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2 이기심

영어 원본

이기심

이기심의 분석

이기심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행동(action)과 체험(experience)을 통해 충족을 추구하는 욕망들의 경향 때문이다. -> 행동(action)과 체험(experience)을 통해 충족을 추구하는 욕망들의 경향 때문에 이기심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기심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에서 기인/발생/탄생하는 것이다. 인간의식은 기나긴 의식의 진화과정을 통해 축적되어온 다양한 종류의 인상(impressions)들에 의해 흐려져 있다. 이 인상들은 자체를 욕망으로 표현하며, 의식의 활동범위는 이 욕망들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이 인상들 또는 산스카라들(sanskaras)은, 일종의 테두리를 형성하여 의식의 활동범위를 제한한다. 산스카라들이 형성하는 테두리(circle)는, 개체의 의식이 (집중될 수 있는) 벗어나지 못하는 한정된 공간/지역을 구성한다. 어떤 욕망들은 잠재적으로 남는 반면, 어떤 욕망들은 자체를 행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행동으로 자체를 표현하려는 욕망의 역량은 그 욕망과 연관된 산스카라들의 양과 강도에 달려있다.  기하학적인 은유로 설명한다면, 욕망이 행동으로 전개될 때, 그 욕망은 (그 욕망과 연관된 산스카라들의 테두리를 묘사하는) 원의 반지름과 동등한 길이를 거친다.  욕망이 충분한 힘을 모으면, 그 욕망은 자체를 행동으로 투영/표현(project)하여 충족을 구한다/이룬다.

“원함”(wanting)은 불만족으로 끝난다

이기심의 범위는 욕망의 범위와 정 비례한다.  다종다양한 욕망들의 방해로 인해, 영혼은 자체의 ‘참존재'(true being)를 자유롭고 완전하게 표현할 수 없게 되며, 삶은 편협해지고 “자기-중심적”(self-centered)이 되는 것이다. ->  영혼이 자신의 ‘참존재'(true being)를 자유롭고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다종다양한 욕망들의 방해로 인해서다; 따라서 삶은 편협해지고 “자기-중심적”(self-centered)이 된다.  개인적 에고(ego)의 생애는 지속적으로 ‘원함’의 구속을 받는다. (원함은 변하고 사라질 일시적인 것들을 통해 욕망을 충족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들을 통한 진정한 충족은 있을 수 없다. 삶의 일시적인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충족은 오래가지 못하며, 결국 인간의 “원함”은 충족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따라서, 이것에는 전반적인 불만족과 온갖 걱정걸이들이 동반되다.

육욕(lust), 탐욕(greed), 그리고 분노( anger)

좌절된 에고(ego)가 표현을 추구하는 주요 형태는 육욕, 탐욕, 분노다.  육욕(lust)은 많은 면에서 탐욕과 매우 흡사하지만, 충족의 방식에 있어 다르다; 육욕은 물질적 영역(gross sphere)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육욕은 물질적 신체(physical body)를 매개체로 자체의 표현을 추구하며, 육신(flesh)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물질적 영역”(gross sphere)과의 얽매임이다. 탐욕(greed)은 초조한 가슴(heart)의 상태이며, 주로 권력과 재산에 대한 갈망으로 구성된다. 권력과 재산의 추구는 결국 욕망들의 충족을 위해서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시도들은 부분적인 총족만을 초래한다;  이 부분적 충족은 욕구(craving)를 소멸시키는 대신 오히려 욕구의 불을 증가시킨다. 따라서 항상 탐욕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정복해야할 영역들이 발견 되며, 그 사람은 한없는 불만족감에 잠기게 된다.  -> 따라서 항상 탐욕에는 끝없는 정복거리들이 펼쳐지며, 그 사람은 끝없는 불만족만을 찾는다.  탐욕의 주요 표현은, 인간의 심리적인(emotional)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  탐욕은  기적 영역(subtle sphere)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 탐욕은  {일종의} 기적 영역(subtle sphere)과의 얽매임이다.  분노(anger)는 짜증난(irritated) 마음의 분출(fume)이다.  이것은 욕망충족의 좌절(저지)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분노는 한정된 에고(ego)를 먹여 살리는/키우는 역할을 하며, 제압과 공격의 용도로 쓰인다.  이것의 목표는 욕망의 충족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의 제거다. 분노의 광란(폭발)은 이기심과 자만심을 키우(는 영양분이 되)며, 한정된 자아(ego)를 지지하는 최대 후원자다.  분노는 마음(mind)에 자리하며, 주로 마음의 활동으로 자체를 표현한다.   분노는 정신적(mental) 얽매임의 한 종류다. -> 분노는 일종의 정신적 얽매임이다.  육욕, 탐욕, 분노는 각각 육신, 가슴(heart), 마음(mind)을 표현적 매개체로 삼는다.

악순환의 고리

인간은 육욕, 탐욕, 분노를 통해 실망을 체험하게 된다; 그 후 좌절된 애고(ego)는 또 다시 육욕, 탐욕, 분노를 통해 만족을 추구한다. 이러게 해서 의식이 끝없는 실망의 악순환에  말려들게 되는 것이다.  -> 의식은 이렇게 해서 끝없는 실망의 악순환에  말려들게 된다실망은  육욕, 탐욕, 분노 중 하나의 표현이 좌절됨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러서 실망은, 물질적(gross), 기적(subtle), 정신적(mental) 얽매임에서 보펴적으로 야기되는 반응이다.  실망은 육욕, 탐욕, 분노의 불-충족에서 비롯되는 우울증이다;  이기심과 이 세 요소는 항상 공존한다.  이 세 요소의 공통기반을 형성하는 이기심은, 모든 실망과 근심의 근본적 원인이다. 이기심은 자체를 패배한다. -> 이기심은 자체 자멸적이다. -> -> 이기심은 자체 패배적이다. 이것은 욕망을 통해 충족을  추구하지만, 결국 끝없는 불만족만을 낳는다/야기한다.

행복으로 가는 길

이기심은  불만과 실망으로밖엔 이끌지 못한다; 욕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을 찾는 길은 욕망들을 버리는 길이다. -> 따라서 행복의 문제는, 어떻게 욕망들을 버리느냐의 문제다. –> -> 따라서 행복의 문제는, 욕망을 버리는 문제다. 그러나 욕망은 기계적 억압을 통해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욕망의 소멸은, 오로지 지식(knowledge)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일 그대가 단 몇 분만이라도 생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신중하게 생각하여 본다면, 욕망의 공허함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지나온 수년간 겪어온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을 생각해 보라. 그대가 평생 동안 즐겼던 모든 것들은 오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가  평생 동안 겪었던 모든 괴로움들도 지금은 지나가고 없다. 모두가 환상(illusory)이었다. 행복함은 그대의 권한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온갖 것들을 원함으로서 자신의 불행을 자초한다. 원함은 끝없는 초조함의 원천이다.  그대는 원하던 것을 못 갖게 되면 실망하게 된다; 원하던 것을 갖게 되면  갈수록 더 많이 원해서 다시 슬퍼진다.  외쳐라,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행복해하라. 원함의 헛됨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은 궁극적으로 그대를 참지식(Knowledge)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자아-지식(self-knowledge)은 원함으로부터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대를 지속적인 행복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원함의 단념

‘원함’은 ‘필요함’과 주의를 기울여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자만심, 분노, 탐욕, 육욕은, 모두 ‘필요함’과 다르다.  만일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필요하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실수다.  만일 그대가 사막에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대가 필요한 것은 물이지 레몬주스가 아니다.    육신이 있는 한, 인간에게는 반듯이 필요한(필수적인) 것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필요한 것들은 반드시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원함(들)은 심취된 상상의 결과물이다.  행복함이 있으려면, 우선 ‘원함’들을 철저하게 죽여야만 한다.  이기심은 그 존재 자체가 욕망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원함’들의 단념은 곧 죽음(death)의 과정이다.  통상적으로 죽음(death)의 의미는 육체적인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낮은 육체적-욕망들(sense-desires)의 단념을 뜻한다.  신부들은 천당과 지옥에 대한 우울한 그림을 그려 ‘거짓된 죽음’(false death)을 위한 준비를 시킨다; 그러나 삶(생명)은 끊임 없이 지속되기 때문에, 이 죽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진정한 죽음은 욕망(들)의 중단으로 구성되며, 서서히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사랑과 봉사/보시

사랑의 여명은 이기심의 죽음을 촉진시킨다. 존재란 사랑함으로써 죽어가는 것이다. 서로서로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그대를 고문하는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기심의 제한성은 무지(無知: ignorance)에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의 관심 및 행동의 범위를 더 확대하면 더 영예롭고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사람은 자연히 봉사의 삶으로 향하게 된다.  이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많은 좋은(선한) 욕망들을 품게 된다.  그는 남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원하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한 욕망일지라도 흔히 (간접적인 내지는 잠재적인) 자아의 참고가 수반된다.  그래도 선행은 편파적인 이기심(narrow selfishness)의 완전한 지배를 받진 않는다.   좋은 욕망들도, 나쁜 욕망들과 마찬가지로 이원성의 영역(domain of duality)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일종의 더 계몽된, 확장된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선한 욕망들을 품다 보면, 인간의 이기심은 (궁극적으로 자체의 종멸을  가져오게 될) 더 광범위한 사고방식을 포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고작 남의 눈에 띄고 주목을 끌려 한다거나, 소유욕을 발휘하려 하지 않게 된다; 대신 남에게 유용해지는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이기심의 발생

개인적 에고(ego)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는 욕망들은 좋지 않으면 나쁜 것, 둘 중 하나다.  보통 나쁜 욕망들은 이기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좋은 욕망들은 이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기심’과 ‘이타심’을 가르는 명백한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둘 다 이원성의 영역(domain of duality) 안에서 활동하는 것들이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는 최상의 관점으로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차이는 대체적으로 범위의 차이일 뿐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개인적 에고(ego)의 삶에 있어 두 단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두 단계는 서로 영속적이다.  이기심은 모든 욕망이 좁은(편협된) 개성을 중심으로 집중될 때 발생하는 것이고, 이타심은 이 욕망들의 투박한 체계가 붕괴되어 더 넓은 범위로 분산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이기심은 제한된 범위로 관심의 폭이 좁아드는 것이며, 이타심은 더 넓은 범위로 관심의 폭이 확대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이기심은 제한된 형태의 이타심이고, 이타심은 더 넓은 영역으로 활동범위가 확장된 이기심이다.

이기심을 전환시켜 이타심으로 

이원성의 영역을 완벽하게 초월하려면, 우선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우선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전환되어야만이, 이원성의 영역을 완벽하게 초월할 수 있다.   근기 있는 선행의 지속적인 수행은 이기심을 닳아 없앤다. 선행의 형태로 확대되고 표현되는 이기심은, 이기심 그 자체를 파멸하는 도구가 된다.  바로 이 선함(good)이, 이기심의 활성(번성) 또는 파멸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태초에 악한 경향(evil tendencies)을 낳은 이기심은 자체의 패배를 가져오는 영웅이 된다.   악한 경향들이 완전히 선한 경향들로 대체될 때, 이기심은 이타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즉, 만유의 공익(universal interest) 속에 개인적 이기심이  잊혀진 것이다.   이러한 사심없고 선한 삶도 아직은 반대들(opposites)에 얽매어 있다; 그러나 선함은 그래도 반대들로부터의 석방을 향한 필수적인 단계다.  선함은 영혼이 스스로의 무지를 전멸시키는 수단이다.

만유적 자아’/우주적 자아(Universal Selfhood)

영혼은 선함을 거쳐 신(神)에게로 온다/간다.  이때, 이타심은 만유적 자아 속으로 녹아든다;  즉, 좋고 그름, 미덕과 악덕 등 마야(Maya)의 모든 ‘이원적 측면들'(dual aspects)을 초월하는 만유적 자아 속으로 녹아든다.  -> 이때, 이타심은 (좋고 그름, 미덕과 악덕 등 마야(Maya)의 모든 ‘이원적 측면들'(dual aspects)을 초월하는) 만유적 자아 속으로 녹아든다.  일체 모든 것과 하나임(oneness)을 느끼기 시작할 때가 바로 이타심의 절정이다.  해탈(liberation)의 상태에서는, (통상적인 개념의) 이기심도, 이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 둘은 모두가 다 나임을 느끼는 전체-자아감(selfness for all) 속으로 흡수, 융해된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깨달음(자각)에는 해아릴 수 없는/불가해한 지복(bliss)과 평온함이 동반한다.  이것에는 어떤 식의 영적 침체도, 상대적 가치관의 파멸도 수반되지 않는다. 이 (모든 존재에 대한) 전체 자아감(selfness for all)은, 구속  없는 조화를 야기하면서도, 식별력의 상실을 가져오진 않는다; 또한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을 야기하면서도, 주변환경에 대한 냉담함을 가져오진 않는다.  이 모든 존재에 대한 전체 자아감은, 단순히 주관적 합성의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최상의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union)을 실질적으로 달성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물다.

‘최상의 현실’과의 합일

온갖 욕망들을 추려냄으로써(그리고 유일한 염원으로 ‘최상의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union)을 갈망함으로써) 그대의 마음을 열어라. ‘최상의 실재’는 변하는 외부환경에서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존재 속에서만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영혼이 그대의 가슴 속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가슴의 문은 잠겨있고 그 속은 욕구들로 가득 차있다. 가슴의 문을 닫고 있지 말아라.  지복(bliss)의 원천은 변함없이 온통 사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무지(ignorance)에서 야기되는(기인하는) 욕망들 때문에 괴로워들 하고 있다.  영속적 행복의 목표는, 한정된 에고(ego)와 그것에 동반되는 모든 욕망들이 완전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멸종되어야만이, 전적으로 환히 펼쳐지질 수 있다.

영성(Spirituality)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태도

욕망의 단념(renunciation)은 금욕주의(asceticism)를 의미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의 삶의 부정은 사람을 더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신성(Divinity)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영성(Spirituality)은 필히 인간을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좋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들을 석방시키는 긍정적인 태도다.  더불어, 이것은 환경 속에 있는 모든 자애롭고 아름다운 것들에도 기여한다.  이것은 세속활동의 외적 단념이나 의무와 책임의 회피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요구하는 것은, 세속활동을 하는 와중에, 그리고 (그 사람의 독특한 자리나 자위에서 초래되는) 각종 의무들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그 사람의 내적 정신(spirit)이 욕망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다.   완벽함(Perfection)은 이원성(duality)에 얽매임으로부터 항상 자유를 유지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얽매임(entanglements)으로부터의 자유는, 제약 없는 창조성의 가장 필수적인 요구 사항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성취는, (얽매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실을 도피한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삶의 부정 밖엔 안된다.   

완벽함(Perfection)은 자연의 이원적(dual) 표현의 도피로 구성되지 않는다.   얽매임들을 의도적으로 도피하려는 시도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암시된다.  영성은 (반대들(opposites)에 의해 압도되지 않으면서) 삶의 요구들을 적절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맞이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일체 환상(illusion)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해야만 한다–(그 환상이 아무리 매력적고 강하여도)  ‘완벽한 인간’(Perfect man)은 삶의 각종 형태들과의 접촉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초탈한 태도(complete detachment)를 유지하며, 격렬한 활동 와중에도 완전히 초탈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의 기능을 시행한다.

담론 1 신인류

영어 원본

신인류(New Humanity)   

신성적 계획(Divine Plan)

인류역사의 모든 위태롭고 결정적인 시기들이 그러했듯이, 현재 인류는 영적 부활의 고역스러운 산고를 겪고 있다. 당장은 거대한 파괴적 힘들이 우세한듯하나, 인류를 구제할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힘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비록 이 빛의 세력들(forces of light)의  영향력은 소리 없이 발휘되긴 하나, 그들이 가져올 변화들은 결국 안전하고 꾸준한 인류의 영적 진보를 가져올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굶주리고 지쳐있는 이 세상에 영원하고 유일한 진실을 새롭게 분배하기 위한 신성적 계획(Divine Plan)의 한 부분에 속한다.  

전쟁은 더 심각한 근원의 증상이다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급박한 과제는, 삶의 각종 영역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기(氣)적(Subtle) 그리고 물질적(gross) 형태의 경쟁, 다툼, 그리고 상대의식을 제거하는 수단과 방법을 창안(고안)하는 것이다. 물론, 혼란과 파괴의 요소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군사적 전쟁(Military Wars)이다. 하지만, 전쟁 그 자체가 인류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구성하진 않는다; 오히려 전쟁은 더 뿌리깊고  심각한 문제에서 비롯되는 외부적 증상이다. 전쟁과 이로 인해 나타나는 온갖 고난들은, 결코 단순한 반전시위나 반전-선전으로 방지/모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을 없애려면 전쟁의 뿌리에 있는 근원을 공격하는 길 밖에는 없다.  전시가 아닌 평화로운 시기에도 인간은  (개인적으로 내지는 집단적으로) 항상 경제적인 경쟁 및 각종 교묘한 형태의 전쟁을하고 있다.   군사적 전쟁과 이것에 수반하는 온갖 잔인함들은, 오로지 근원에 밑바탕 되는 원인들이 악화 되었을 경우에만 발생하는 증상이다.

혼란의 궁극적 원인은 이기주의와 사리사욕이다

전쟁에서 촉발되는 온갖 혼동의 근원은, 대부분 사람들이 사리사욕(Selfish-interest)과 이기주의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들의 이기주의와 사리사욕을 개인적인 형태로 그리고 집단적인 형태로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얽매여 있는 환상적 가치관(Illusory Values) 삶이다.  진실(Truth)을 직면하는 것은, 각양각색으로 발현된 일체의 모든 생명이 두루 하나다 라는 사실을 인식하는(깨닫는) 것이다. 이 진실을 {재대로} 이해했다는 것은,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깨달음 속에 자신의 한정적인 자아를 잊는 것이다. 

전쟁은 불필요하고 불합리하다

참된 이해의 여명이 밝아 오르면 전쟁의 문제는 그 즉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전쟁의 불필요성과 불합리성은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여져야 한다; 그러면 당장 시급한 과제가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야기하는 실재의 원인인 마음(mind)의 사고방식을 영적인 측면에서 공략하게 된다.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진실의 빛'(Light of Truth) 속에는, 협조적이며 조화로운 삶이 필연적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따라서, 인류의 재건에 있어 깊은 뜻을 품은 이들이 최고의 사명으로 삼아야할 과제는, 인류를 둘러싸고 있는 영적 무지를 떨치는 과제다. -> 따라서, 인류의 재건에 있어 깊은 뜻을 품은 이들이 삼아야할 최고의 과제는, 당장 인류를 둘러싸고 있는 영적 무지를 분산시키는 사명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리사욕을 제거하여야만 한다

전쟁은 단순히 물질적인 교정(Material Adjustment)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흔히 전쟁은 어떤 편파적인 공동체의 이권과 자신의 신분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여 ‘내것'(mine)이라 여기는 부분에 포함하므로 생기는 결과물이다.  물질적 교정(Material Adjustment)은 더 광범위한 문제인 영적 교정(Spiritual Adjustment)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영적 교정(Spiritual Adjustment)은 물질적 측면에서의 자아의 완전한 제거를 요구할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든 감정적, 이성적, 문화적 측면에서도 자아의 완전한 제거를 요구한다. 

물질적 교정을 위해서도 영적 이해가 필수적이다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단순하게 식량의 문제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유일한 목표로  물질적 안정의 확보만을 추구한다 하여도, 올바른 ‘영적 이해'(Spiritual Understanding)가 필이 있어야만이 이 한정된 목표의 시도에 성공할 수 있을것이다.  사리사욕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대체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계획적이고 협조적인 경제활동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대중이) 깨달아야 만이 무난한 경제적 교정이 가능해진다. -> 무난한 경제적 교정이 가능하려면, 우선 ‘사리사욕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대체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계획적이고 협조적인 경제활동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대중들이) 깨달아야 만 한다.  사람들이(대중이) 이 사실을 깨닫지 않고서는,  “물질적 영역”(Material spheres)의 그 아무리 최첨단 장비와 최고의 효율을 갖춘다 하여도 결코 결핍과 분쟁을(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과학의 올바른 자리

현재의 고난과 역경에서 떠오를 ‘신인류'(New Humanity)는 과학과 그것의 실용적인 성과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을 반-영적(Anti-Spiritual)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수다.  과학은 용도에 따라 영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장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이 영성(Spirituality)을 표현 하듯이, 과학도 마찬가지로 올바르게만 다루어 진다면 혼령(spirit)의 표현이 되고 충족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육신과  ‘물질 세계'(Gross World) 속에서의 그 육신의 생애에 관한 과학적 진실들은, 영혼이 스스로를 아는 데에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더 광범위한 ‘영적 이해'(Spiritual Understanding)에 올바르게 접목되어야만 한다. 올바른 영적 이해에는, 참되고 영구적인 가치들에 대한 꾸준한 자각이 수반된다.  이러한 영적 이해가 없으면  과학적 진보와 성취들은 오히려 상호 파괴적인 용도로 사용 되기 쉬우며, 영혼을 묶는 사슬을 강화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쉽다. 인류의 다방면적인 진보를 보장하기(이루기) 위해서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손잡고 나란히 진행되어야만 한다.   

 영적 체험의 필요성

다가올 ‘신인류'(New Humanity)의 문명은 메마른 지적(이성적) 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 숨쉬는 “영적 체험”(Spiritual Experience)에 의해 가득 채워질 것이다. -> 다가올 ‘신인류'(New Humanity)의 문명은 메마른 지적(이성적) 교리가 아닌, 살아 숨쉬는 “영적 체험”(Spiritual Experience)에 의해 혼들릴(ensouled) 것이다.  영적 체험(Spiritual Experience)은 단순한(mere) 지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더 깊은 진실들을 붙잡고/붙들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지원 없이) 지성으로만 탄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종 지성을 통해 영적 진실(Spiritual Truth)을  언급(진술)하거나 표현할 순 있다.  그리고 영적 체험을 상통하는 대에 지성이 어느정도 도움이 되긴한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 지성은 영적 체험을 가져오기에 불충분하며, 영적체험의 전달(상통)에도 불충분하다.  두 사람이 두통을 앓아본 경우, 그들은 지성의 기능을 활용하여 상당히 미비한 부분까지 협조적으로 검토하여 두통의 체험을 서로 논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통을 안 겪어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아무리 지적 설명을 하여도 두통의 정의를 이해시킬 순 없을 것이다.  지적 설명은 결코 영적 체험을 대체할 수 없다; 지성은 영적 체험을 받기 위한 준비과정 이상은 안된다.

영적 체험의 본성과 자리

영적 체험에는 지성이 헤아릴 수 있는 범위의 그 이상이 수반된다.  주로 이점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신비주의적 체험(Mystical Experience)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종종 신비주의(Mysticism)는 반-지적인 것으로, 혼란스럽고 모호한 것으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실질적으로 체험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신비주의(Mysticism)는 그렇지 않다. 진정한 신비주의는 실재(Reality)의 비전이며, 실재의 비젼이어야 하며, 그러한 만큼 이것에는 조금도 비합리적인 부분이 없다. 이것은 완전하게 명백한 지각이며, 너무도 실용적이어서 생활의 매 순간마다 실현될 수 있을 뿐아니라, 의무들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늘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신비주의와 체험의 관계는 너무도 깊기에, 어떤 면에서 모든 체험의 최종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체험이 신비주의적 이라 해서 이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혹은 인간의식을 벗어 난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실수다.   ‘신비주의적’ 이라는 말의 의미는, 한정된 인간의 지성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지성이 자체의 한계를 초월하여 직접적인 무한함의 깨달음으로 계몽될 때까지는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는 영적 체험으로 향하는 길을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이말의 뜻은, 인간은 인간의 한계들을 버리고 ‘신의 무한한 삶'(infinite life of God)속에 자리를 잡아야(확립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영적 체험에는 영혼이 깨우쳐 더 높은 경지로 오르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이것에는 주어진 세속적 의무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도 수반된다.  만일 이것이 일상생활의 여러 방면들과 영관성을 잃는다면, 영적 체험과는 거리가먼 신경과민(Neurotic) 증상 밖엔 아니될 것이다. 

영적 체험은 현실도피가 아니다

신인류에 힘이 되고 활력을 불어넣을 영적 체험은, 현실생활의 곤란하고 피치 못할 요구들에 대한 반응일 순 없다. -> 신인류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힘이될 영적 체험은 삶의 엄격하고 피치 못할 요구들에 대한 반응에서 초래될 순 없다.  삶의 흐름에 적응할 능력이 안되는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은신처로 환상의 요새를 창조하여 현실을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  -> 삶의 흐름에 적응할 능력이 안되는 이들은 현실을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은신처로 환상의 요새를 창조한다.

이러한 반응은 삶의 요구들로부터 자신의 ‘분리된 존재성'(Separate Existence)을 보호함으로서, 이것을 영속시키려는 시도다. 이러한 반응은  헛된 안정감과 헛된 자기-완성감을 장만(마련)하여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헛된-해결책(pseudo-solution)이다.  이러한 반응은 결코 영속적이며 실제적인 해결책을 향한 진보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진리의 길”(true Path)에서 벗어나는 행위다.  인간은  자기가 창조한 환상의 요새들로부터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새롭고 저항불가한 삶의 파도들에 의해 )거듭 밀려나게 될 것이며, 탈피를 통해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을 보호라려는 그의 시도들은 온갖 새로운 형태의 고난만을 초래할 것이다. 

신인류는 외형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탈피를 통해 자신의 ‘분리적 체험'(Separative experience)에 매달릴 수 있듯이, 그는 어떤 형식, 격식, 의식, 사회적 관습, 또는 전통과 자신의 신분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 함으로서 이것에 매달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형식, 의식, 전통, 관습은  ‘무한한 삶'(Infinite life)의 발현을 속박하는 역할을 한다. 만일 이것들이 ‘무제한적 삶'(Unlimited life)의 표현에 있어 유익한 수단이었다면, 지구상의 ‘신성적 삶'(divine life)을 충족키기 위한 (장애물 대신에)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들은 (겉으로 들어내는 것과는 달리(독립적으로)) 오히려 자체의 명분으로 명성과 권리를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이들에 대한 집착(애착)은, 결국 삶의 급격한 축소와 제한됨으로 빡에는 이어질 수 없다.   신인류(New Humanity)는, ‘제한적 삶'(Life of limitations)으로부터 석방되어, 혼령의 창조적 삶이 방해없이 펼쳐질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외적 형태들에 대한 집착을 부술 것이며, 이것들을  ‘혼령의 명'(claims of the spirit)에 종속시키는 길을 배울 것이다. 이 때, 한정된 환상의 삶과 이것의 헛된 가치관들은 제한 없는 진실(Truth)의 삶으로 대체될 것이며, ‘분리적 자아’를 유지시켜주는 한정성들(limitations)은 “진정한 이해”의 손길이 닿는 순간 소멸 되고 말 것이다.

편협된 집단(Narrow Group)과의 동질감(identification)은 “한정된 자아”의 한 형태다
편파적 집단(Narrow Group)과 자신의 신분을 동일시하는 것도 일종의 한정된 자아다

사람이 현실탈피 또는 “외형적 형태들”(External forms)과의 동질감을 통해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Separative existence)에 매달리려고 할 수 있듯이, 그는 어떤 편퍼적인 사회적 계급이나, 종교, 종파, 또는 성적 부류와의 동질감(identification)을 통해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에 매달리려고 할 수도 있다.  이때, 그 개인은 더 큰 조직과의 동질감을 통해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을 잃은 듯 하다.  그러나 사실상 많은 경우 그는 이러한 편파적(편협적)인 집단과의 동질감을 통해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동질감은 다른 계급, 국적, 교리, 종파, 종교, 또는 성(sex)에 소속되어있는 사람들과의 차별을 그가 은근히 즐길 수 있도록 하여준다.

한정된 자아는 반대들(opposites)을 통해 유지된다.

분리적 존재성은, 반대되는 두 요소 중 한쪽과 자신을 동일시(identification)하여, 반대 되는 요소와의 대조를 통해 자체의 분리적 존재성을 얻으며 강화한다.  사람은 대조되는 두 이데올로기로 중 한 쪽과의 동질감을 통해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을 보호하려 할 수 있다;  혹은  그가 생각하는 악과 대조되는 선의 개념과 자신의 신분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을 보호하려 할 수 있다.  이러한 편파적인 집단 또는 한정된 이데올로기와의 동질감(identification)은 결코, “분리적 자아”(Separative self)의 진정한 융해를 가져오지 않는다. — 그저 그러한 듯한 외관적인 모습밖엔 가져오지 않는다.  유니버설 삶의 바닷속으로 “분리적 자아”(Separative self)가 진정으로 융해되려면, 모든 형태의 분리적 존재성이 다 완전하게 포기되어야만 한다. ->유니버설 삶의 바닷속으로 “분리적 자아”(Separative self)가 실제적으로 융해되려면, 모든 형태의 분리적 존재성의 완전한 포기가 전재된다.

 미래에 대한 희망

인류의 대부분은 분리적 경향과 자기주장적인 경향의 족쇄에 얽매여있다. 인류를 얽매고 있는 이 족쇄들의 광경에 현혹된 이들은, 미래에 대한 해답없는 절망감에 빠질 수밖없다. 현제 인류가 처한 곤경을 올바른 시각으로 보려면, 오늘 날의 현실을 더 깊숙이 들여다 보아야만 한다.  신인류의 실질적인 가능성들은, 세계 상황의 표면만을 관찰하는 이들에게는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들은 실제로 존재하며,  그들은 영적 이해의 불씨만 있어도 전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육욕(lust), 증오(hate),  탐욕(greed)의 세력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혼란을 낳는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좋은 면이 있다면, 아무리 파괴적 힘들의 한복판에 있어도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가슴에는) 사랑이 반드시 조금이라도 남는다는것이다.

사랑은 한정들(limitations)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전쟁 마저도 협조적 기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적 기능”의 범위는, 한정된 집단 또는 한정된 이상과의 동질감을 통해 인위적으로 제한된다. 전쟁도 많은 경우에 어떤 사랑의 형태로 유지된다; 하지만, 이 사랑은 올바르게 이해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제대로 그 자체를 발휘하기 위해선,  무제한적(unlimited)이어야만 하고 자유로워야(untrammeled)만 한다. 인간 삶의 모든 단계에 사랑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잠재 되어 있거나 한정되어 있으며, 개인적 야심, 인종적 우월감, 편협된 충성심, 적대심(승부욕), 애국심 등에 의해 독 들어 있으며, 성욕, 계급, 교리, 종파 등에 대한 애착심(집착)에 독 들어 있다.  인류의 부활이 있으려면 (새로운 사랑이 그 안에 싹틀 수 있도록) 인간가슴의 문이  열어야만 한다—부패를 모르는 사랑, 개인적인 탐욕, 집단적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이 싹틀 수 있도록…. 

사랑은 자체-전달적/소통적(self-communicative) 이다.

신인류는 무한량 사랑의 석방을 통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석방은 마스터(완벽한 스승)들이 가져오는 ‘영적 계몽'(spiritual awakening)을 통해 올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의지로 (또는 결심으로) 낳을(창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로는 아무리 해도 의무감 이상은 안된다.  분투와 노력을 통해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스스로의 외형적 행위를 억지로 맞출 순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자발적으로 솟아오르는 사랑의 내적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에) 영적으로 공허하다.  사랑은 안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솟아나와야만 한다; 사랑은 그 어떤 형태의 외적 강요(force)에도, 내적 강요(force)에도 순응하지 않는다. 사랑과 강요/강제성(coercion)는 절대로 공존하지 못한다;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할 순 없으나, 사랑 그 자체로는 일깨워줄 순 있다. 사랑은 자체-전달/소통적(Self-communicative)이다; 지니지 못한 이들은 지닌 이로부터 전염(catch) 받는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이들은,  사랑의 본질 그 자체인 반응을 (내)주지 않고서는, 그 사랑의 수취인이라 할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은 정복불가하며, 저항불가하다.  결국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번화시킬 때 까지 사랑은 계속해서 세력을 모아가며 자체를 확산시켜 간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구속 없이 자유롭게 주고받는 순수한 사랑을 통해 인류는 새로은 형태의 삶과  존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신성한 사랑(Divine Love)을 통한 인류의 구원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일체의 만인과 만물을 포함하는 ‘신성의 우주적 삶'(universal divine life) 보다 더 위대한 클레임(주장)은 없다;  이 사실이 인정될 때, 사랑은 사회적, 국가적, 국제적 영역에 평화, 조화, 행복을 확립시킬 것이다; 그 뿐아니라, 사랑은 자체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을 밝게 빛낼 것이다. 신성한 사랑은 이원성(duality)의 맹격에 난공불락하며, 신성함(divinity) 그 자체의 표현이다.  바로 이 신성한 사랑을 통해서 신인류(New Humanity)가 신성적 계획(Divine Plan)과 주파수를 맞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성적 사랑은 시들지 않는 감미로움과 무한한 지복(bliss)을 개인적 삶에(개인생활) 가져올 것이며, 신인류의 새시대가 열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신성적 사랑을 통해 신인류는 협력적이고 조화로운 삶의 예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신인류는  허례허식 (虛禮虛飾)(죽은 형식dead forms)의 압도(힁포/폭압)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영적 지혜의 창조적인 삶을 석방시킬 것이다; 신인류는 모든 환상을 버리고 진실(Truth) 속에 확립될 것며; 평화를 즐기고 지속적인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신인류는 영원함의 삶(Life of Eternity) 속에 개시(initiated)될 것이다.

메허 바바의 유니버설 메시지

“Meher Baba’s Universal Message”:
메허바바의 만유적 메시지 /우주적 메시지/ 유니버설 메시지

I have come not to teach but to awaken. Understand therefore that I lay down no precepts.

나는 가르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깨우기 위해서 왔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계율(Precepts)도 주지 않는 다는 것을 이해하라.

Throughout eternity I have laid down principles and precepts, but mankind has ignored them. Man’s inability to live God’s words makes the Avatar’s teaching a mockery. Instead of practicing the compassion he taught, man has waged crusades in his name. Instead of living the humility, purity and truth of his words, man has given way to hatred, greed and violence.

영원을 거쳐 나는 여러 원칙과 계율들을 주어왔지만 인류는 그것들을 무시하였다.  인간이 신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화신(아바타)의 가르침을 조롱거리로 만든다.  그가 가르치는 자비심을 실천하는 대신에 신의 이름으로 인간은 온갖 영적전쟁(crusades)만을 벌려왔다.   그의 말씀에 담긴 겸허함, 순수함 그리고 진실 대신에 인간은 증오심, 탐욕, 그리고 폭력의 길을 밟아왔다.

Because man has been deaf to the principles and precepts laid down by God in the past, in this present Avataric form I observe silence. You have asked for and been given enough words — it is now time to live them. To get nearer and nearer to God you have to get further and further away from I, “my,” “me” and “mine.” You have not to renounce anything but your own self. It is as simple as that, though found to be almost impossible. It is possible for you to renounce your limited self by my grace. I have come to release that grace.

과거에 신이 내려놓으신 원칙과 계율들을 인간이 무시하였기에, 이번 아바타적 형상(Avataric form)에 있어 나는 침묵을 지킨다.  그대들은 많은 말씀(가르침)을 요구하였으며 많은 말씀(가르침)을 받았다 — 이제는 그 가르침대로 살때가 왔다.  신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선 우선  ‘나’, ‘내’ ‘나의’, 그리고 ‘내것’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한다. 그대가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자아일 뿐이다.  말 그대로 너무나 간단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찾게 된다.  그대가 스스로의 한정된 자아를 단념하는 것은 나의 은총(grace)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나는 이 은총을 배풀러 {이 세상에} 왔다.

I repeat, I lay down no precepts. When I release the tide of Truth which I have come to give, men’s daily lives will be the living precept. The words I have not spoken will come to life in them.

다시한번 말한다; 나는 그 어떠한 계율도 내려놓지 않는다.  나는 진실의 밀물을 풀어주러 왔으며, 내가 그 진실(Truth)의 밀물 풀어 줄때 인간의 하루 하루 사생활은 살아 숨쉬는 계율이 될 것이다.  내가 발언도 하지 않았던 말씀들은 인간의 생활(인생)속에서 살아 숨쉬게 될 것이다.

I veil myself from man by his own curtain of ignorance, and manifest my glory to a few. My present Avataric form is the last incarnation of this cycle of time, hence my manifestation will be the greatest

나는 인간 스스로의 무지를 커튼으로 내 자신을 감춘(veil)다; 그리고 소수에게만 나의 영광을발현한다. 나의 요번 아바타적 형상은 이 주기의 마지막 화신이다; 따라서 나의 발현도 가장 위대할것이다. 
When I break my silence, the impact of my love will be universal and all life in creation will know, feel and receive of it. It will help every individual to break himself free from his own bondage in his own way. I am the Divine Beloved who loves you more than you can ever love yourself. The breaking of my silence will help you to help yourself in knowing your real Self.

내가 침묵을 깨트릴 때, 내 사랑의 여파는 만유적일 것이며 온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은 그 사랑의 여파를 알고 느끼고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의 여파는 일체 모든 개체들로하여금 나름대로의 방법대로 스스로의 자신을 속박으로부터 석방시키는 대에 있어 도움이 될것이다. 바로 내가 그대를 그대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그대의 신성적 비러벳(Divine Beloved)이다.  나의 침묵의 깨트림은 그대의 진정한 참나(real Self)를  그대가 스스로 알수 있도록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All this world confusion and chaos was inevitable and no one is to blame. What had to happen has happened; and what has to happen will happen. There was and is no way out except through my coming in your midst. I had to come, and I have come. I am the Ancient One.

이 세상의 온갖 혼란과 혼돈은 불가피하였으며{필현적이었으며}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일어나야할 일들은 다 일어났으며; 앞으로 일어나야할 일들도 다 일어날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내가 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과거에도 지금도) 탈출은 언제도 없다.  나는 왔어야만 했으며, 왔다.  나는 고대의 그이다.  / 내가 바로 고대의 그이다.

로드 메허 444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