경우는 폭력의 경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별한 경우에도 폭력과 비폭력이 둘다 각기 관련되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과 ‘비폭력’이 적용됐다고는 볼 수 없다.

외가 수술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2번 상황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여기서도 (신체를 자르는) 무력/폭력(force)의 적용이 있다; 이것은 환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수술에 대한 환자의 사전 동의가 있다.  더불어, 수술은 병으로부터 환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을뿐 아니라, 병의 전염으로부터 타인들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 무력의 적용(행사)은 환자뿐 아니라 그와 접촉할 수 있는 많은 타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섞임-없는 좋은 동기에서 솟아난 것이다.  전혀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적용된 무력은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을 철저하게 비-폭력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것은 살아있는 신체의 일 부를 분명히 절단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침략적인 구가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3번 상황도 상당히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이 교전(fighting)은, 어떠한 개인적 이익이나 이기적인 동기 없이 단지 약한 국가를 방어하려는 목표로 침략에 저항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무력의 행사는 침략국에게 상당한 손상을 입힐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 국가의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러한 무력의 행사는 상대의 사전 동의도 없을 뿐 아니라, 상대의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의도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상황도 분명한 폭력의 경우가 아니다.

Even in this situation we do not have a clear case of violence.

관련된 손상과 상해를 불구하고, 이러한 무력의 적용은, 피해자인, 약한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의미로 침략국 그 자체를 위함이며, 그 이유는 자체의 공격에 대한 저항을 통해 침략국이, 약한 구가들을 침략하고 착취하려는 자체의 영적 약점 또는 영적 질병에서 서서히 완치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력은 실제적으로 폭력이 아니어서,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비-폭력적 폭력이라고 한다.

침략적인 국가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침략국을 대항하는 전쟁(교전)의 경우는 감염된 부분을 수술하는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침략국을 대항하는 전쟁의 경우에는, 약한 국가를 위한 것이 일차적인 결과로 보이며, (무력의 적용으로 대응한) 침략국을 위한 것이 이차적인 결과로 보인다.  수술의 경우에는, (무력의 수취자인) 환자를 위하는 것이 일차적 결과로 그리고 타인들을 위하는 것이 이차적인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미비한 혜택의 차이일 뿐이며, 두 상황들을 좀더 주지하여 분석하고 비교하여보면, 무력의 표적뿐만 아니라 상황에 관련된 여러 다른 사람들의 혜택을 동등하게 증진시킨다는 것이 인식된다.

약자의 방어는 사심 없는 봉사의 일종이다

약자의 방어는 중요한 형태의 사심 없는 봉사이며, 갈마-요가(Karmayoga)의 한 부분이다.  무력의 활용이, 만일 이러한 용도로 필수적이라면, 바라는 목표의 달성을 위한 절대적인 도구로 완전히 정당하다.  그러나 약자의 방어를 위하여 착수된 어떠한 투쟁(fighting)도, 진정한 영적 중요성을 지니려면, 일치의 어떠한 이기적인 동기도 또는 증오도 없어야만 한다.  이것은, 어떤 남성에게 비열한 의도의 공격을 당하고 있는 여성을 방어하여 여성의 명예와 생명을 방어하고 동시에 공격자를 처벌하며 뉘우치도록 하여 그를 수정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광견 그리고 강자의 비-폭력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4번 상황은 분명한 폭력의 경우지만, 증오가 없으며, 국민학생들을 광견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대의적인 좋은 의도가 있기에 정당하다. 거만한자에게 복수를 노리는 대신에 설교를 하였던 강인한 자의 경우는(제5번 상황), 비록 비-폭력을 의미하지만 비-행동적(inaction)이지는 않다. 이것은 무저항적이거나 또는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인한 것이며, 객관적인 근본(impersonal nature)의 참된 창조적인 행동이다. 이것은 강자의 비-폭력이다.

영적 이해가 규칙의 상류에 있기 위해서는 신성적 사랑이 필요하다

위의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비교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정의, 또는 이것들의 정당성, 또는 이것들의 진정한 가치 내지는 가치의 부족 등에 대한 여부는, 아무리 명확하게 진술된 형식을 갖춘 전반적인 규칙이어도, 그것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에는 많은 섬세한 영적 문제들과 함축들이 포함된다.  영적 가치관의 전체적인 윤곽 속에 폭력과 비-폭력의 지위(status)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으려면, 존재의 원인과 뜻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폭력 또는 비폭력에 대한 불충분하며 불완전한 사상들을 기반으로 하는 어떠한 구호들에 의해서도, (아무리 듣기에 높아도)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원성(duality)을 초월하는, 영적 이해가 담긴, 그리고 규칙들 보다 상류에 있는, 선성적 사랑(Divine Love)에서 자발적으로 나와야 하는 결과다.

담론 9 선과 악

 선과 악

반대들(opposites)을 통한 체험의 분석 평가

인간의 마음(mind)은 여러 체험들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체험들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다. 어떤 체험은 좋게 여겨지고, 어떤 체험은 나쁘게 여겨진다; 어떤 체험은 행복을 가져오고, 어떤 체험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체험은 유쾌하게 여겨지고, 어떤 체험은 불쾌하게 여겨진다. 어떤 체험은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 어떤 체험은 자유와 충족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어떤 체험은 선한 것으로, 어떤 체험은 악한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것들이 특정한 관점에서 삶을 맞이할 때, 인간의 상상에 의해 창조되는 반대들(opposites)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과 ‘받아들일 수 없는'(acceptable and unacceptable)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수용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간의 개념은, 그 순간에 우세한 욕망의 본성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해간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어떤 종류든 욕망이 존재하는 한, 그는 그 욕망과 연관지어 스스로의 체험을 두 가지로 나누어 평가하게 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욕망의 충족에 기여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충족을 방해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마음은 삶과 삶이 가져오는 모든 것들을 어떤 기대나 얽매임, 회피 없이 맞이하는 대신, 일종의 기준을 마련하여 삶을 ‘용납되는 것’과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나눈다.

선(善)조차도 욕망과 상관이 있다(relative)

인간의 마음이 창조한 반대들(opposites) 중에, 가장 영적으로 중요한 것은 ‘선’(good)과 ‘악’(evil)의 구분(구별)이다. 선악의 구분은 모든 욕망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다. 욕망의 족쇄를 강화하는 체험과 행동(행위)은 악한 것이고, 욕망들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는 경향이 있는 체험과 행동은 선한 것이다. 선한 체험과 행동들도 욕망과 상관적으로(relative) 존재하기 때문에, 악한 체험이나 행동들과 다름 없는 구속력을 발휘한다. 모든 욕망들이 사라질 때만 모든 속박이 진정으로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선(좋은)과 악(나쁜)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간에 아주 잘 융합되어, 한정된 자아에게 어떤 선택의 여지도 남기지 않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 산스카라로 시작한다

인간의 의식이 ‘완전히 발달’(fully developed)된 것은 맞다; {즉, 인간 의식의 발달이 완료된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 의식에 악한 요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의식이 인간 이하(sub-human) 진화 과정의 단계들을 거치는 도중에 주로 육욕, 탐욕, 분노와 같은 제한적인 경향들이 우세하게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ego-centered) 경향성이 창조하고 유지해 온 체험과 행동들은 그들의 인상 자국(imprints)을, 발달중인 마음에 남긴 것이다; 그리고 영화 필름이 배우의 움직임을 녹화하듯이 마음도 그 인상들을 저장(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악하기 쉽고, 선하기 힘든 것이다. 인간 의식의 선조(先祖)인 동물의 삶은 동물적 육욕, 동물적 탐욕, 동물적 분노에 의해 대부분 결정된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이따금 자기-희생, 사랑, 인내 등의 선한 자질을 계발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축적되어 온 동물적 산스카라들이 모두 악하고 선한 부분이 전혀 없었더라면, 인간 의식에 선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한 산스카라를 배양할 필요성

어떤 동물적 산스카라는 선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물적 산스카라는 악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의식은 시작부터 주로 악한 경향의 추진력(영향력)을 받는다. 인간 의식의 진화 과정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해탈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선한 산스카라들을 배양하고 발전시켜 이미 축적된 악한 산스카라들에 겹쳐서(overlapping) 무효화시키느냐로 구성된다. 선한 산스카라들의 배양은 동물의 삶에서 지배적이었던 체험과 행동에 반대되는 체험과 행동을 양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육욕의 반대는 사랑이고, 탐욕의 반대는 베풂(generocity)이며, 분노의 반대는 수용성/인욕(tolerance) 또는 인내심(patience)이다. 사랑, 베풂, 인욕(忍辱)의 삶을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인간은 육욕, 탐욕, 분노의 경향을 지울 수 있다. 

성자와 죄인 

따라서 보편적으로 산스카라들의 제약에서 자신을 석방시키는 과정에는, 선을 위해서 악을 단념하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순간에 사람이 선한가 악한가의 여부는, ‘오차없이 철두철미한'(inexorable) 산스카라들의 작용에 의해 정해진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죄인과 성자는 둘 다 우주를 운영하는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둘 다 시작도 같으며 끝도 같다.
죄인은 영원한 타락의 오명을 쓸 필요가 없으며, 성자는 스스로의 도덕적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무리 성자다운 사람이라도 도덕적 실패의 삶을 거듭하지 않고 더 높은 선행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없으며,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개선하여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점차로 나아지고 좋아져서, 언젠가는 인류 최고의 모범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희망은 있다; 그 누구도 완전히 길을 잃은 사람은 없으며, 그 누구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신성으로 향하는 길이 선의 선호와 악의 단념을 통한다
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한정된 자아는 악한 산스카라뿐 아니라 선한 산스카라 안에서도 산다 

선행이 점차적으로 펼쳐지면서, 그 뒤를 사랑과 베품, 평화가 따른다. 이러한 선한 성품들의 실현(manifestation)으로 인해 축적되는 선한 산스카라들은 이와 반대되는 육욕, 탐욕, 분노의 악한 산스카라들을 겹쳐서(overlap) 평형(balance)을 가져온다. 선한 종류와 악한 종류의 산스카라들이 서로 정확하게 겹쳐지고 평형을 이루는 순간 두 종류의 산스카라들은 모두 종결되고, 의식은 구속의 상태에서 해탈(Freedom)의 상태로 접어든다. 장부를 마감하려면, ‘대변’과 ‘차변’ 양측이 서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주로, 차변 측이 더 크던지 대변 측이 더 커서 장부는 할 수 없이 유지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차변 측이 초과할 때만이 아니라 대변 측이 초과하는 경우에도 장부는 계속해서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장부는 오직 양쪽이 서로 평형을 이룰 때에만 마감할 수 있다. 산스카라의 영역에서 이런 균형은 매우 드문 일이다; 선한 산스카라 측 아니면 악한 산스카라 측, 둘 중 하나가 항상 우세하기 때문이다. 차변이나 대변의 과잉으로 장부의 마감이 지연될 수 있듯이, 한정된 자아의 수명도 악한 산스카라 내지는 선한 산스카라의 과잉으로 지연될 수 있다. 한정된 자아는 악한 산스카라를 통해서뿐 아니라 선한 산스카라를 통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한정된 자아의 최종적 전멸을 위해서는,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가 정확하게 겹쳐지고 평형을 이루어야 한다.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의 겹침과 평형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가 정확하게 겹치고 평형을 이루는 문제는, 단순히 양쪽의 총액만 서로 맞추면 되는 수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가 순전히 양쪽의 수량만 똑같이 맞추면 되는 문제였다면, 선한 산스카라들의 끈질긴 축적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악한 산스카라들의 축적이 느려지거나 중단되는 동시에 선한 산스카라들이 더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축적된 악한 산스카라들의 수량을 선한 산스카라들이 맞추어 필요한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들의 총량이 평형을 이뤄야 할 뿐 아니라 각각의 반대되는 요소들이 서로 정확하게 겹쳐져야만 한다. 따라서 ‘각각의 의식의 중심점'(개체)들이 맞이하는 과제는, 그 영혼이 축적한 다양한 산스카라들의 질적인 차이와 연관된 그 영혼만의 특정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산스카라로의 에고의 이동

선한 산스카라의 축적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산스카라들의 특별한 구조와 상관없이 진행되다 보면, 어떤 방향으로는 선한 산스카라가 과도하게 축적되는 동시에 다른 종류의 악한 산스카라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자기-고행이나 엄격한 종류의 금욕을 통해 어떤 종류의 집착은 무효화되었지만, 이런 수행이 건드리지 않는 다른 형태의 집착들은 그대로 남을 수가 있다. 갈망자는 건드려지지 않은 형태의 집착들을 그대로 무시하기 쉬울 뿐 아니라, 자기-고행이나 금욕의 실천으로 인해 형성된 산스카라들의 추진력에 영향을 받아서, 하던 수행만을 계속해서 더 하게 될 수 있다. 결국 한정된 자아는 종결되지 않으면서, 선한 산스카라만 과하게 창조하는 것이다. 설사 건드려지지 않은 종류의 집착들이 나중에 사라진다 해도, 에고는 이 새로운 선한 산스카라들로 옮겨가서 계속해서 생명을 이어갈 수도 있다.

산스카라 조정(adjustment)의 필요성

해탈(Emancipation)은 단지 덕(德)만을 축적한다고 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산스카라들의 현명한 조정이 필요하다. ’각각의 의식의 중심점'(개체)들은 최후의 영적 해탈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이끌려가고 있다; 따라서 마음에는 그 상황이 요구하는 영적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반대의 요소를 스스로에게 초대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갈망자의 현명하고 올바른 노력 없이 스스로 알아서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갈망자는 자신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완벽한 스승의 ‘한결같고 틀림 없는 도움'(unfailing help)을 받게 되는 행운이 없는 사람의 경우다; 오직 완벽한 스승만이 각각의 경우마다 그 사람에게 정확하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적으로, 완전하게 통찰할 수 있다.

선(善)의 감옥

이제까지 우리는 선한 산스카라들도 한정된 자아(limited self)의 생존을 지탱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스스로를 악한 존재로 보다가 선한 존재로 보게 될 때, 그는 자신이 선한 존재라는 확신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결국 ‘스스로의 존재성을 확인'(self-affirmation)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새로운 형태로 {자신의 존재성을 탈바꿈하여} ‘분리적 존재성’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에고가 새롭게 만들어낸 집이 오히려 더 허물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악함’과의 자기 동일시보다는 ‘선함’과의 자기 동일시가 주로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악함’과의 자기 동일시는 그래도 좀더 다루기가 쉽다; ‘악함’이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자마자 의식에 대한 ‘악함’의 움켜쥠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함’의 움켜쥠을 느슨하게 만드는 문제는 좀더 힘든 과제다; ‘선함’에는 ‘악함’과 대조하여 자신을 보다 당당하게 느끼는 일종의 자기-정당화(self-justification)가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망자는 언젠가 그의 새로운 감옥-집에 실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지각을 통해서 선악의 이원성을 초월함으로써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separative existence)을 포기하게 된다.

선(善)을 악(惡)에 비교한다면

에고(ego)가 자신의 거처를 ‘악함’과의 동일시에서 ‘선함’과의 동일시로 옮기게 되는 것은 ‘선함’과의 동일시가 그 에고에게 더 확장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갈망자는 이 새로운 집 역시 제한적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후 그는 ‘선함’의 집을 벗어나는 과정이 ‘악함’을 동일시하던 이전의 집을 벗어나는 것보다 덜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악의 집’을 벗어나는 것과 연관된 어려움은 그 집의 제한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지각(perception)에 도달한 이후에 집을 어떻게 실제로 해체해나가느냐 하는 작업의 어려움이다. ‘선의 집’을 벗어나는 것과 연관된 어려움은 그 집의 해체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집도 제한적임을 제대로 지각(perception)하느냐의 어려움이다. 이러한 차이점의 원인은 동물적 산스카라들이 고대로부터 장기간 축적되어 와서 보다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선도 악만큼 우리를 구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선의 경우에는 제한성을 제대로 지각한 뒤 속박을 푸는 작업에 있어 악보다는 쉽다.

산스카라들의 겹침에 대한 비유

 

에고는 악한 산스카라들을 통해서도 살아가며, 선한 산스카라들을 통해서도 살아간다; 또는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가 뒤섞인 상태를 통해서도 살아간다. 그래서 모든 산스카라로부터의 의식의 해탈은 선한 산스카라들이 악한 산스카라들을 정확하게 겹쳐 평형을 이루는 것으로 달성할 수 있으며; 아니면 일부 악한 산스카라들이 선한 산스카라들을 겹쳐 평형을 이루는 동시에 일부 선한 산스카라들이 악한 산스카라들을 겹쳐 평형을 이루는 것으로 달성할 수 있다. 더러운 접시를 닦을 때, 보통 주방 세제로 접시를 덮은 후에 물로 씻어낸다. 이 방법은 선한 산스카라들로 악한 산스카라들을 겹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기름기 가득한 접시를 닦을 때에는, 재(ashes)로 뒤덮은 후에 물로 씻어내는 방법이 있다. 재는 기름기가 가장 없는 물질 중 하나로, 어떤 면에서 기름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름이 굳은 접시에 재를 쓰면 더 쉽게 세척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악한 산스카라들로 선한 산스카라들을 겹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산스카라로부터 자유로우며, 선악을 초월한다

선하고 악한 산스카라들이 서로 정확하게 겹쳐져 평형을 이루게 되면 둘 다 사라진다;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깨끗한 마음, 그래서 아무런 왜곡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비춰주는 마음이다. 영혼에는 그 무엇도 기록되지 않는다. 산스카라는 마음에 축적(입금)되는 것이지, 영혼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그 언제라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한 거울이 되어야만이 진실(Truth)을 비출 수 있다. 선하고 악한 인상들이 둘 다 사라질 때, 마음은 영혼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계몽(Illumination)이다.
하지만 마음이 영혼을 보는 것과 영혼이 스스로를 아는 것은 다르다; 영혼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마음을 초월하는 신(God)이다. 따라서 마음이 영혼을 본 뒤에도 영혼이 스스로가 진실(Truth)임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이 영혼 속으로 융해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깨달음(Realization)이다. 이 상태에 들면 모든 선하고 악한 산스카라들을 포함하는 마음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초월한 상태다; 따라서 선악의 구분도 넘어선다. 이 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무한한 사랑, 평화, 지복, 지식의 특성을 지닌, 불가분한 단 하나의 존재만이 있다. 선과 악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되던 투쟁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선도 악도 없으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일하고 불가분한 신의 삶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담론 8 산스카라들의 제거 3부

 

산스카라들의 제거

3부

산스카라들의 근절

삿구루로부터 받는 인상들은 인생을 전환시킨다

삿구루(Sadguru)나 완벽한 스승(Perfect Master)에 대한 사랑은 삿구루와의 접촉을 가져오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하다. 갈망자는 이러한 접촉을 통해, 다른 과거의 인상들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특별한 효력을 지닌 인상들을 스승에게서 받게 된다; 스승에게서 받은 인상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시킨다. 이러한 접촉은 아무리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인생을 전환시키고 향상시킨다.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욕망의 충족에만 신경 쓰는, 무모한 타락한 삶을 살았다고 하자. 소유욕과 권력욕에 빠져, 돈 벌어 모으는 것과 노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러나 이렇게 해탈에 대해 전혀 상상도 안해본 사람이라도 삿구루(Sadguru)와의 접촉에서 받게 된 산스카라들이 그가 지녀온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영원히 막을 내리고, 새로운 더 높고 자유로운 삶의 전망을 펼쳐줄 효력을 충분히 지녔음을 알게 될 수 있다. 삿구루로부터 받는 인상들은 교양있고 학식이 높지만 시각의 범위가 국한된 지식인에게도 동등하게 유익할 수 있다; 그의 상상력이 예술이나 문학의 아름다움 이상은 감상할 수 없는 지식인, 그의 이타심이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일지라도 완벽한 스승에게서 인상들을 받게 되면, 보다 높은 삶의 방식으로 들어올려질 것이다.

삿구루의 개입을 통한 모든 산스카라의 근절

삿구루는 갈망자의 의식을 일반적인 지성의 의식 수준에서 영감(inspiration)과 직관(intuition)의 의식 수준으로, 나아가 무한함 속으로 융해됨으로써 절정에 도달하게 될 통찰(insight)과 계몽(illumination)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러한 갈망자의 영적 상승은 세속적 영역(mundane sphere)에서 기적 영역(subtle sphere)으로, 기적 영역에서 정신적 영역(mental sphere)으로, 마침내 정신적 영역에서 참자유(Freedom)의 상태에 이르는 진보와 일치한다. 최종 단계는 모든 산스카라 – 자연적이든 비자연적이든, 양성적이든 음성적이든 – 의 완전한 근절을 의미한다. 막대기에 실을 감는 예에 비유하자면, 산스카라들의 근절 과정은 실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다. 모든 환상과 속박으로부터의 의식의 최종적 해방을 뜻하는 모든 산스카라들의 제거는, 오직 삿구루의 은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완전한 자기-항복(self-surrender)의 필요성

그러나 이러한 삿구루의 적극적인 개입에는 갈망자와 완벽한 스승 사이의 거리낌 없는 관계가 전제된다; 이러한 관계가 확립되려면, 갈망자가 스승에게 완전히 자신을 항복하는 데 성공해야만 한다. 자기-항복은 스승의 모든 명령에 대한 복종을 뜻한다. 그대의 모든 욕망과 행동이 삿구루의 안내하에 그의 명령에 복종한 결과라면, 그 행위들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도 삿구루의 몫이 된다. 따라서 그대의 자기-항복이 철저해지면 산스카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책임은 스승(Master)에게로 넘어가며, 이 새로운 조건을 바탕으로 스승은 그대의 모든 산스카라를 머지 않아 전멸시킨다. 

지적인 복종

완전한 자기-항복에 암시되는 스승에 대한 복종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지적인 복종'(intellectual obedience) 그리고 (2) ‘엄밀한 복종'(literal obedience: 즉, 말 그대로의 무조건적인 복종)이 있다. 이 두 가지 복종 중 ‘지적인 복종’이 먼저 온다; 그 뒤를, 지적인 복종을 전제로 하는 더 유익한 형태의 복종인 ‘엄밀한 복종’이 따른다. 그대가 스승의 완벽함과 위대함에 대한 지적인 확신이 있다면, 스승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명령을 엄밀하게 주어진 그대로(literally) 따르지는 못한다. 그대 신념의 근거가 이성(理性)이다 보니, 그대의 이성과 스승에 대한 그대의 이해를 (그리고 스승의 명령에 대한 그대의 이해를) 구분하기 어렵게 된다. 이 둘은 불가분하게 서로 엮여 있기 때문에, 그대의 이성적인 믿음->신념?(reasoned faith)은 그대의 복종이 지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붙든다. 스승은 이 단계의 제자를 내버려두는 편이며, 제자는 스승이 권하는 모든 복종의 ‘알약’들을 자신의 도량과 입맛에 맞도록 합리화한 후에만 먹는다. 

엄밀한 무조건적인 복종 

만일 스승의 명령에 대한 그대의 해석과 실행이 합리적이고 전심적이라면, 완벽한 스승(Master)에 대한 ‘지적인 복종’을 통해 그대는 모든 산스카라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의 명령을 {말 그대로} 엄밀하게 복종하면, 그 결과를 훨씬 더 빨리 가져올 수 있다->그 결과는 훨씬 더 빠를 것이다. 그러나(원문에도 없고, 앞 문장도 ‘그러나’로 시작되므로 생략) ’엄밀한 복종’은 돌 같이 강한 신념과 깊은 사랑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과 사랑은 스승이 자신의 인간적 매력을 활용하여 제자에게 주는 영감을 통해서만 생기는 것이다. 스승의 후광(Halo)에서 넘쳐흐르는 광휘와 그의 순결과 자비심의 눈부신 광채는, 제자의 마음에 부동의 신념을 자리잡게 한->하는 주요 요인이다; 이러한 신념은 자신의 비판적 사고의 판단과 무관하게 스승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 있도록 제자를 준비시킨다.

이런 식의 ‘엄밀한 복종’에는 명령의 의미에 대한 제자의 지적 이해마저도 요구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엄밀한 복종’은 명령의 의미에 대한 제자의 지적 이해마저도 요구하지 않는다; ‘엄밀한 복종’은 그대가 염원할 수 있는 복종 중 가장 높은 형태의 복종이다. 이렇듯 아무런 의문도 없이 맹목적으로 실천하는 복종은, 그대의 모든 욕망과 산스카라의 뒤틀린 매듭을 펴준다. 스승(Master)과 제자의 유대관계(link)가 더더욱 깊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복종을 통해서다; 이 깊은 유대관계는 영적 지혜와 파워가 제자에게 계속해서 지체 없이->제약 없이 unhindered 흐를 수 있게 해준다. 이 단계에서 제자는 스승의 영적 아들(딸)이 되며, 때가 되면 그(그녀)는 모든 개인적인 얽힘들로부터 그리고 모든 산스카라적 얽힘들로부터 해방된다. 그 후 매우 드문 사람인 그도 참스승(Master)이 된다.

삿구루의 역할

삿구루 또는 완벽한 스승(Perfect Master)은 독특한 지위와 권력*(power)을 지닌다. 어느 정도 진보되어 영적 경로에 올라선 영혼들은 이 세상에 많이 있다; 그러나 6단계의 의식의 내면적 경지들을 모두 거침으로써 존재, 지식, 지복의 무한한 원천에 도달한 영혼은 극히 드물다. 삿구루는 이미 의식의 모든 경지들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무한함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모든 영혼의 존재 자체 속에 실제로 스며들어 있다. 그는 우주의 모든 현상의 중심축이다. 
어떤 면에서, 그대의 모든 생각과 행동, 기쁨과 슬픔, 안달복달, 강점과 약점, 소유와 포기, 사랑과 갈망이 모두 삿구루의 덕택(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존재 전체에 편재할 뿐 아니라, 우주의 인과 법칙에 대해 완전히 정통하여 각각의 개체적 영혼들이 지닌 산스카라들의 복잡한 작용에 대해서도 완전히 간파하고 있다. 그는 우주적 변동과 대격변의 원인을 알듯이, 개인의 행복과 고통, 미덕과 악덕의 원인도 잘 알고 있다. 그의 편재한 의식(omnipresent consciousness)이 지닌 무한한 탐조등 앞에, 모든 존재는 열린 책이나 다름없다.
완벽한 스승은 무한함과 합일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한 파워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그는 눈 깜빡할 사이에 모든 산스카라를 전멸시켜 그 영혼을 일체의 속박과 얽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담론 7 산스카라의 제거 2부

산스카라들의 제거

2부

산스카라들의 분산과 소진

제어(control)를 통한 산스카라의 무효화 

앞장 끝에서는 양성 산스카라들(positive sanskaras)을 부정하는 원칙에 의해 산스카라를 제거하는 방법들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의식으로부터 진실(Truth)을 가린다는 일종의 부작용을 일으킨다; 따라서 온 천지가 존재하게 된 유일한 이유인 참나의 깨달음마저 가로막게 된다. 양성 산스카라들을 무효화시키는 모든 방법들은 결국 몸과 마음의 제어(control)에 기반한다. 마음의 습관적 경향을 제어하는 것은 신체적 행동을 제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순간에 스치고 지나가거나, 잘 잡히지 않는 마음의 생각과 욕망들은 강한 인내와 지속적인 연습으로만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작용과 반응을 제어하는 것은 새로운 산스카라의 형성을 방지할 뿐 아니라 정신적 작용과 반응의 근원인 과거의 산스카라들을 마모시키고 풀어주기 때문에 필수적인 방법이다. 초기에는 제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진심으로 노력하다보면 점차적으로 자연스러워지고 이루기 쉬워진다.

산스카라들의 제거를 통해 마음이 스스로를 비-조건화(de-condition)하려 노력하는 한, 제어는 의도적이어야 하며 반드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마음이 산스카라들의 영향으로부터 석방되면, 이 석방된 마음은 참된 이해와 자유 속에서 기능하기 때문에 그 후부터의 제어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제어는 강한 인품과 건전한 마음의 결과물이며, 반드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광대한 평화로움, 고요한 침착함을 불러온다. 제어되지 않고 방종하게 기능할 때 약해 보였던 마음은, 제어가 되면서부터 위대한 힘의 원천이 된다. 창의적 용도에 중요하기 때문에 절약하며 사용해야 할 정신력(thought force)의 보존과 심령적 에너지(psychic energy)의 알뜰한 활용을 위해서, 제어는 절대 필수적이다.

진정한 제어는 참된 가치관의 이해를 통해서 솟아나는/ 참된 가치관에 비추어 생겨나는 창의적인 교정이다

제어의 본래 목표는 마음을 비조건화(decondition)하여 마음이 자유롭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이 문장이 7 버전에 없음) 하지만 만일 제어가 전적으로 기계적이 된다거나 원래의 방향을 잊어버리게 되면, 마음을 자유롭게 하려는 본래 목표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진정한 영적 가치를 지닌 제어는 생각과 욕망의 기계적인 억압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체험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가치(관)들에 의해 인식(perception)이 전환됨으로써 저절로 자제되는 제어다. 따라서 진정한 제어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어떤 긍정적인 가치들에 의식의 관심이 집중되면, 일상 생활에 표현되고자 하는 그 가치들의 주장(claim)은 의식 안에 정신적 반응을 일으킨다; 이 정신적 반응은 그 가치들의 자유롭고 완전한 표현을 방해하는 모든 정신적 경향들을 결국 모두 제거하게 된다. 즉 순수하고 관대하고 친절한 삶의 가치를 공감하여 알아봄으로써 육욕, 탐욕, 분노의 경향성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정하게 생각하고 반응하는 습관에 익숙해진 마음은, 과거의 사고방식과 행동에서 비롯된 인상들의 타성 때문에 새롭게 전환된 지각(知覺)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가치관의 주장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참된 가치들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지각을 교정하는 과정은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컨트롤’(제어)은 마음을 억지로 또는 기계적으로 뒤트는 것과는 다르다. 이 제어는 자체의 타성을 이겨내려는 마음의 노력이다. 이 제어는 삶의 참된 가치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도록 스스로의 지각을 교정해가는 마음(mind)의 시도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제어는 근본적으로 창의적이며, 목적에 있어 부정적일 수가 없다. 

산스카라들의 분산(dispersion)과 소진(exhaustion)

’창조적 제어’가 가능한 것은 그 빛의 근원이 모든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깨달음은 산스카라의 베일에 가려 불가능하지만, 일반 사람의 의식 수준에서도 완전한 어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빛의 광선은 참된 가치들에 대한 일종의 감각(영감)으로 구성되며, 그 사람이 지닌 산스카라의 베일이 얼마나 두꺼우냐에 따라 영감의 선명도가 달라지며 이에 따라 각자의 영적 진보를 인도한다. 산스카라들을 무효화하는 과정이 바로 참된 가치들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영적 진보는 참된 가치들의 이해를 선호함으로써 산스카라들의 그릇된 가치들을 단념하는 양면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승화는 더 낮은 가치들을 더 높은 가치들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거치는 각 단계마다 흥미진진한 관심거리들로 가득하며, 충족감은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산스카라들에 갇혀 있던 정신적 에너지를 이렇게 전환시킬 때, 그 산스카라들은 분산되고 소진된다.

그치지 않는 관심에 의해 지속되는 승화 과정

승화는 오래된 산스카라들의 틀을 뚫고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자연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은 모든 단계에서 갈망자(aspirant)가 계속해서 관심을 잃지 않는다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승화가 없는 단순한 부정의 방법은 때로는 지루해질 수 있으며 공허함(vacuity)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승화는 더 낮은 가치들을 더 높은 가치들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거치는 각 단계마다 흥미진진한 관심거리들로 가득하며, 충족감은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정신적 에너지(Psychic energy)는 다음의 세 가지 영적 경로로 승화시킬 수 있다; (1) 명상 (2) 인류를 위한 사심없는 봉사 (3) 헌신

명상의 본성과 목적

명상은 ‘이상적인 대상’에 대한 깊고 꾸준한 집중이다. 어떤 ‘이상적인 대상’에 이런 식으로 집중하면, 그 사람은 몸과 마음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명상의 대상만을 의식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형성은 방지되고, 오래된 산스카라들은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적 활동을 통해 분산되고 소진된다. 마침내 그 산스카라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 집중의 강렬함 속에 영혼의 개체성은 용해되어 그 ‘이상적인 대상’ 속으로 흡수된다

명상의 종류

사람마다 적성(aptitude)이 다양하듯이, 여기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명상이 존재한다.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의 천재적 상상력은 대개 과로로 인해 메말라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명상은, 자신의 생각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 자신의 육체와 그 생각들을 객관적(objectively)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생각들을 완전히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데 성공한 갈망자는, 그 다음에 ‘나는 무한하다’, ‘나는 만물 속에 있다’, ‘나는 모든 것 안에 있다’ 등의 건설적인 제안을 통해 자신을 우주적 존재와 동일시하려고 한다.
선명하고 활발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은 어느 한 점에 강렬하게 집중하는 방법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점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피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정신적 에너지는 온갖 {이런 저런} 생각에 흩어져 있다.  한 점에 집중하는 명상은 마음을 한데 모으고 안정시키는 데 매우 유익하다; 하지만 기계적인 과정이다보니 창의적이고 지복어린 체험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형태의 명상은 다른 더 효율적인 형태의 명상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 사용될 수 있다.

신의 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과 비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

더 효율적이고 깊은 형태의 명상들 이전에는 신(즉 비러벳)에 대해서 의도적이고 건설적으로 생각하는 기간이 앞선다. 신에 대한 명상이 영적으로 가장 유익하다. 신은 비인격적인 측면 내지는 인격적인 측면으로 명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신의 비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은 이것에 맞는 특별한 적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적당하다. 이 명상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신의 추상적인 존재성과 신의 ‘현상화되지 않은 존재성’(unmanifest existence)에 집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반면에 신의 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은 모든 생각을 신의 형상과 속성(특징)에 집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집중하여 명상한 뒤, 명상의 대상 대신 명상 도중에 느꼈던 광대한 평화와 안정감을 되새겨 그 느낌 속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순간들은 상상력의 피로로 인해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대로 격려하는 것이 좋다. 명상은 자발적이어야지, 강제(억지)로 해선 안 된다. 신성한 충동들이 샘솟는 순간에는, 상상력이 높이 비상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좋다. 이 상상의 비행은 육욕, 탐욕,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의 흐름에 의해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 이 비행은 오직 무한함과 하나가 되겠다는 애초의 목적에 의해서만 방향이 잡혀야 한다.

명상의 장애물들

집중에 성공하는 것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며 초기에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보자는 낙담하기 쉽다. 많은 경우 그가 느끼는 실망감은 그날의 명상을 시작하고 지속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게으름이나 건강 문제와 같이 극복하기 어려울 수 있는 다른 장애물들도 있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고정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정기적으로 연습하는 명상으로 극복할 수 있다. 조용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이 명상에 특별히 좋다; 하지만 다른 어떤 시간에 해도 괜찮다.

명상에 있어 독거의 중요성

독거(solitude)는 명상에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다. 생각의 세계 안에서는, 온갖 형태와 색깔의  생각들이 서로 끊임없이 뒤섞이고 있다. 어떤 강력한 생각들은 통합을 촉진시켜 마음을 강하게 하는 반면, 어떤 하찮은 생각들은 마음을 약하게 한다. 마음은 정신적 환경에 수두룩한 각양각색의 생각들에 대해 ‘끌림’ 아니면 ‘거부감’, 둘 중 하나를 느낀다. 스스로만의 이상적인 생각(ideal thought)에 확립되려면, 이런 여러 잡다한 생각들의 영향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목적에 있어 독거(solitude)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다. 독거는 정신적 에너지(mental energy)의 절약과 집중력의 증가를 의미한다.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마음에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들이 더이상 없으므로 그대는 스스로의 내면 속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게 되고, 그대에게 힘이 되고 광대한 평화와 지복을 줄 수 있는 더 높고 고귀한 {생각의} 흐름에 마음을 여는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사심 없는 봉사(Selfless service)

신의 ‘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과 ‘비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을 실천하기 위해선 우선 의식이 가슴의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신의 ‘우주적인 측면’에 대한 집중을 위해서는 {의식의 외부적 활동인} 인류를 위한 사심없는 봉사가 가장 효과적이다. 인류를 위한 봉사에 완전히 몰두할 때, 그 사람은 명상할 때와 다름 없이 자신의 몸이나 마음, 심지어는 이들의 기능마저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명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산스카라들은 형성되지 않는다. 더불어 마음을 속박하는 오래된 산스카라들도 부스러지고, 분산된다. 이제는 그 사람의 관심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남들의 이익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그 에고의 핵심은 더이상 자양적 에너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사심 없는 봉사는, (항상 구속력을 발휘하는) 산스카라들 안에 묶여있는 에너지들을 전환시키고 승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사심 없는 봉사의 시사점

사심없는 봉사는 봉사의 결과나 보상에 대한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을 때, 그리고 스스로의 편안과 안락에 대한 생각이나 남의 오해를 살 가능성에 대한 근심이 전혀 없을 때에만 성취된 것이다. 남들의 복지(welfare)에 전적으로 열중하다 보면,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 틈도 없어진다. 그리고 스스로의 편안이나 안락, 건강과 행복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대는 그들의 안락(wellbing)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한다. 그들의 안락이 그대의 편안함이 되고, 그들의 건강이 그대의 기쁨이 되며, 그들의 행복이 그대의 즐거움이 된다. 그들의 삶 속에서 그대 자신을 잃음으로써 그대의 삶을 찾는 것이다. 그대는 그들의 가슴(heart) 속에 살며, 그대의 가슴은 그들의 안식처다. 가슴과 가슴이 하나가 되면, 그대는 그 사람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게 되다. 타인을 돕는 그대의 행위나 위안의 말은 그들에게 부족한 무엇이든 제공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감사와 호의로 인해, 그대는 준 것 보다 실제로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

봉사를 통해 얻는 자유와 충족

따라서 그대의 삶도 남을 위해 삶으로써 증폭되고 확장된다. 그래서 사심 없는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의 의무감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명성을 얻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심 없는 봉사는 남에게 봉사할 때 느끼는 행복감이 남에게 봉사를 받을 때 느끼는 행복감과 동일할 때만,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사심 없는 봉사의 이상은 권력욕과 소유욕의 산스카들로부터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며, 자기 연민과 질투의 산스카라들, 그리고 이기심이 야기한 악행의 산스카라들로부터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준다

사랑

사랑에 의해 영감받은 ‘사심 없는 봉사’와 명상은 둘다 자발적이다. 그래서 최고(Highest)의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길로서 마땅히 사랑이 손꼽히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영혼은 비러벳(Beloved)에 완전히 몰두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행위에 대해서는 초연해진다. 이러한 사랑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열어줌으로써,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형성을 막으며 오래된 산스카라들의 무효화(undoing)를 야기한다. 사랑의 강렬함처럼 ‘자아를 잊은 상태‘(self-forgetfulness)를 자연스럽고 완전하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산스카라들의 속박에서 의식을 해방시키는 방법들 중 가장 최고의 자리가 ‘사랑’에 주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정화력

사랑은 해탈(emancipation)에 이르는 다른 경로들이 지닌 이점들을 {헤아리고} 그 자체 안에 다 내포한다; 사랑은 그 자체가 가장 탁월하고 효과적인 {영적} 경로다.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행복함을 찾는다는 두 가지 특징을 동시에 지닌다. 사랑은 독점적으로 비러벳에게만 전심을 다해 모든 것을 바치며, 비러벳 외의 다른 모든 대상의 요구(주장)에 굴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적 에너지(mental energy)는 다른 곳으로 셀 여지가 없어지고, 집중은 완전해진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매우 독특하다. 사랑에 든 사람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생명적,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들을 한데 모아 ‘비러벳의 목적’을 위해 오롯이 바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랑은 ‘역동적인 힘'(dynamic power)의 원천이 된다. 진정한 사랑의 긴장은 너무나도 극심하기 때문에, 어떤 낮선 느낌일지라도 그 즉시 추방되고 만다. 따라서 배출력과 정화력에 있어, 사랑에 비할 상대는 없다.

사랑은 창조 세계에 편재한다

사랑은 전혀 부자연스럽거나 인위적이지 않다. 사랑은 진화 과정의 시초부터 존재했다. 무기물의 단계에서, 사랑은 응집력(cohesion)이나 인력(引力)의 형태로 투박하게 표현된다. 사물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붙어있게 해주는 자연적인 친화력(affinity)도 일종의 사랑이다. 천체(天體)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중력의 끌어당김도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랑 중 하나다. 사랑은 드디어 생물체의 단계(organic stage)에 이르러 스스로를 감상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아메바와 같이 가장 낮은 형태로부터 가장 진화된 인간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랑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면, 의식적인 희생에 의해 그 사랑의 가치는 더욱더 높아진다.

의식적인 희생으로 표현되는 사랑

사랑의 희생은 너무나도 완전하고 아낌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면서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은 줄수록 더 주고 싶어 하고, 줄수록 자신이 주었음을 덜 의식한다. 진정한 사랑의 냇물은 계속해서 깊어져만 가며 그칠 줄을 모른다. 그저 주는 것이 이것의 단순한 표현이다. 비러벳(Beloved)의 복합적인 성품은, 사랑이 가장 신경쓰고 조심히 돌보는 최고의 관심사다. 사랑은 온갖 일천 가지의 방법을 동원하여 오로지 비러벳의 기쁨만을 쉴 새 없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추구한다. 비러벳의 단 하나의 소망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또는 무시나 무관심으로 인한 아무리 티끌만치의 고통이라도 그것을(생략)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사랑은 망설임 없이 온갖 고통을 환영할 것이다. 비러벳(Beloved)을 위해서라면 러버(lover)는 기꺼이 자신의 파멸을 맞이할 자세가 되어 있다. 비러벳에 대한 근심 걱정과 고뇌로 야위어, 사랑은 자신이 거주하는 몸마저 돌보지 않게 된다. 사랑은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으며, 러버에게 비러벳은 일생 최고의 관심사다. 사랑의 성막(tabernacle)은 어쩔 줄 모르는 초조함에 억눌려 터지고, 더없는 달콤함과 사랑을 가득히 내뿜는 냇물들(streams)을 탄생시킨다; 이 현상은 러버가 스스로의 한계들을 돌파하여 비러벳의 존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잃을 때까지 지속된다.

헌신의 단계들

사랑이 깊고 강렬할 때, 이를 박티(Bhakti) 또는 헌신이라고 한다. 초기 단계의 헌신은 상징에 대한 숭배, 신들에게 바치는 기원, 계시된 경전들에 대한 공경과 충성, 또는 추상적 사고로 최상(the Highest)을 상상함으로써 표현된다. 보다 더 진보된 단계의 헌신은 인류의 복지에 대한 관심과 인류에 대한 봉사를 통해, 성인(saint)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통해, 그리고 영적 스승(Master)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통해 자체를 표현한다. 이 단계들은 각기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그에 해당되는 상대적인 결과들을 불러온다. 살아있는 완벽한 스승에 대한 사랑은 헌신의 단계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단계다; 이 헌신은 머지 않아 파라-박티(Para-bhakti) 즉 신성한 사랑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파라-박티(Para-bhakti)

파라-박티는 강렬해진 박티가 아니다. 파라-박티는 박티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파라-박티 단계의 헌신은 일편단심일 뿐 아니라 가슴(heart)의 극심한 초조함이 동반되며, 비러벳과 합일되고픈 끊임 없는 간절함이 동반된다. 여기에는 자신의 몸과 그 관리에 대한 무관심,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격리, 자신의 외모나 남들의 비난에 대한 철저한 무시가 따르는 동시에, 비러벳에 이끌리는 신성한 충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잦아진다. 이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유익하다; 그 이유는(->왜냐하면 or 삭제. 앞에도 ‘그’가 있어 어색) 사랑 자체가 육화된 이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며, 최고의 비러벳인 그 분보다 러버에게 완벽하게 반응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스승(Master)으로부터 러버가 받는 사랑의 순결함과 달콤함, 리고 사랑의 효력은 이 최고 단계의 사랑만이 지닐 수 있는, 그(‘그’가 세 번 나오므로 ‘그리고’를 생략. 마지막 ‘그’를 ‘어느’나 ‘어떤’으로 칠 수 있음) 무엇도 능가할 수 없는 영적 가치에 기여한다.

담론 6 산스카라의 제거 1부

산스카라의 제거

제1부

산스카라들의 중단, 마모, 풀림

산스카라들은 참나-계몽을 가로막는다

인간이 참나-계몽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산스카라들, 즉 과거의 체험으로 인해 축적된 인상들에 의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진화를 시작했던 ‘의식하고픈 의지’는 인간 형태에 이르러 의식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의식은 대령大靈(Oversoul)에 대한 앎(knowledge)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개체적 영혼은 영혼 고유의 참된 본성인 대령을 체험하는 데 의식을 사용하는 대신, 산스카라를 체험하는 데 사용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산스카라를 체험하는 데만 사용하려는 충동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산스카라적 체험은 (온갖 사람과 사물들로 가득찬 세상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한정된 신체’라는 환상에 영혼을 가두어버린다.

산스카라로부터의 석방을 확보하는 문제

개체적 영혼들은 바다 속의 물방울들과 같다. 바다 안의 각각의 물방울들이 근본적으로 바다와 같듯이, 바하스 즉, 환상에 의해 개체화된 영혼도 여전히 대령이며, 실제로는 대령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을 감싸고->둘러싸고 있는 산스카라들은, ‘물방울-영혼'(drop-soul)이 참나-계몽을 이루지 못하게 막으며 이원성의 영역 안에 가둔다. 영혼이 자신의 정체가 대령임을 의식적으로 깨달으려면, 의식을 유지한 상태에서 산스카라들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의식의 진화 과정에 기여한 산스카라들은, 이제 대령의 본성을 깨달으려는 의식의 노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의식하고픈 의지’가 당면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식을 더욱 진화시키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의식을 산스카라들로부터 석방시키느냐’가 된다.

산스카라로부터의 석방을 확보하는 5가지 방법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은 다음의 5가지 방법으로 일어난다:

1. 새로운 산스카라의 창조 중단.
이 방법은 끊임없이 재개되는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창출 활동을 중단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산스카라의 형성을 막대기에 실을 감는 것에 비유한다면, 이것은 막대에 더이상 실을 감지 않고 중지하는 것에 해당된다.
2. 오래된 산스카라의 마모(wearing out).
산스카라들이 행동이나 체험으로 표현되지 않도록 억제되면, 그들은 점차적으로 마모된다. 실의 비유를 쓴다면, 이 과정은 실이 있는 그 자리에서 닳아 해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3. 과거 산스카라의 풀림.
이 과정은 지나간 산스카라들의 형성 과정을 정신적으로 역전시켜 이들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실의 비유를 계속 쓰면, 이것은 감긴 실을 푸는 것과 같다.
4. 특정(일부) 산스카라의 분산과 소진.
산스카라들에 묶여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승화시켜 다른 경로로 전환시킨다면, 산스카라들이 분산되고 소진되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5. 산스카라의 완전한 근절(산스카라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
이 방법은 산스카라들을 완전히 전멸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실의 비유를 쓴다면, 이것은 가위로 실을 자르는 것이다. 이러한 산스카라들의 최종적 멸절은 오직 완벽한 스승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꼭 주의하여야 할 사항은, 위에서 언급한 5가지 방법들은 종류별로 정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과 산스카라들을 무효화하는 여러 구체적인 방법들은 복합적으로 함께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위의 5가지 방법들은, 산스카라들이 제거되는 도중에 벌어지는 영적인 과정을 원칙별로 구분한 것일 뿐이다. 편의를 위해 이번 1부에서는, 앞서 설명한 첫 세 가지의 원칙들(즉, 새로운 산스카라의 중단, 과거 산스카라의 마모, 감긴 산스카라의 풀림)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방법들을 먼저 다룰 것이다. 나중의 두 가지 원칙들(즉, 승화를 통한 산스카라의 분산과 소진, 산스카라의 완전한 근절)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방법들은 제2부와 제3부에서 설명할 것이다.

단념/포기(Renunciation) 

끊임없이 축적되는 산스카라들의 속박으로부터 마음이 석방되려면,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창출이 중단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증식은 단념(renunciation)을 통해 중단시킬 수 있다. 단념에는 외적 단념과 내적 단념, 두 가지가 있다. 외적 단념, 즉 물질적 단념은 마음이 집착하는 모든 것들(집, 배우자, 자녀들, 친구들, 부, 안락, 물질적 쾌락 등)을 내려놓는 것으로 구성된다. 내적 단념, 즉 정신적 단념은 모든 욕구, 특히 육체적 쾌락의 대상에 대한 욕구를 버리는 것으로 구성된다.
외적 단념 그 자체만으로 내적 단념이 반드시 따라온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많은 경우, 외적 단념은 내적 단념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 영적인 자유는 내적 단념으로 이루어지지, 외적 단념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외적 단념은 내적 단념을 이루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자신의 소유물들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졌거나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의 연결을 끊는다. 이것은 그가 포기한 것들이 더이상 그에게 새로운 산스카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산스카라의 형성 과정을 중단시킴으로써, 그는 산스카라들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외적 단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이것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단념함으로써 그는 과거의 속박들 역시 단념한 것이다. 그의 소유물들과 연결된 오래된 산스카라들은 그의 마음에서 분리되며, 표현이 억제된 그 산스카라들은 마모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외적 단념은 산스카라들의 마모에 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부와 권력을 소유한 사람은 사치와 방종의 삶에 노출된다. 그의 상황은 유혹에 더 빠지기 쉬운 환경이다. 인간은, 환경이라는 조각가가 찍고 파서 빚은 것이 그 사람의 대부분을 형성한다. 한 사람이 자신의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가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다. 만약 의지가 강하다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온갖} 행동과 반응을 하는 와중에도 그의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자유롭다. 만약 그가 약하다면, 주변 환경의 영향에 굴복하고 만다. 그러나 설사 그가 강하다고 해도, 집단적인 형태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에 휩쓸리기 쉽다. 맹렬하게 밀려오는 사상의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주변상황에 굴복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주변 환경에 저항한다 해도 언젠가는 어떤 집단적 열정에 휩쓸려 이제는 내려놓을 수 없는 어떤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에 저항하고 그것을 이겨내기란 어렵다; 오히려 그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길이다. 사치와 유혹에 둘러싸이지만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소박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모든 불필요한 것들의 단념은 산스카라들의 마로를 돕기 때문에 ‘자유의 삶'(life of freedom)에 기여한다.

독거(solitude)와 단식

 

독거(獨居)와 단식은 특별한 영적 가치가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외적 단념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속적 삶의 스트레스를 벗어나 가끔씩 고독 속으로 은거하는 것은, 사교적인 본능과 연관된 산스카라들을 마모시키는 데 유용하다. 그렇다고 해서 독거 자체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독거와 마찬가지로, 단식에도 상당한 영적 가치가 있다. 먹는 것은 충족이고, 단식은 거부다.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단식은 육체적 단식이다; 식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집착 때문이 아니라 단지 신체의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은 정신적 단식이다. 외적 단식은 정신적 단식을 이루기 위해 음식과의 직접적 접촉을 피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음식은 삶에 필수적인 요소며, 음식에 대한 계속적인 거부는 건강에 심각한 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외적 단식은 주기적으로, 단기간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식으로 음식에 대한 갈망을 극복하는 데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동원하여 음식에 대한 갈망을 이겨내면, 마음이 음식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나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외적 단식은 아무런 영적인 가치가 없다. 단식은 자기 주장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신체의 한계에 도달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해서도 안 된다. 장기간의 금식을 통한 자기 고행이 반드시 식욕으로부터 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금식의 반작용을 초래하여 음식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생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외적 단식을 영적 목적을 위해서 적당히 한다면, 이는 내적 단식의 성취를 돕는다. 외적 단식과 내적 단식이 진심어리고 충실할 때, 식욕과 연결된 산스카라가 풀리기 시작한다.

속죄(penance)

여러 다른 종류의 산스카라들은 속죄(penance)를 통해 풀 수 있다.  속죄는 한 사람이 어떤 잘못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느끼는 죄책감을 확대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회개/참회(repentance)는 속죄를 불러 일으키는 다양한 상황이나 사정을 되새기거나,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자신의 마음을 연약한 상태로 놔두거나, 과거의 일들을 가슴 깊은 후회와 예리한 자기 비난과 함께 의도적으로 회상하는 것 등으로 촉진시킬 수 있다. 이러한 속죄는 그 행위를 야기한 산스카라들을 풀어준다. 깊은 감정을 동반한 자기 비난은 분노, 탐욕, 육욕의 산스카라들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제되지 않은 탐욕과 분노, 육욕 때문에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언젠가 그는 자신을 죽일 듯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이라는 반응을 겪게 되어 있다. 만일 이때 그가 저지른 악행의 책임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그의 의식에 동반된 감정적 강렬함은 자기-비난(self-condemnation)의 소재인 악행을 야기한 그 경향성->경향을 소모시키게 된다.
자기-비난은 여러 형태의 자기-고행(self-mortification)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어떤 갈망자들은 참회하는 상태에 들면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자책의 표현은 전반적으로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기적인 수행법으로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or 정기적인 수행법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표 각주 처리} 어떤 힌두교 갈망자들은 겸허함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의 발에 절을 하는 것을 의례로 한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공감적이며 다정한 지도 아래 고행을 행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속죄가 주의깊게 숙달되고 수행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의 경향성과->경향과 행동 습관은 언젠가 반드시 정신적으로 제거된다; 그래서 순수한 봉사의 삶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속죄에 있어 늘 신중히 유념해야 할 것은, 마음이 과거의 그릇된 행동을 너무 오랫 동안 곱씹어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조차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병적인 습관으로 발전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감정적인 사치는 대개 무분별한 정신력의 낭비며, 산스카라들의 풀림이나 마모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속죄는 그날그날의 결점들에 대해 나날이 뉘우치는 참회(repentance)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속죄는 자신의 실수들에 대해 우울하고 과도하게 숙고하는, 지루하고 메마른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심어린 속죄는, 그릇된 행동에 대해 영원히 슬퍼하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속죄는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 행위를 미래에는 더이상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다. 만일 속죄가 자신감이나 자존감의 부족함으로 이어진다면, 그릇된 행위의 반복을 방지하려는 속죄의 진정한 목적을 벗어난 것이다.

욕망 충족의 자제
 
욕망의 표현과 충족을 거부하는 것 또한 산스카라들의 마모와 풀림에 있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욕망을 거부하는 능력 또는 기질은 사람마다 다르다. 욕망의 충동이 급속도로 강하게 솟아오르는 사람들은 그 욕망을 근원에서 제압하지 못한다; 그래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음으로써 그 욕망의 충족을 자제할 수는 있다. 강한 욕망의 솟아오름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욕망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행동의 통제를 통한 욕망의 거부는, 미래에 뿌려질 수 있는 욕망의 씨를 말린다. 행동의 통제를 통한 욕망의 거부는, 미래에 뿌려질 수 있는 욕망의 씨를 말린다.
반면에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면, 어떤 인상들은 소모되고 소진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인상들도 창조한다; 그리하여 그는 미래에 충족을 요구할 욕망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욕망의 표출과 충족을 통한 인상들의 소모 및 소진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산스카라들로부터 해방을 이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욕망들이 솟아날 때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으면, 이 욕망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사색(cogitation)할 충분한 겨를이 생긴다. 이러한 사색의 결과, 그 욕망에 해당하는 산스카라들은 마모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인 사색이 상상 속에서 그 욕망을 탐닉하는 방종의 형태를 취한다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고의적으로 마음 속에서 욕망을 반기고 품는 일은, 어떤 영적 가치도 없는 사색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기적(subtle) 산스카라들의 창출을 야기할 수 있다. 사색(명상)에는 의식 안에 일어나는 욕망에 대한 어떤 의식적인 승인이 함께 하면 안 되고, 욕망에 대한 기억을 계속 유지하려는 노력도 없어야 한다. 욕망의 표출과 충족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거부되고, 그 욕망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사색적 의식의 강렬한 불을 거치도록 하면,  욕망의 씨앗은 시들어 소모된다. 욕망들의 거부와 육체적 반응의 억제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자동적이며 자연스러운 과거 산스카라들의 무효화(negation)를 가져온다.

무욕의 상태(Desirelessness) 

 

욕망의 거부는 진정한 자유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상태인 무욕(無慾), 즉 원함이 없는 상태의 준비 과정이다. 원함(wanting)은 충족이 되든 되지 않든, 반드시 구속력을 지닌다. 욕망이 충족되면, 더 많은 원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신(spirit)의 속박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실망과 고통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야기하는 산스카라들은 또다른 방식으로 정신(spirit)의 자유를 구속한다. 

마음(mind)의 외적, 내적 자극들은 원함이나 (원함의 또다른 형태인) 싫어함의 상태로 마음을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에, 결국 원함에는 끝이 없게 된다. 외적 자극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이 있다. 내적 자극은 현생의 기억으로 인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진화 과정과 인간의 삶들을 거치는 도중에 의식에 축적된 산스카라들 전체로부터 솟아나오는 것들이 있다. 마음이 모든 외적, 내적 자극들이 있는 상태에서도 흔들림 없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되면, 무욕(nonwanting)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자극의 이원성(opposites)을 초월한 절대적인 실재를 제외한) 그 무엇도 원하지 않음으로써, 원함의 산스카라들을 푸는 것이 가능해진다.

무욕의 자세와 ‘네띠 네띠’ 원칙    

원함은 마음의 균형이 흐트러진 상태고, 무욕은 마음의 균형이 이루어진 안정된 상태다. 흔들리지 않는 무욕의 상태는,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유쾌하거나 불쾌한) 모든 자극들의 얽매임으로부터 끊임없이 해방상태를 유지할 경우에만 지속될 수 있다. 이 세상의 기쁨과 슬픔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마음이 외적 및 내적 자극들에서 완전히 초연해야만 한다. 마음이 아무리 스스로의 건설적인 제안으로 방비를 계속해서 강화한다 해도, 주변환경 및 정신적 환경의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파도에 마음의 어떤 외딴 전초기지의 방어벽이 휩쓸릴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그대는 당분간이나마 완전히 길을 잃은 듯할 것이다; 그러나 비집착(nonattachment)의 자세는 그대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

이 자세는 ‘네띠 네띠'(neti neti),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오’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자세는, 한정적인 체험의 매혹적인 반대들(opposites)에 대해 주의깊은 초연함(detachment)을 유지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맘에 드는 자극들에 대해서는 내면적으로 집착을 유지하면서, 불쾌한 자극만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이 반대들(이원성)의 밀어닥침에 흔들리지 않고 평형을 유지하려면, 유쾌한 자극들의 표현에 집착을 유지할 수 없으며 그것들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평형 자세(equipoise)는, 이원성의 양쪽 모두를 완전히 초연한 자세로 맞이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모든 금욕주의의 모든 측면들이 지닌 부정적인 요소

긍정적(positive) 산스카라들이 의미하는 ‘좋아, 하자'(yes, yes)는 ‘아니, 하지 말자'(no, no)라는 부정적 선언을 통해서만 무효화할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요소는 단념, 독거, 단식, 속죄, 욕망 충족의 보류, 무욕으로 표현되는 금욕주의의 모든 방면에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모든 방식과 자세의 조화로운 조합은, 무리하게 힘들거나 고역스럽지 않은 건강한 형태의 금욕주의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보장하기 위해선, 그들이 지닌 부정적인 요소들이 왜곡되거나 더 많은 한정들을 가져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금욕주의의 삶을 살도록 마음에 강요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삶에 금욕적인 노선을 적용하려는 어떤 강제적인 노력도 오히려 여러 선한 자질들의 성장을 방해하기 쉽다. 인간 본성의 건강한 자질들이 천천히,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게 허용되면, 상대적 가치들에 대한 지식이 펼쳐지고 그럼으로써 자발적인 금욕주의의 삶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마음에 금욕적인 삶을 강요하거나 재촉하는 모든 시도들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하기 쉽다.

많은 경우, 어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벗어나는/석방되는(최종검토 리스트) 과정에는, 또 다른 어떤 새로운 집착이 형성되는 과정이 동반된다. 가장 물질적인 형태의 집착은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마음은 사물들의 세계와 분리될 때, 주관적인 종류의 더 섬세한(finer) 집착에 이르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어느 정도의 초연함을 기르는 데 성공한 뒤에는, 고고하고 거만한 태도로 표현되는 기적(subtle) 형태의 자기중심벽(egotism)이 자리잡기 쉽다. 초연함(detachment)은, 에고(ego)가 달라붙을 수 있는 또다른 중심점(nucleus)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세속생활의 스트레스와 혼잡함을 감당할 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순수하고 무한한 존재(Infinite being)를 제한하는 요소들의 포기는, 순수함 및 깨우침에서 비롯되는 매우 강한 태도를 통한 포기여야만 한다; 삶의 투쟁과 갈등에 대한 무력함에서 비롯된 포기의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진정한 초연함은, 깨달음에 대한 심오한 갈망도 없이 강박관념이 될 수 있는 ‘네띠 네띠’의 공식에만 무조건 매달리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부정적 공식에 대한 이런 식의 강박 관념은 많은 경우 그 유혹들에 대한 내적 애착심과 나란히 공존한다. 초연함은 그 사람 성품의 불가분한 일부분이 되어야 전심적이고 온전해질 수 있다. 

음성 산스카라들도 사라져야만이 깨달음이 따를 수 있다

진화 과정과 인간의 환생 기간 동안 축적해온 양성 산스카라들(positive sanskaras)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 아니'(no no)의 부정적 의지-선언/결심(assertion)의 행사뿐이다. 물론 이 과정은 양성 산스카라들의 파괴를 가져온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마음을 조건화(condition)할, 그리하여 또다른 새로운 문제를 창출하게 될 음성 산스카라들(negative sanskaras)의 형성도 초래한다. ‘아니, 아니’의 의지-결심(assertion)의 강도가 충분히 강해야지만이 모든 물질적, 기적, 정신적 산스카라들을 뿌리뽑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결국 버려야만 하는 방법이다. 영적 체험의 최종적 결과란, 고작 메마른 부정으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공식(negative formula)에 귀속시키는 것은 영적 체험을 지적인 개념의 수준으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부정적인 공식은 마음이 스스로의 조건화(condition)를 제거하는 용도로 활용해야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인생의 최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그 이전에 반드시 버려져야만 한다.

’생각’(thought)의 활동으로 인해 설정된 제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각’의 활용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목표가 일단 완료되고 나면, ‘생각’ 그 자체도 버려져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마음을 초월하는 과정이며, 마음과의 동일시를 버림으로써 그리고 마음 속 욕망들과의 동일시를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육신뿐 아니라 모든 생각들, 그리고 모든 낮은 충동들을 ‘객관적’(objectively)으로 바라보는 것은 초연함의 지복(至福)에 확립되는 것과 다름 없으며, 모든 산스카라들을 무효화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이 말의 의미는 ‘나는 이 몸이다’ ‘나는 이 마음이다’ ‘나는 욕망이다’ 등 스스로가 초래한 환상에서 영혼이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며, 깨달음의 단계인 ‘나는 신이다’의 상태를 향해서 한 걸음 나아갔다는 뜻이다. (이 ‘나는 신이다’의 단계는 ‘아날 하크'(Anal Haqq) 또는 ‘아함 브라마스미'(Aham Brahmasmi)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