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10 폭력과 비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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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비폭력

단어 뒤에

인간은 흥행하는 표어들(catch-words)에 달라붙어 이 단어들에 담긴 살아있는 지각(living perception)을 직접적으로 자신의 행동과 연관시켜보지도 않은채 (이 단어들에 의해) 거의 기계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결정되도록 허용하는 경향이 있다. 삶에 있어서 단어(말)들은 삶에 있어 그들이 할 몫과 용도가 있다; 그러나 행동이 현명해지려면, 이 단어(말)들이 전하려는 뜻에 대한 조심스러운 분석과 고정은 절대-필수적이다. 이러한 탐구가 필수적인 단어들 중에 “폭력” 과 “비폭력” 만큼 중요한 단어는 많지 않다.  이 단어들은 이념(ideologies)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뿐 아니라 삶 전체의 방침(tenor)을 좌우한다.

영적 이해는 공식을 넘어선다/초월한다

영적 삶은 지각(perception)의 문제이지, 규칙들의 기계적인 순응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아무리 높은 가치관을 옹호하는 규칙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이 지각에는 모든 단어나 공식을 초월하는 이해가 암시된다. 모든 단어와 공식은 진실(Truth)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식들의 근원에 있는 참뜻을 드러내려는 이들은 많은 경우 공식화된 원칙의 탐구적 분석에 나서게 되며, 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구체적인 예들을 활용하여 그 분석을 계속해서 보충하게 된다. 반대되는 ‘폭력’과 ‘비-폭력’의 두 개념을 통해 공식화된 ‘전반적인 적용 원칙'(guiding principles)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해당된다.

 대표적인 상황을 시점으로

‘폭력’ 과 ‘비-폭력’, 이 두 단어는, (일반적으로 언급될 때) 현실의 하도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설일지라도 완전 하려면, 그 다양한 상황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상황들을 해설의 시점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설의 완전성을 위해 이 두 단어에 해당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숫자상으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고려할 필요는 없다. 가장 대표적인 상황들만 고려하여도 충분하다. 아래에 언급될 대표적인 상황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근본적 가치들을 충분히 비출 수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들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

제1번 상황: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판에, 주변에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그 사람을 구조해주려 한다고 하자. 물에 빠진 사람은 구조하러 온 사람을 필사적으로 붙드는 경향이 있어서, 구조가 힘들어질 뿐 아니라, 잘못 잡히면 구조자 까지 같이 익사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구조하러 온 사람이 빠진 사람의 머리를 강하게 쳐 기절시킨 후 구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를 치는 것을 ‘폭력’ 혹은 ‘비-폭력’으로 볼 수 없다.

수술의 경우

제2번 상황: 수술을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는 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또는 타인으로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외과 의사가 감염된 부위를 제거해야(잘라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칼로 몸을 자르는 행위 역시 ‘폭력’ 혹은 ‘비-폭력’으로 볼 수 없다.

침략국의 경우

제3번 상황: 만일 이기적인 동기로 공격적인 국가가 약한 구가를 침략하는데, 다른 어떤 국가가 약한 국가를 구조하겠다는 고결한 영감을 유일한 의도로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에 나섰다고 하자.  이러한 약한 구가의 방어를 위한 싸움을 ‘폭력’이라고 또는 ‘비-폭력’이라고도 불 수 없다; 대신 ‘비-폭력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광견의 경우

제4번 상황: 만일 주변에 날뛰는 광견이 있어서 국민학생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학교 선생들이 광견을 죽였다고 하자. 이 광견의 사살은 ‘폭력’을 의미하지만, 그 안에 분노는 없다.

강자의 비-폭력

제5번 상황: 만일 신체적으로 강인한 사람에게, 더 약한 체격의 거만한 사람이 얼굴에 침까지 뱉어가면서 모독을 하였는데, 거만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대도 불구하고 강인한 사람이 참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게 사랑의 복음을 설명했다고 하자.  이런 행동은 ‘비-폭력’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강자의 비-폭력’이다.

섬세한 고려의 필요성

위의 첫 세 상황들은 그 상황이 폭력 또는 비-폭력을 의미하는지의 여부를 여러 미묘하고 섬세한 점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해답하기 힘들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이 고려할 사항들은: (1) 상황의 다양한 세부적인 내용들과 (2) 행위를 하게 된 동기다.  마지막 두 상황은 폭력과 비-폭력이 암시되는 경우에도 그 상황의 특정한 요인들에 의해, “폭력” 또는 “비-폭력”, 이 두 단어들에 일반적으로 부합되는 의미를 초월하는 경우를 보여준다.

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1번 상황의 {좀더} 세부적인 분석은, 비록 피해자의 사전 동의가 없는 무력/폭력의 사용이지만, 빠진 사람을 살리려는 좋은 의도를 볼 수 있다.  그 사람의 동의 없이 그 사람에게 폭력을 적용(사용)하는 것은 폭력의 행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폭력의 행사는 빠진 사람에게 부상이나 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아닌 그 사람을 위한 좋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폭력의 행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별한 경우 상황에 폭력과 비-폭력이 둘다 제각기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일반적인 해석의 ‘폭력’과 ‘비폭력’이 적용 됐다고는 볼 수 없다.

외가 수술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2번 상황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여기서도 (신체를 자르는) 무력/폭력(force)의 적용이 있다; 이것은 환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수술에 대한 환자의 사전 동의가 있다.  더불어, 수술은 병으로부터 환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을뿐 아니라, 병의 전염으로부터 타인들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 무력의 적용(행사)은 환자뿐 아니라 그와 접촉할 수 있는 많은 타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섞임-없는 좋은 동기에서 솟아난 것이다.  전혀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적용된 무력은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을 철저하게 비-폭력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것은 살아있는 신체의 일 부를 분명히 절단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침략적인 구가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3번 상황도 상당히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이 교전(fighting)은, 어떠한 개인적 이익이나 이기적인 동기 없이 단지 약한 국가를 방어하려는 목표로 침략에 저항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무력의 행사는 침략국에게 상당한 손상을 입힐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 국가의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러한 무력의 행사는 상대의 사전 동의도 없을 뿐 아니라, 상대의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의도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상황도 분명한 폭력의 경우가 아니다.

Even in this situation we do not have a clear case of violence.

관련된 손상과 상해를 불구하고, 이러한 무력의 적용은, 피해자인, 약한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의미로 침략국 그 자체를 위함이며, 그 이유는 자체의 공격에 대한 저항을 통해 침략국이, 약한 구가들을 침략하고 착취하려는 자체의 영적 약점 또는 영적 질병에서 서서히 완치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력은 실제적으로 폭력이 아니어서,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비-폭력적 폭력이라고 한다.

침략적인 국가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침략국을 대항하는 전쟁(교전)의 경우는 감염된 부분을 수술하는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침략국을 대항하는 전쟁의 경우에는, 약한 국가를 위한 것이 일차적인 결과로 보이며, (무력의 적용으로 대응한) 침략국을 위한 것이 이차적인 결과로 보인다.  수술의 경우에는, (무력의 수취자인) 환자를 위하는 것이 일차적 결과로 그리고 타인들을 위하는 것이 이차적인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미비한 혜택의 차이일 뿐이며, 두 상황들을 좀더 주지하여 분석하고 비교하여보면, 무력의 표적뿐만 아니라 상황에 관련된 여러 다른 사람들의 혜택을 동등하게 증진시킨다는 것이 인식된다.

약자의 방어는 사심 없는 봉사의 일종이다

약자의 방어는 중요한 형태의 사심 없는 봉사이며, 갈마-요가(Karmayoga)의 한 부분이다.  무력의 활용이, 만일 이러한 용도로 필수적이라면, 바라는 목표의 달성을 위한 절대적인 도구로 완전히 정당하다.  그러나 약자의 방어를 위하여 착수된 어떠한 투쟁(fighting)도, 진정한 영적 중요성을 지니려면, 일치의 어떠한 이기적인 동기도 또는 증오도 없어야만 한다.  이것은, 어떤 남성에게 비열한 의도의 공격을 당하고 있는 여성을 방어하여 여성의 명예와 생명을 방어하고 동시에 공격자를 처벌하며 뉘우치도록 하여 그를 수정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광견 그리고 강자의 비-폭력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4번 상황은 분명한 폭력의 경우지만, 증오가 없으며, 국민학생들을 광견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대의적인 좋은 의도가 있기에 정당하다. 거만한자에게 복수를 노리는 대신에 설교를 하였던 강인한 자의 경우는(제5번 상황), 비록 비-폭력을 의미하지만 비-행동적(inaction)이지는 않다. 이것은 무저항적이거나 또는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인한 것이며, 객관적인 근본(impersonal nature)의 참된 창조적인 행동이다. 이것은 강자의 비-폭력이다.

영적 이해가 규칙의 상류에 있기 위해서는 신성적 사랑이 필요하다

위의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비교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정의, 또는 이것들의 정당성, 또는 이것들의 진정한 가치 내지는 가치의 부족 등에 대한 여부는, 아무리 명확하게 진술된 형식을 갖춘 전반적인 규칙이어도, 그것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에는 많은 섬세한 영적 문제들과 함축들이 포함된다.  영적 가치관의 전체적인 윤곽 속에 폭력과 비-폭력의 지위(status)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으려면, 존재의 원인과 뜻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폭력 또는 비폭력에 대한 불충분하며 불완전한 사상들을 기반으로 하는 어떠한 구호들에 의해서도, (아무리 듣기에 높아도)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원성(duality)을 초월하는, 영적 이해가 담긴, 그리고 규칙들 보다 상류에 있는, 선성적 사랑(Divine Love)에서 자발적으로 나와야 하는 결과다.

담론 9 선과 악

 선과 악

상대들을 통한 체험의 분석-평가 

인간의 마음(mind)은 여러 체험들을 하고 있을 뿐아니라, 그 체험들을 끊임없이 분석-평가하고 있다.  어떤 체험들은 기분 좋게(agreeable) 간주하게 되고, 어떤 체험들은 기분 나쁘게(disagreeable) 간주하게 된다; 어떤 체험들은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어떤 체험들은 고난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체험은 즐겁게, 어떤 체험은 슬프게 받아들여진다; 어떤 체험은 생활을 제한하는 것으로, 어떤 체험은 자유와 충족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체험은 좋은 것으로, 어떤 체험은 나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바로 이것들이 특정한 관점에서 인생(삶)을 맞이할 때, 인간의 상상이 창출하는 반대들(opposites)이다.

‘용인 되는’ 과  ‘용납할 수 없는'(Acceptable and unacceptable)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수용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라는 인간의 개념은 그 순간에 가장 우세한 욕망의 본성에 따라 항상 변하고 진화해 간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어떤 종류건) 욕망이 있는 한, 그는 그 욕망과 관련하여 스스로의 체험을 두 부분으로 갈라 평가하게 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충족에 기여하기 때문에 ‘용인 되는 것'(acceptable)이고, 다른 하나는 충족을 방해하기 때문에 ‘용남할 수 없는 것'(unacceptable)이다.  인생과 인생이 가져오는 모든 것들을 아무런 기대감, 얽힘, 도피도 없이 맞이하는 대신, 마음은 일종의 기준을 형성하여 삶을 ‘수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부분과, ‘비-수용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부분으로 나눈다.

 선(good) 역시 욕망과 상관적이다(relative)

인간의 마음이 창조한 반대들(opposites) 중에 가장 영적으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의 구별이다.  이것은(선악의 구별은) 모든 욕망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기초한다./기반을 둔다. 욕망의 족쇄를 강화하는 체험들은 나쁜 것들이고, 제한적인 욕망들로부터 마음을 석방시키는 경향을 지닌 행동과 체험들은 좋은 것들이다.  좋은 체험이나 행동도 욕망과 상관적/연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도 나쁜 체험 및 행동과 다름 없이 속박적이다. 모든 속박이 진정으로 사라질 수 있으려면 모든 욕망들이 사라져야만 한다; 그럼으로, 진실한 자유는 ‘좋은’(선)과 ‘나쁜’(악)이 서로간에 균형/평형을 이루고, 하도 서로 융합되어 한정된 (욕망의) 자아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도록 될 때 이루어진다.

인간은 동물 산스카라로 시작한다

인간 의식이 완전히 발달 될 때, 우리는 나쁜 요소들이 이미 우세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하(sub-human)의 의식진화 단계들을 거치는 도중에 주로 육욕, 탐욕, 분노의 한정적 경향들이 우세하게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고-중심적(ego-centered) 경향들이 창출하고 유지해왔던 체험 및 행동들은 그들의 인상자국들(imprints)을 개발 중인 마음에 남긴 것이며, 마음은 이것들을 영화배우의 움직임이 필름에 기록{녹화}되 듯이 저장한 것이다.  그래서, 나쁘기 쉽고 선하기 힘든 것이다. 인간의식의 선조(先朝)인, 동물의 삶은 동물적 육욕, 동물적 탐욕, 동물적 분노를 토대로 대부분 결정된다; 물론 간혹가다 자기-희생, 사랑, 인내 등의 좋은 성품을 개발하는 동물의 경우도 없지않아 있다. 만일 모든 축적된 동물적 산스카라들이 다 나쁘고 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면, 인간의식에 나타나는 선한 경향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좋은 산스카라들의 필요성

동물의 산스카라들은, 일부 좋은 것도 있으나, 대부분 나쁜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의식은 처음에 주로 나쁜 경향의 추진력(propelling force)을 받는다. 인간 진화의 기원부터 해탈의 문제는 좋은 산스카라들을 양성하고 발전시켜 이미 축척된 산스카라들을 겹쳐 취소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좋은 산스카라들의 양성은, 동물 삶에 유력하던 체험과 행동들의 반대들을 육성함으로써 성취된다. 육욕의 반대는 사랑, 탐욕의 반대는 관용(generosity), 분노의 반대는 내성(tolerance)과 인내(patience)다.  사랑, 관용, 내성의 삶을 살려는 노력으로  인간은 육욕, 탐욕, 분노의 경향을 지울 수 있다.

성자와 죄인

따라서 산스카라들의 제약으로부터 자신을 석방하는 과정에는 일반적으로 선을 선호하여 악을 단념하는 과정이 동행 해야만 한다. 그러나 주어진 순간에 사람이 좋건, 나쁘건의 여부는 산스카라들의 거침없는/가차없는(inexorable) 작용에 의해 정해진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죄인과 성자는 우주가 돌아가는 법칙에 의해 죄인이되고 성자(saint)가 된 것이다.  그들은 둘 다 시작과 끝이 같다. 죄인은 영원한 타락의 오명을 쓸 필요 없으며, 성자는 스스로의 도덕적인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무리 성자다운 사람일지라도, 도덕적 실패의 삶을 거듭하지 않고 치 높은 선행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리 나쁜 죄인일지라도 개선하여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어느 누구나, 아무리 타락한 사람일지라도, 점차적으로 좋아지고 좋아져서 언젠가는 인류 최고의 모범자가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희망은 항상 있다; 그 누구도 완전하게 길을 잃은 사람은 없으며, 그 누구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신성으로 향하는 길이 선의 선호와 악의 단념을 통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한정된 자아는 선한 내지는 악한 산스카라들 속에 살 수 있다

선(善)의 점차적인 전개는(또는 펼쳐짐에는) 사랑, 베품, 평화가 그 뒤를 따른다. 이러한 선한 성품들의 발현(manifestation)을 통해 축적(예입)되는 좋은 산스카라들은 반대되는 육욕, 탐욕, 및 분노의 나쁜 산스카라들을 겹쳐 평형을 가져온다. 좋고 나쁜 산스카라들의 정확한 평형과 겹침이 이루어 지는 순간,  두 종류의 산스카라들은 모두 종결되고, 동시에 의식은 구속 상태에서 해방 상태로 스며든다. 장부를 마감할 수 있으려면, 차변과 대변이 서로 정확하게 맞아야만 한다.  그러나 주로, 차변이 더 크던지 대변이 더 커서 장부는 {할 수 없이} 계속해서 유지된다.   여기에서 주의하여야 할 사항은, 차변이 초과할 때뿐 아니라 대변이 초과할 때에도 장부는 계속해서 유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장부는, 오로지 양측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만 마감 할 수 있다. 산스카라의 영역(분야)에서 이런 균형은 매우 드문일이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시간에도 좋은 산스카라 아니면 나쁜 산스카라가 항상 유력하기 때문이다.  차변 아니면 대변의 과잉으로 장부의 마감이 지연 될 수 있듯이, 한정된 자아의 수명도, 나쁜 산스카라 내지는 좋은 산스카라의 과잉으로 지연 될 수 있다.  한정된 자아는, 나쁜 산스카라들을 통해서 뿐 아니라, 좋은 산스카라들을 통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한정된 자아가 최종적으로 전멸되기 위해서는, 좋은 산스카라와 나쁜 산스카라의 정확한 겹침 및 평형이 요구된다.

좋은 산스카라와 나쁜 산스카라의 겹침과 균형

좋은 산스카라와 나쁜 산스카라의 정확한 겹침과 평형을 이루는 문제는, 양측의 총액만 서로 맞추면 되는 단순한 수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만일 이 문제가 단순히 양측의 수량만 동등하게 맞추면 되는 문제 엿다면, 좋은 산스카라들의 맹목적인 축적 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나쁜 산스카라들의 축적이 느려진다거나 중단되면서, 동시에 좋은 산스카라들의 축적이 급속화 되면, 언젠가는 축적된 나쁜 산스카라들의 물량/수량을 좋은 산스카라들이 맞추어 평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의식의 석방(해방)을 이루기 위해서는, 좋은 산스카라와 나쁜 산스카라들이 서로 총량에 있어 평형을 이루어야 할 뿐아니라, 각각의 반대되는 요소들이 각자의 상대와 하나 하나 정확하게 겹쳐야만 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각각의  ‘의식의 중심점’(Centers of consciousness)이 맞이하는 문제는, 그 영혼이 축적한 다양한 산스카라들의 본질과 연관된 그 영혼만의 특정한 문제다.

선으로 애고의 이전(전환)

좋은 산스카라들의 축적이 존재하는 산스카라들의 특별한 구조와 무관하게 맹목적르로 진행 되다 보면, 한 방향으로는 좋은 산스카라이 과하게 축적과 동시에 나란히 다른 종류의 나쁜 산스카라들이 그대로 남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자기-고행(self-mortification) 혹은 엄격한 종류의 금욕(asceticism)을 통해 어떤 종류의 집착은 취소하면서, 이런 수행이 건드리지도 않는 다른 형태의 집착들은 그대로 남는 수가 있다. 갈망자는 건드리지도 않은 형태의 집착들은 그대로 무시하게 되기 쉬울 뿐아니라,  자기-고행(self-mortification)이나 금욕(asceticism)의 실천을 통해 생기게 된 산스카라들의 추진력에 영향받아 그 수행을 계속해서 더더욱 열심히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좋은 산스카라들은 과하게 충출되는 반면, 한정된 자아는 종료되지 않는다.  건드리지도 않은 종류의 집착들이 차후에 없어진다 하여도, 애고(ego)는 새롭게 창출된 이 좋은 산스카라들로 자체를 이전하여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산스카라들의 조정의 필요성/ 필수적인 산스카라들의 조정(adjustment)

영적-해탈(Emancipation)의 문제는 단순히 덕(virtue)만을 축적한다고 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에는 현명한 산스카라들의 조정이 요구된다. 각 의식의 중심점(centers for consciousness)은 ‘최후의 영적-해탈’(final Emancipation)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이 끌려가고 있다; 따라서 마음에는 (그 상황이 요구하는 영적조건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정반대 의 요소를 스스로에게 초대하는 본질적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갈망자의 현명하고 올바른 노력도 없이 스스로 알아서 독립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계적이거나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갈망자의 경우, 스스로의 절실한 필요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특정한 경우가 뭘 요구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직접적이고 실수 없는 통찰력을 지닌 유일한 분인) 스승(Master)의 실수 없는 도움을 받는 행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선(善)의 감옥

이제까지 우리는 좋은 산스카라들도 한정적 자아(limited self)가 머물러 생존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이다는 사실을 보았다. 사람이 스스로를 악하지 않은 선한 존재로 볼 때,  그는 그 확신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그 확신과의 자아-일체-의식을 통해) 자아-확인(self-affirmation)에 빠져 있는 것이며, 이것은 새로운 형태로 개별적 존재를 유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경우 애고(ego)가 건설한 이 새 집은 해체하기 더 힘들다; 이것은 ‘좋은’과 자아-일체-의식이 주로 ‘나쁜’과의 자아-일체-의식에 비해 더 완벽하기 때문이다. ‘나쁜’과의 자아-일체-의식은 좀더 다루기가 쉽다; 그 이유는, ‘나쁜’은 나쁘다고 여겨지자 마자, 의식을 좀더 느슨하게 움켜쥐기 때문이다. ‘좋은’은 ‘나쁜’과 대조적으로 호의를 받기 때문에 그럴사 한 자기-정당화가 따른다; 따라서 ‘좋은’ 의 움켜쥠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좀더 힘든 문제를 제시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갈망자는 그의 새로운 감옥-집에 실증을 느끼게 되며, 이 지각을 통해 그는 ‘좋은’과 ‘나쁜’의 이원성을 초월하여 자신의 ‘분리적 존재’(Separative existence)를 포기하게 된다. 

선(善)을 악(惡)과 비교한다면

애고(ego)는 악(惡)과의 자아-일체-의식에서 결국 선(善)과의 일체-의식으로 집을 옮기게 된다; 이것은 선과의 일체-의식이 더 자아-확장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멀지않아 갈망자는 이 새로운 거주지도 마찬가지로 제한적임을 인식(지각)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선’의 집을 벗어나는 과정이 악(惡)과의 자아-일체-의식을 지녔던 전집을 벗어나는 과정에 비해 덜 힘들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악(惡)의 거주지와 연관된 어려움은, 이것의 제한성을 재대로 지각하는 것이라기 보다, 이 지각에 도달한 후 그 집을 실질적으로 해체하는 문제다. 선(善)의 거주지와 연관된 어려움은, 이것의 해체보다는, 이것이 실질적으로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재대로 지각(인식)하는 문제다. 이 차이점의 원인은, 고대의 기원을 지녔으며 장기적으로 축적해온 동물 산스카라들이 더 뿌리 깊게 굳혀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선의 제한성을 재대로 지각한 후 선의 속박을 푸는 작업이 악보다 좀더 쉽긴 하지만) 선도 악만큼 속박적이라는 사실이다.  

산스카라들의 겹침에 대한 유추

애고(ego)는 나쁜 산스카라들을 통해서 생존한 다거나 좋은 산스카라들을 통해서, 또는 좋고 나쁜 산스카라들의 혼합을 통해서도 생존한다. 따라서 모든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의식의 해탈(emancipation)은, 좋은 산스카라들이 나쁜 산스카라들을 겹쳐 평형을 이루는 것; 또는, 어떤 나쁜 산스카라들이 좋은 산스카라들을 겹쳐 평형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어떤 좋은 산스카라들이 나쁜 산스카라들을 겹쳐 평형을 이루는 것이다.  더러운 접시를 닦을 때 식기세제로 접시를 덮은 후 물로 씻어낸다. 이것은 좋은 산스카라들로 나쁜 산스카라들을 겹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기름이 많이 묻은 접시를 닦을 때에는, 먼지로 덮은 뒤 물로 씻어내는 방법이 있다. 먼지는 기름기가 가장 없는 물질 중 하나로, 어떤 면에서, 기름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름이 굳은 접시에 먼지를 사용하면 더 쉽게 세척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산스카라들로 좋은 산스카라들을 겹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산스카라들로부터 자유로우며, 좋고 나쁨을 초월한다

좋고 나쁜 산스카라들이 서로 정확하게 겹쳐 평형을 이룰 때, 그들은 둘 다 사라지고, 아무것도 쓰여져 있지 않는, (그래서 아무런 왜곡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비출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의 거울{백지}만이 남는다.  영혼에는 그 무엇도 기록되지 않는다. 산스카라들은 마음에 기록되지 영혼에 기록되지 않는다. 영혼은 언제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한 거울이 되어야 만이 진실을 반사할 수 (비출 수) 있다.  좋고 나쁜 인상들이 둘 다 사라질 때, 마음은 영혼을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이 계몽(illuminaton)이다.  하지만 마음이 영혼을 보는 것은, 영혼이 스스로를 아는 것과 다르다; 영혼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마음을 초월하는 신(God), 즉 그분(Who)이다. 따라서, 마음이 여혼을 본 후에도, 영혼이 스스로를 진실(Truth)로 알려면 우선 마음이 영혼 속으로 합병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깨달음(Realization)이다.  이 상태에 들면, 모든 좋고 나쁜 산스카라들을 포함한 마음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이 상태는 마음을 초월한 상태다; 따라서 ‘좋고’ ‘나쁜’의 구별(분별/선별)을 넘어선다.  이 상태의 관점에서 볼 때, (무한한 사랑, 평화, 지복, 지식의 특성을 지닌) 나눌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 만이 있다. 선(善)과 악(惡) 사이에 계속되는 투쟁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이것은 둘다 없기 때문이며, 오로지 하나뿐인 포괄적이고 불가분한 신의 삶만이 실질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담론 8 산스카라들의 제거 3부

산스카라들의 제거

3부

산스카라들의 소멸(wiping out)

삳구루(Sadguru)로부터 받는 인상들은 인생을 전환시킨다

삳구루(Sadguru) 또는 완벽한 스승(Perfect Master)을 위한 사랑은 삳구루(Sadguru)와의 접촉을 초래하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하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갈망자는 다른 여러 과거의 산스카라들을 취소할 수 있는 특별한 효력을 지닌 인상들을 스승(Master)로부터 받게된다; 따라서 그의 인생 진로(tenor)는 완전히 전환된다. 이러한 인상들을 수취하는 사람은 오래동안 지녀왔던 사고방식과 생활의 습성을 전적으로 버리게 될 수 있다./등지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접촉은 가장 타락한 삶을 전환시켜 그 사람 인생의 음색을 향상시킨다.  세속적인 욕망들의 충족에만 신경을 쓰는 무모한 타락(dissipation)의 삶을 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권력욕과 소유욕에 빠져 돈벌어 모으는 것과 노는 것 밖엔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탈에 대해선 아무리 해도 상상도 못할 사람일 지라도, 오래동안 지녀왔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영원히 막을 내리고, 그 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더 높고 더 자유로운 삶의 전망을 펼칠 수 있는 효력을, 삳구루(Sadguru)와의 접촉을 통해 그가 받은 산스카라들이 충분히 지녔음을 체험하게 될 수 있다. 삳구루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상들은 (아무리 교양있어도 시각이 국한된 지식인, 아무리 동원해도 상상력이 예술과 문학의 아름다움 이 상은 감상할 수 없는, 이타심이 소속된 지역이나 국가의 태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식인에게도 동등하게 유익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일지라도, 삳구루(Sadguru)로부터 인상들을 받는 순간, 보다 높은 삶의 방식으로 들어 올려질 것이다.

삳구루의 개입을 통한 모든 산스카라들의 전멸

삳구루(Sadguru)는 갈망자의 의식을 일반적인 이성의 의식적 수준에서, 영감(inspiration)과 직관(intuition)의 의식적 수준으로, 더 나아가 통찰(insight)의 의식적 수준으로,  내지는 무한함과의 합병으로 절정에 도돌하는 계몽(illumination)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 갈망자의 영적향상은, 일상적인 영역(mundane sphere)에서 기적 영역(subtle sphere)으로, 기적 영역에서 정신적 영역(mental sphere)으로, 그리고 결국 정신적 영역에서 해방(해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의 진보와 일치한다.  이 마지막 단계는 일체 모든 산스카라들의 완전한 전멸을 의미한다 –즉, 자연적이건 비자연적인, 긍정적이건 부정적인 모든 산스카라의 완전한 전멸을 의미한다.  막대기에 감는 실의 예에 비유하면, 산스카라들의 전멸과정은 실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다. 모든 환상의 속박으로부터의 의식의 최종적 석방을 암시하는 모든 산스카라들의 삭제는 오로지 삳구루(Sadguru)의 은총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완전한 자기-항복(self-surrender)의 필요성

그러나 이런 삳구루(Sadguru)의 적극적인 개입에는 삳구루와 갈망자 사이의 거리낌 없는 관계가 전제된다; 이러한 관계가 설립 되려면, 수도자가 삳구루에게 자신을 완전히 항복하는 대에 성공해야만 한다. -> 이러한 관계가 설립 되려면, 삳구루에게 바치는 완전한 자기-항복에 수도자가 성공을 이루어야만 한다. 자기-항복에는 스승의 모든 명령에 대한 복종이 암시된다. -> 자기-항복은 스승의 모든 명령에 대한 복종을 뜻한다.  그대의 모든 욕망과 행동이 삳구루의 지도하에 그의 명령에 복종한 결과물 이라면, 그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도 그의 몫이다. 따라서 자기-항복이 철저해 질 때,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에 대한 그대의 책임은 스승에게로 넘어가게 되며, 스승은 이 새로운 조건을 전제로 그대의 모든 산스카라들을 멀지 않아 전멸시킨다.

지적 복종

완전한 자기-포기에 암시되는 스승 한태의 복종에는 두 가지가 있다: (1)지적(intellectual) (2)엄밀한(literal) 두 가지 복종 중 지적 복종이 먼저 오고, 이것을 전제로 더 영양가치가 높은 엄밀한 복종이 따른다. 스승(Master)의 완벽함과 위대함에 대한 지적인 확신이 있다면, 그대는 스승을 사랑할 것이며 존경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 대한 엄밀한 복종은 못한다. 그대 신념의 기본이 이성(reason)이 다보니, 스승( 및 그의 명령)에 대한 그대의 이해와 그대의 이성을 따로 분리하지 못하게 된다.  이 둘은 불가분하게 서로 역겨 있기 때문에, 그대의 이성적인 신앙(reasoned faith)은 지적 복종의 범위를(한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대를 붓든다. 스승(Master)은 이 단계의 제자를  별로 건드리지 않고 내비두며, 제자는 스승이 권하는 모든 복종의 알약들을 그의 입맛과 구경에 맞는지 일단 합리화한 후에에만 먹는다.

엄밀한 복종

스승의 명령과 그 명령의 실천에 대한 그대의 합리적인 해석이 만일 진심어리다면, 스승(Master)에 대한 지적인 복종을 통해 그대는 그대의 모든 산스카라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복종이 만일 엄밀하다면 훨신 더 급속도로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엄밀한 복종은  그의 인간적 매력을 통해 스승(Master)이 제자에게 주는 영감에서 비롯되는 돌 같은 신앙과 깊은 사랑의 결과물이다. 넘치게 빛나는 스승의 후광(Halo), 그의 찬란한 순도와 자비심은, 제자의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초래하는 주된 원인이다; 이 신앙은, 자신의 평가적인 소신/비판적 사고(critical spirit)와 무관하게 스승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 있도록 제자를 준비시켜 준다. 이런 엄밀한 복종은 명령의 실제적인 의미에 대한 제자의 지능적 이해도 요구되지 않는다; 이러한 복종은 그대가 염원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종류의 복종이다. 이러한 아무 의문도 없는 맹목적인 복종을 통해 그대의 욕망과 산스카라들의 뒤틀린 매듭들은 모두 올바르게 펴진다.  바로 이러한 복종을 통해서 스승(Master)과 제자 사이에 깊은 연결(link)이  조성되는 것이며, 이 깊은 연결은 영적 지혜와 파워가 제자에게 지속적으로 방해 없이 흐를 수 있도록 해준다. ->   영적 지혜와 파워가 제자에게 지속적으로 방해 없이 흐를 수 있게 해주는 깊은 연결(link)이 스승(Master)과 제자 사이에 조성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복종을 통해서다.  이 단계에서 제자는 스승의 영적 아들이 된것이며, 그는 때가 되면 모든 개인주의적 및 산스카라적 얽힘들로부터 해방된다. 그 후 그도 스승(Master)이 된다.

삳구루의 역할

삳구루 또는 완벽한 스승(Perfect Master)은 독특한 지위와 권력(power)을 지닌다. 서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영적으로 진보되어 영적 경로(spiritual Path)에  올라선 영혼들은 이 세상에 많이 있다; 그러나 여섯 단계의 의식의 내면적 영역들을 모두 거쳐  존재, 지식, 지복의 무한한 원천에 도달한 영혼은 드물다.  삳구루는 무한함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의식적 경지를 체험하였을 뿐 아니라, 실질로 모든 영혼의 존재 자체에 스며들어 있다. 그는 우주 만-현상의 주축이다. -> 그는 우주의 모든 현상의 중심축이다.   어떤 면에서, 그대의 모든 생각과 행동, 기쁨과 슬픔, 안달과 복달, 강인함과 약함, 소유물과 항복(surrenderance), 사랑과 열망은, 모두 그의 덕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존재의 전체를 만연/편재(蔓延)할 뿐 아니라, 우주의 인과 법칙 및 모든 개별적 영혼의 복잡한 산스카라적 작용들을 의식적으로 통달/간파/정통한다. 그는 천체적 대변이나 우주적 변동의 원인을 알듯이, 개인의 행복함과 고통, 및 미덕과 악덕의 원인도 안다. 모든 존재는 무한한 탐조등(searchlight)을 지닌 그의 편제한 의식(omnipresent consciousness)에게  열린 책이나 다름없다. -> 모든 존재는 그의 편제한 의식(omnipresent consciousness)이 지닌 무한한 탐조등(searchlight)에게  열린 책이다. 무한함과 합병 되었기 때문에 그는 무한한 파워를 부여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영혼의 모든 산스카라들을 전멸시켜 모든 속박과 엵힘으로부터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담론 7 산스카라의 제거 2부

산스카라들의 제거

2부

산스카라들의 분산과 탈진 

(dispersion & exhaustion)

제어(control)를 통해 얻는 산스카라들의 무효화

전장에서 나는 (천지가 창조된 원인인) 자아-계몽을 방지하며 진실을 의식으로부터 가리는 산스카라들을 제거하는 방법중 긍정적인 산스카라들의 무효화를 기본 원칙으로 삼는 방법들을 설명하였다.  긍정적 산스카라들을 무효화하는 이러한 모든 방법들은 결국 몸과 마음의 제어를 기반 한다. 마음의 습관적 경향의 제어는 신체적 행동의 제어보다 월등히 힘들다. 어느덧 스치고 지나가거나 잘 잡히지 않는 마음의 생각 및 욕망들은 강한 인내와 지속적인 연습으로만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작용과 반응의 억제(restraint)는 오래된 산스카라들을 풀고 마모하기 위해서, 그들의 표현인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형성을 막기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초기에는 제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진심으로 노력하다보면 점차적으로 자연스러워지고 이루기 쉬워진다.

산스카라들의 제거를 통해 마음이 스스로를 비-제약화(decondition)하려는 동안 제어는 고의적이어야하며 필이 노력이 수반된다; 그러나 산스카라들의 영향으로부터 마음이 석방되면, (이제는 마음이 이해와 자유속에 기능하기 때문에) 제어는 자발적이 된다.  이러한 제어는 강한 인품과 건전한 마음의 결과물이며, 반드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광대한 평화로움, 고요함을 가져온다. 기능이 제어되지 않고 방종할 때 약한 모습을 보였던 마음은 이제 제어된 바, 대단한 힘의 원천이 된다.  정신적 에너지(psychic energy)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로고 창조적인 용도로 쓰일 정신력(thought force)의 절약을 위해서, 제어는 필수적이다. 

참제어는  인지된 가치관에 비추어 하는 창조적인 자아의 교정이다

제어의 목표는 마음의 기능을 비-제약화(decondition)하여 자유롭게 만드는 것을 가능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만일 제어가 기계적이 된다다거나 방향을 잃게 된다면 원래의 목표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 하지만, 만일 제어가 기계적이 된다다거나 방향을 잃게 된다면, 마음의 기능을 비-제약화(decondition)하여 자유롭게 만드는 것을 가능게 하는 것인 제어의 원래 목표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참된 영적 값어치가 있는 제어는, 생각과 욕망의 기계적인 억압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체험과정 도중에 발견된 긍정적인 가치들의 지각(perception)이 자연스럽게 하는 자제다.  따라서 참제어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어떤 긍정적인 가치들에 의식이 집중될 때, 삶에 적용되려는 그 가치들의 주장은 심령적 반응 및 기력을 일으켜 그 가치들의 자유롭고 완전한 표현을 장해 하는 모든 정신적 경향들을 궁극적으로 제거한다. 즉, 순수하고, 관대하고, 친절한 삶의 가치를 바른 안목으로 알아봄으로써 육욕, 탐욕, 분노의 경향들이 제거 되는 것이다.

일정하게 생각하고 반응하는 버릇에 익숙해진 마음은, 과거의 사고방식과 연관된 인상들의 타력(inertia) 때문에, 자신의 새로운 지각에서 비롯되는 주장들에 자신을 쉽게 적응시키지 못한다. 참된 가치들에 비추어 스스로의 지각을 재조정하는 이 과정을 우리는 ‘마음의 제어'(controlling the mind)라고 부른다.  이 ‘마음의 제어’는 마음을 강제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뒤트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산스카라적} 타력(interim)을 이기내려는 마음의 노력이다. 이것은 자아의 교정(self-adjustment)에 도달하여 삶의 참된 가치들을 표현하려는 마음의 시도이기 때문에, 목적에 있어 근본적으로 창조적이고 부정적이지 않다.

승화(sublimation)를 통한 오래된 산스카라들의 분산과 탈진

‘창조적 제어'(Creative control)가 가능해지는것은 빛의 원천이 모든 사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자아-계몽은 산스카라들에 가려 방지되어 있지만, 일반인의 의식마저 완전한 암흑 속에 같혀있는 것은 아니다. 빛의 광선은 참된 가치들에 대한 감각으로 구성되며, 그 사람의 산스카라적 베일의 두께에 따라, 다양한 정도의 선명도로 각각의 진전을/진보를 인도한다.  산스카라들을 무효화하는 과정은 동시에 진정한 가치들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영적 진보는 참된 가치들의 이해를 선호하는 한편, 반면에는 산스카라들의 그릇된 가치들을 단념하는 양면적인 특성(이중적인 측면)을 지닌다.  낮은 가치들을 높은 가치들로 대체하는 과정이 바로 승화과정이다; 이것은 오래된 산스카라들에 얽매어 있는 정신력을 전환시켜 창조적이고 영적인 용도로 활용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산스카라들에 얽매여있는 정신력을 이런 식으로 전환시킬 때, 그 산스카라들은 분산되고 탈진된다.

그치지 않는 관심에 의해 지속되는 승화과정

승화는 오래된 산스카라들의 틀을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자연적이고 유효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수도자(aspirant)의 깊은 관심이 모든 단계를 거치면서도 그치지 않는 다는 특별한 장점을 지닌다. 승화가 없는 단순한 부정의 방법은  때로는 지루해질 수 있으며, 멍함/공허함(vacuity)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승화는 하류의 가치들을 상류의 것들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거치는 각 단계 마다 흥미 진진한 관심거리들로 가득하며, 점차적으로 늘고 느는 충족감을 가져온다.  ‘심령적 에너지’/정신력(Psychic energy)는 (1)명상(meditation), (2)인류를 위한 사심 없는 봉사, (3)헌신(devotion)의 영적 채널(channels)로 승화시킬 수 있다.

명상의 본성과 목적

명상은 ‘이상적인 대상'(ideal object)에 대한 깊고 일정한/꾸준한 집중(concentration)이다. 영혼은 ‘이상적인 대상’에 대해 이렇게  집중 되면, 영혼은 몸과 마음을 완전히 잊어버린체 명상의 대상만을 의식한다; 따라서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형성은 방지되고, 오래된 것들은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적 활동(작용)에 의해 분산되고 탈진된다.  드디어 산스카라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 그 집중의 강렬함 속에 개별적 영혼은 용해되어 ‘이상적인 대상’ 과 하나로 융해된다.

명상의 형태들

여러 다양한 사람의 기질(aptitude)에 따라 여러 다양한 형태의 명상이 있다. 많은 경우 일을 많이 해야하는 사람의 상상적 재능은 과로에 의해 매말라 있다. 이런 사람의 경우 가장 적절한 명상은, 생각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그 생각들과 신체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보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신체를 완전히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대에 성공한 갈망자는, 그 후, “나는 무한하다,” “나는 만물 속에 있다,” “나는 모든 것 속에 있다.”등의 건설적인 제안을 통해 자신을 우주적 존재(cosmic being)와 동일시하려 한다.   선명하고 활발한 상상력을 지닌 자들은, 어느 한 점에 집중력을 강하게 모으는 방법을 시도하여도 된다; 그러나 어느 한 점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피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정신력은 스스로의 다양한 생각에 거쳐 흩어져있다. 한 점에 집중하는 명상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착시키는 매우 건전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래도 기계적인 과정이다보니 창조적이고 지복적인 체험은 거의 없다. 하지만 초보적 단계의 경우 이 형태의 명상은 다른 더 효율적인 형태의 명상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유용할 수 있다.

신의 인격적인(personal) 측면과 비인격적인(impersonal) 측면에 대한 명상

더 성공/효율/적이고 깊은 형태의 명상에는 신에 대해서 (즉 비러벳[Beloved]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그리고 건설적으로 생각하는 명상이 선행된다. 신에 대한 명상은 영적으로 가장 유익하다.  신은 비인격적인 측면 내지는 인격적인 측면으로 명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신의 비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은 그것에 맞는 특별한 적성을 지닌 자들에게만 적당하다. 이 명상은 모든 생각을 신의 추상적(abstract)이고 발현되지 않은 존재(unmanifest existence)에 몰두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반면에 신의 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은 모든 생각을 신의 형태와 각종 속성(attributes)에 집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열심히 집중을 기우린 명상을 마친 후에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명상의 대상 대신, 명상 도중 체험한 광활한 안정감과 평화로움에 마음을 정착시키는 것이 좋다. 이런 순간들은 정신적으로 지친 상상력의 자연적인 결과물이며, 노력 없이 격려하는 것이 좋다.

명상의 장애물들

명상은 자발적이어야 하며,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신성적 충동들(divine impulses)이 솟아오르는 순간에는, 상상이 높이 솟아오를 수 있도록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좋다.  이 상상력의 비행은 무한함과 하나가 되려는 확고한 목적에 의해서만 조정되어야 한다.  육욕, 탐욕, 분노의 다양한 감정의 흐름에 영양을 받아선 안 된다.  성공적인 집중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며, 초기에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보자는 낙담하기 쉽다. 많은 경우 그가 느끼는 실망감은 그날의 명상을 시작하고 지속하는 대에 있어 심각한 장애물이다. 게으름이나 건강 문제 등의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도 있다; 이런 장애물은 일정한 시간을 갖고 고정적으로 하는 꾸준한 명상의 연습으로 극복할 수 있다.  조용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이 명상에 특별히 도움 된다; 하지만 아무 적당한 시간에 해도 상관없다.

명상에 있어 고독/독거(solitude)의 중요성

고독은 명상에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다. 생각의 세계 속에는 온갖 생각-형태와 온갖 생각-색깔의 끊임없는 혼합이 벌어진다. 어떤 대단한 생각들은 융합을 촉진시켜 마음을 강화하고, 반면에 어떤 경박한 생각들은 마음을 소멸시킨다. 마음은 정신적 환경에서 비롯되는 이런 다양한 생각들에 의해 끌어당김 내지는 거부반응을 느낀다. 스스로의 이상적 생각에 확립되기 위해선 이런 잡다한 생각들의 영향을 피하는 현명하다.  이러한 용도로 고독/독거(solitude)은 막대한 가능성을 지닌다. 고독은 심령적 에너지의 절약과 집중력의 상승을 뜻한다.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마음에 거부반응을 줄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들이 없어 진바, 그대는 스스로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대에게 힘, 지복, 전개적인 평화를(평화로운 팽창성을) 줄 효력을 지닌 더 높은 조류들을 접하는 예술을 습득할 수 있게 된다.

사심 없는 봉사(Selfless service)

신의 인격적인 측면과 비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은, 스스로의 가슴(heart)에 있는 성전(sanctuary)으로 의식이 들어가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신의 우주적인 측면에 대한 집중을 이루기 위해선, 인류를 위한 사심 없는 봉사가 가장 효과적이다.  인류를 위한 봉사에 완전히 몰두될 때, 영혼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 심지어는 그것들의 기능마저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명상할 때와 다름 없이, 새로운 산스카라들은 형성되지 않는다. 더불어, 마음을 속박/구속하는 오래된 산스카라들도 부스러지고 분산된다.   ‘자신을 위함’이 아닌, ‘남을 위함’에 영혼의 관심이 이제는 집중되었기 때문에 애고(ego)의 핵(nucleus)은 자양적 에너지를 전혀 못받게 된다. 따라서 사심 없는 봉사는 속박적인 산스카라들에 묶여있는 에너지를 전환시키고 승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사심 없는 봉사의 함축들(시사점)

사심없는 봉사는, 결과나 보상에 대한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을 때, 스스로의 편의나 위안에 대해 그리고 남의 오해를 살 가능성에 대해 완전한 무시가 따를 때 성취된 것이다. 남의 복리(welfare)에 전적으로 열중하다 보면, 스스로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도 없어진다.  스스로의 건강, 위안, 편의, 행복에 대해서 아무러한 우려도 없어 진다. 오히려, 그대는 그들의 복리(wellbeing)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의도가 있다. 그들의 안락이 그대의 편의가 되고, 그들의 건강이 그대의 기쁨, 그들의 행복이 그대의 즐거움이 된다. 그들의 삶 속에 스스로를 잃음으로써 그대는 그대의 삶을 찾는다.  그대는 그들의 가슴(heart)속에 살며, 그대의 가슴은 그대들에게 은신처를 마련한다. 가슴과 가슴 사이에 진정한 합병(union)이 이루어지면, 그대는 스스로를 그 사람과 완전히 동일시 한다. 그대의 돕는 행위와 위안을 주는 언행은 그들이 부족해하는 그 무엇인가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들의 고마움과 친선을 통해 실질로 주는 것 보다 더 많이 받게 된다.

봉사를 통한 석방과 충족

따라서, 남들을 위해 삶으로써, 그대의 삶도 증폭되고 확장된다. 따라서 사심 없는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스스로의 봉사활동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의 의무감도 주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주어진 기회에 대한 감사함을 (은혜를) 느낀다. 그는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또는 이름과 명성을 날리기 위해서도 남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심 없는 봉사는, 남에게 봉사하는 도중에 얻는 행복함과 남에게 봉사를 받는 도중에 느끼는 행복함이 동일할 때에만,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사심 없는 봉사의 이상은  권력욕, 소유욕, 자기 연민(self-pity), 질투, 및 이기심의 작용이 야기한 악행, 등과 연관된 산스카라들로부터 그를 석방 한다.

사랑

사랑에 의해 영감받은 것이라면 ‘사심 없는 봉사’와 명상은 둘 다 자발적이라야 한다. 최고(Highest)의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가장 중요한 경로로 그래서 사랑이 마땅히 손꼽히는 것이다. 사랑에 든 영혼은 비러벳(Beloved)에 완전히 몰두 되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행위에서 분리된다. 사랑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의 생활을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형성을 방지하며, 오래된 산스카라들의 무효화(undoing)를 초래한다. 아무데도 강렬한 사랑처럼 ‘무아(無我)의 상태’(self-forgetfulness)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완전하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산스카라들의 속박으로부터 의식을 해방하는 각종 방법 중에 사랑에게 가장 으뜸가는 자리가 마땅히 주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정화적 효능/  사랑의 정화력/ 사랑의 정화적 효력

사랑은 해탈(emancipation)에 이르는 다른 경로들이 지닌 이점들을 자체 속에 포괄/내표/간파한다. 사랑은  (그 자체가) 가장 저명하고 효과적인 경로다. 사랑은 자기-희생의 특징과 행복함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다. 사랑의 유일성은, 오로지 비러벳(Beloved)만을 위한 (다른 어떤 대상의 주장도 수용하지 않는)  전심을 다한 바침이 동행한다는 점(사실)에 있다. 따라서, 심령적 에너지는 딴대로 전환될 여지가 없어고, 집중력은 완전해 진다. 사랑 속에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적, 정신적 에너지들이 모두 모여 ‘비러벳의 뜻’을 위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 지진다; 따라서 이 사랑은 역동적인 세력(dynamic power)이 된다. 진정한 사랑 속에서 벌어지는 긴장은 너무도 극심하기에, 끼어들 수 있는 어떤 이질적인 느낌일지라도 그 즉시 쫓겨난다.   따라서 사랑의 배제적/배출적(expulsive) 및 정화적(purifying) 효력/효능은 비할 상대가 없다. -> 따라서 배출력과 정화력에 있어, 사랑에 비할 상대는 없다.

사랑은 천지창조의 도처에 공존한다 /  사랑은 창조세계에 편재한다

사랑에는 부자연스럽거나 인위적인 그 어떤 것도 없다. 이것은 진화과정의 기원부터 존속한다. 무기물의 단계에서 이것은 물질적인 응집력(cohesion) 또는 친화력(attraction)의로 저속하게 표현되다. 바로 이것이 모든것을 서로 당기며 붙어있게 해주는 천연적인 친화력(affinity)이다.  천체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중력의 끌어당김도, 일종의 사랑이다. 유기적 단계에 이른 사랑은 스스로를 인식할수 있게 되고 스스로를 감지할 수 있게 되어, 아메바(amoeba)와 같은 낮은 형태부터 가장 진화된 인간의 형태에 이르기 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사랑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면, 사랑의 가치는 스스로의 의식적 희생에 의해 높아진다.

사랑은 의식적인 희생을 통해 표현된다

사랑의 희생은 너무나도 완전하고 아낌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며 그 무엇도 바라지(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은 주면 줄수록 더 주고파 하고, 스스로의 주는 행위를 줄수록 덜 인식한다.   진정한 사랑의 냇물은 계속해서 증가하며 실패를 모른다.-> 진정한 사랑의 냇물은 계속해서 커져가며 그칠줄 모른다.  단순히 주고 주는 것이 이것의 단순한 표현이다.  비러벳(Beloved)의 복합적인 성품은, 이것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신경과 돌봄을 받는 관심사다. 이것은 일천 가지의 방법으로 친애인(Beloved)의 기쁨만을 한없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추구한다.  비러벳(Beloved)의 단 하나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혹은 무관심이나 방치로 인한 티끌만치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다면, 이것은 망설임 없이 온갖 고통을 환영한다.  친애인(Beloved)을 위해서라면 이것은 기꺼이 열망/연모하고 멸망한다.  비러벳을 위한 근심걱정과 고뇌로 여위하여, 이것은 이것이 거주하는 몸(신체)마저 방치한다.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이것에게 친애인(Beloved)은 평생의 관심사이다. 사랑의 성막은(tabernacle)  넘치는 초조함의 열성에 터져 (러버가 스스로의 한정들을 돌파하여 비러벳의 존재 속에 자신을 잃을 때까지) 그 이상이 없는 감미로움과 사랑이 넘쳐흐르는 냇물들을 탄생시킨다.

헌신의 단계들

사랑이 깊고 강렬할 때, 이것을 밬티(Bhakti) 또는 헌신이라고 부른다. 초기 단계의 헌신은, 상징숭배를 통해,  신에게 바치는 탄원을 통해, 계시된 성서에 대한 숭배와 충성을 통해, 혹은 추상적 사고를 통한 최고(Highest)의 추구로 표현된다.  더 진보된 단계의 헌신은, 인류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인류에 대한 봉사를 통해, 성인(saints)들에 대한 사랑과 종경을 통해, 혹은 영적 스승(spiritual Master)에 대한 복종 및 충성을 통해 표현된다.  이 단계들은 각각 다른 상대적 가치들을 지니며, 각기 다른 상대적 결과들을 초래한다. 살아있는 스승(living Master)에 대한 사랑은, 결국 파라-밬티(Para-bhakti) 또는 신성한 사랑(divine love)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헌신의 단계 중에서도 독특하다.

파라-밬티(Para-bhakti)

파라-밬티는 결코 강해진 밬티가 아니다. 파라-밬티는 밬티가 끝나는 곳/점에서 시작한다. 파라-밬티 단계의 헌신은 외곬적일 뿐 아니라, 극적인 가슴(heart)의 초조함 및 비러벳(Beloved)과 합일되고픈 끊임없는 갈망이 동행한다. 이것에는 스스로의 몸과 그것의 관리에 대한 무관심이 따르고, 주변환경으로부터의 격리가 따르며, 자신의 모습이나 남들의 비난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따르는 동시에 비러벳의 매혹에 끌리는 영적 충동(들)은 그 언제보다도 잦아진다.  이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은,최고의 친애인(Supreme Beloved)으로써 애호자에게 가장 완벽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랑 그 자체의 인격화 인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가장 유익하다. 스승(Master)으로부터 러버(lover)가 받는 사랑의 청결함, 달콤함, 효능은 그 이상이 없는 (능가불가한) 영적 값어치를 지닌 이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에 기여한다.-> 스승(Master)으로부터 러버(lover)가 받는 사랑의 청결함, 달콤함, 효능은 이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이 지닌 그 이상이 없는 (능가불가한) 영적 값어치에 기여한다.

 

담론 6 산스카라의 제거 1부

산스카라들의 제거

 

제1부

산스카라들의 단절(cessation), 마모, 그리고 풀림(unwinding)

 

산스카라들은 참자아-계몽(Self-illumination)을 방지한다/가로막는다

인간이 참자아-계몽(Self-illumination)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체험을 통해 과거로부터  축적해온 인상들 (즉, 산스카라들)에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진화과정을 개시하였던 의식하고픈-의지는, 인간단계에 이르러 의식의 창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대령大靈(Oversoul)의 지식에는 그래도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 영혼이 의식을 스스로의 진정한 본성을 체험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대신 산스카라들을 체험하는 용도로 사용하도록 강요(impelled) 받기 때문이다.  산스카라적 체험은 (온갖 사람과 사물들로 찬 세상에서 삶을 꾸려나가고 하고 있는) 한정된 신체가 스스로의 정체라는 환상에 개별적 영혼의 의식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을 확보하는 문제

개별적 영혼들은 바다 속에 있는 물방울들과 비슷하다. 바다 속에 있는 각각의 물방울들이 바다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듯이, 바하스(bhas) 즉, 환상에 의해 개별화 된 영혼도 마찬가지로, 항상 대령大靈(Oversoul)이며, 언제도 대령大靈(Oversoul)과 실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산스카라들은, 의식이 참자아-계몽(self-illumination)을 이루지 못하도록 마야(Maya)와 이원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의식을 가둔다.  스스로의 정체가 대령大靈(Oversoul)임을 영혼이 의식적으로 깨달으려면, 필이 의식을 보유한 상태로 산스카라들이 완전히 제거되어야만 한다. 의식의 진화과정에 기여하여왔던 산스카라들은, 이제 대령의 본성을 깨닫기 위한 의식의 능력(효력)을 장애한다. -> 의식의 진화과정에 기여하여왔던 산스카라들은, 이제  대령의 본성을 깨달으려는 의식의 능력(효력)을 장애한다. 그러므로, 당초의 ‘의식하고픈  의지'(will-to-be-conscious)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식을 더욱더 진화시키느냐가 아니라, 도리어 어떻게 하면 산스카라들로부터 스스로를 석방시키느냐다. ->그러므로, 당초의 ‘의식하고픈  의지'(will-to-be-conscious)가  직면하는 문제는, 더이상 의식의 진화적 진보가 아니라,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이다.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을 확보하는 다섯 가지 방법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은 다음 다섯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1)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중단. 이 방법은 끝없이 재개되는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창출활동을 중단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산스카라들의 형성을 막대기에 실을 감는 것과 비교한다면, 이것은 실의 감음을 중단하는 것이다.
(2) 오래된 산스카라들의 마모(Wearing out).   산스카라들은, 행동과 체험으로 옮겨져 표현되지 않도록 보류되면, 서서히 마모화된다. -> 만일 행동과 체험으로 옮겨져 표현되지 않도록 보류하면, 산스카라들은 서서히 마모된다. 실의 비유를 쓴다면, 이 과정은 실을 있는 그 자리에서 마모화시키는 것과 비교 할 수 있다.
(3) 감긴 산스카라들의 풀림. 이 과정은 과거의 산스카라들의 형성과정을 정신적으로 역전시켜 이들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위의 비유를 계속쓰면, 이것은 감긴 실을 푸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4) 특종 산스카라들의 분산(dispersion)과 배출(exhaustion). 산스카라들에 묶여있는 정신적 에너지(psychic energy)를 승화(sublimate)시켜, 다른 채널로(channels) 전용(divert)시키면, 산스카라들이 약화되고 없어지는 경향이 생긴다.
(5) 산스카라들을 ‘없애는’(wiping out) 방법. 이것은 산스카라들의 완전한 전멸로 구성된다. 실과의 비유를 쓴다면, 이것은 가위로 실을 자르는 것이다. 이 산스카라들의 최종적 “없앰”은 오르지 완벽한 스승(Perfect Master)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여기서 꼭 주의하여야 할 사항은, 위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 방법들은 종류별로 날카롭게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과, 산스카라들을 무효화(undoing)시키는 각종 구체적인 방법들은 다양하게(즉 복합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위에 5가지 방법들은, 산스카라들이 제거되는 와중에 벌어지는 특정한 정신적 과정들을 원칙에 의해 구별한 것 뿐이다.  편리를 위하여, 요번 장에서는, 앞서 설명한 첫 세 가지의 현저한(pre-eminently) 원칙들만을 먼저 다룰 것이다. (즉,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중단과, 과거 산스카라들의 마모, 및 풀림만을 다룰 것이다.) 나중의 두 가지, 우세한(pre-dominant) 원칙들(즉, 산스카라들의 분산과 배출, 그리고 산스카라들의 “없앰”)은 차후 장에서 다룰 것이다.

단념(Renunciation)

한없이 축적되는 산스카라들의 속박으로부터 마음(mind)이 석방되려면, 필이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창출이 중단되어여야만 한다.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증식은 단념을 통해 중단할 수 있다. 단념에는 외적(external) 단념과 내적(internal) 단념 두 가지가 있다. 외적단념, 즉 육체/물질/적 단념은 마음(mind)이 집착하는 모든 것들 (즉, 집, 부모님, 아내, 자녀들, 친구들, 부유함(돈), 안락, 그리고 육체적 쾌락)을 포기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내적단념, 즉 정신적 단념은 모든 욕구를 (특히 육체적 쾌락의 대상들에 대한 욕구를) 버리는 것으로 구성된다.  비록 외적 단념 그 자체만으론 내적 단념이 필이 동반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많은 경우 외적 단념은 내적 단념으로 향하는 길을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 영적 자유는 내적 단념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외적 단념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외적 단념은 내적 단념을 이루는 대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자신이 소유하는 모든 것들을 단념하는 사람은, 가진 모든것 (및 가졌던 모든것)과의 연결을 끊는다. 이것은 그가 포기한 것들이 더 이상 그에게 신선한 산스크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산스카라의 형성과정을 중단함으로써 그는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을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을 나아간 것이다. 외적 단념으로 가능한 성과는 그 뿐 아니다.  모든 것을 단념함으로써, 그는 과거의 묶임들/속박들/구속들(bindings)도 단념한 것이다. 그의 소유물들과 연결된 과거의 산스카라들은 그의 마음(mind)에서 분리되며, 표현이 방지된 산스카라들은 따라서 마모(화)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 사람의 경우, 외적 단념은 산스카라들의 마모에 있어 유리한 환경조건을 조성한다. 금과 권력을 소유한 사람은 방종과 사치의 삶에 노출된다. 그의 환경은 유혹에 빠지기 쉬운 환경이다. 인간은 환경의 조각가가 찍고 파서 형상화한 것이 그 사람의 대부분을 형성한다.  그 사람이 자신의 주변환경을 넘어설 수 있느냐는, 성품의 의지가 얼마나 강하냐에 달려 있다.  만일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면, 주변환경 속에 모든 행동과 조치/반응(reaction)를 취하는 도중에도, 여전히 그의 생각과 행동은 자유를 유지한다. 그가 만일 약하다면, 주변환경의 영향에 굴복하고 말게 된다. 비록 그가 강할지라도 집단적인 형태의 사고방식 및 생활방식에 대부분 휩쓸리기 쉽다. 맹렬하게 밀려오는 사상의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주변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 언젠가는 어떤 집단적 열정에 휩쓸려 이제는  단념할 수 없는 어떤 사고방식에 몰입/몰두되기 쉽다. 주변환경의 영향을 극복하고 저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향들을 피하는 방법이 쉽다. 사치와 유혹에 둘러싸이지만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은 소박하고 순결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불필요한 모든 것들의 단념은, 산스카라들의 마모화를 돕기 때문에, ‘자유의 삶'(life of freedom)에 기여한다.

독거/고독(solitude)과 금식
(1)독거/고독(solitude)와 (2)단식은 특별한 영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두 형태의 외적 단념이다. 세속적인 삶의 잡다한 혼잡함과 스트레스를 가끔식 벗어나 고독함 속으로 은거하는 것은 사교적 본능(gregarious instinct)과 연결된 산스카라들을 마모(화)하는 (유용) 가치가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일종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독거/고독(solitude)와 마찬가지로 단식도 상당한 영적 가치가 있다. 먹는 것은 만족이고, 단식은 극기다. 음식을 즐기고픈 갈망을 불구하고/막론하고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단식은 육체적이다; 음식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음식에 대한 집착 때문도 아닌, 오로지 신체의 생존만을 위해서 하는 음식의 섭취는 정신적 단식이다. 외적 단식은, 정신적 단식을 달성하기 위해서 음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음식은 삶에 직접적인 필수품이며, 음식의 계속적인 거부는 건강에 심각한 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외적 단식은 주기적으로 단기간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음식에 대한 갈망을 극복하는 대에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지속하여야 한다.  자신의 모든 활력/생명력과 정신력을 동원하여 음식에 대한 갈망을 견디면, 음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마음(mind)을 석방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몸의 모양을 가꾸기 위해서, 또는 남에게 시범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외적 단식은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다.  단식은 자기주장적인 용도로 쓰여서는 안 된다.-> 단식은 자기주장적인 용도로 쓰일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체의 한계에 도달할 정도로 심하게 해서도 안 된다. 장기간의 금식을 통한 자기 고행은 반드시 음식에 대한 갈망으로부터의 석방을 증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호화로운 과식의 삶으로 향하도록 하는 뒤이은 역반응/반작용을 초래하기 쉽다.  그러나, 만일 외적 단식을 적당하게 그리고 영적 목적을 위해서 한다면, 이것은 내적 단식의 성취를 촉진시킨다.  외적 단식과 내적 단식이 진심어리고 충실(성실)할 때, 비로서 음식을 원하는 갈망과 연결된 산스카라들의 풀림(unwinding)이 따른다.  

계행/난행(penance)

여러 다른 산스카라들의 풀림은 계행(penance)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잘못된 행위를 하였다는 것을 인식한 후 느끼게 되는 죄책감을 확대시켜 표현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속죄(repentance)는, 심한 자기-비난(self-condemnation)과 함꼐 자신의 비행을 정신적으로 재생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 속죄(repentance)는, 자신의 비행을 정신적으로 재생시켜 심한 자기-비난(self-condemnation)을 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속죄(repentance)는, 계행/참회(penance)를 불러이르키는 상황이나 사정을 되새긴다거나, 또는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일부러 자신의 심리를 취약하게(또는 연약하게vulnerable) 하는 것, 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고의적으로 돌이키려고 노력하여, 피눈물의 극심한 자기 비난에 드는 것, 등으로 촉진시킬 수 있다.  이런 식의 계행(penance)은, 그 행위의 원인인 산스카라들을 풀어준다. -> 이런 식의 계행(penance)은, 그 행위를 야기한 산스카라들을 풀어준다.  깊은 감정이 수반되는 자기-비난은 분노(anger), 탐욕(greed), 육욕(lust)을 야기하는 산스카라들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제되지 않은 탐욕, 분노, 또는 육욕 때문에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언젠가 그에게는 자아를 죽이는 죄책감이 양심을 찌르는 반응이 오게 되어있다. 만일 이 때 그가 한 악행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깨닫는다면, 그의 의식에 동행되는 감정의  통렬함은  자기-비난(self-condemnation)의 소제인 악행을 야기한 경향을 소모한다.

 자기-비난(self-condemnation)은 종종 여러 형태의 자진-고행(self-mortification)으로 표현된다. 어떤 갈망자들(aspirants)은, 참회적 심기에 들면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과한 후회의 표현은 전반적으로 낙담하는 것이 (또는 말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힌두 수도자들은 겸손을 기르기 위해서 상례로 만나는 모든 사람의 발에 절을 한다. 강한 의지와 안정적인 성품을 지닌 사람의 경우, 자아-굴욕(self-humiliation)을 통한 참회는 (각종 좋고 나쁜 행동과 연관된 산스카라들을 풀고(unwinds) 근절하는) 원하는 좋은 결과(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의지가 약한 사람의 경우, 공감스러우며 사랑이 담긴 지도하에 유익한 참회를 할 수 있다.  참회가 주의깊게 숙달되고 수행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의 경향성과 행동습관은 언젠가 반드시 정신적으로 거절된다; 그래서 순수한 봉사의 삶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계행(penance)에 있어 항상 주의하여야 할 사항은, 과거의 나쁜 행위에 너무 오랫동안 집중하여 결국 사소한 것들 갖고도 통곡하며 울부짖는 병적인 습관이 발생할 위험이 따른다는 점이다. 이런 식의 과한 감정적인 사치는 무차별한 정신력(psychic energy)의 낭비가 되기 쉬우며, 산스카라들의 풀림(unwinding)이나 마모에 있어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참회는, 그날의 결함들을 이 딸아 나날이 뉘우치는 속죄(repentance) 처럼 되어서는 아니 된다. 참회는 자신의 실수들에 대한 우울하고 과한 숙고를 거듭하는 지루하고 메마른 습관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진심어린 계행은, 비행(실수)에 대한 비통을 영존시키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계행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 행위를 미래에는 더 이상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다.  만일 계행이 자기 존중이나 자신감의 감퇴로 이어진다면, 않 좋은 행위의 반복을 방지하려는 것인 이것의 진정한 목표를 벗어난 것이다. 

욕구 충족의 자제(withholding)

또한 산스카라들의 마모와 풀림은 욕구(들)의 표현과 충족을 부정함/거부함으로써, 영향을 줄 수 있다. 사람마다 욕구를 부정(거부)하는 저항력이나 습성있이 다르다.   욕구(욕망)의 충동이 급속도로 강하게 솟아오르는 사람들은 그 욕구를 근원에서 차단하지 못 한다; 그래도 행동을 통한 그 욕구의 충족을 자제 할 수는 있다.  강한 욕구의 솟아오름을 단속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도, 그 욕구가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방지할 수는 있다.  행동의 통제를 통한 욕구(망)의 거부는, 미래 욕망의 씨를 말린다.  반면에, 사람이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면, 그는 일부 인상들을 소비하고 소모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충족하는 과정 도중에 새로운 인상들을 창출한다;  그리하여 그는 미래에 충족을 요구하게 될 욕망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욕구의 표현과 충족을 통한 인상들의 소비 및 소모과정은 (그 자체만으론)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을 이루는 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안는다.

 욕망들이 솟아날 때,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방지되면, 그 욕망들에 대해 자발적으로 생각/사색/명상(cognition)해볼 충분한 겨를이 생긴다.  이러한 생각/사색/명상(cognition)은 해당되는 산스카라들의 마모를 가져온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인 생각/사색/명상(cognition)이 만일 그 욕망을 상상으로 즐기는 방종의 형태를 취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아무런 까닭 없이 또는 고위적으로 욕망을 마음(mind)속에 환영하고 품는 것은, 아무러한 영적 가치가 없는 생각/사색(cognition)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기적 산스카라들(subtle sanskaras)의 창출을 야기할 수 있다. 정신적 사색/명상(cognition)에는, 의식에 발생하는 욕망에 대한 의식적인 시인/승인(sanction)이 동행되지 않아야 하며, 욕망에 대한 기역을 영속시키려는 노력도 없어야 한다. 욕망들의 표출과 충족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거부되고 승인/제재(sanction)없이 의식적 사색(cognitive consciousness)의 격렬한 불을 관통하도록 허용되면, 그 욕망의 씨았은 시들어 소모되고 만다.  욕망들의 거부와 육체적 반응의 억제는 시간이 지나면 이윽고 자동적이며 자연스러운 과거 산스카라들의 삭재(negation)를 가져온다.

무욕 상태(Desirelessness)

욕망의 거부는 진정한 자유를 유일하게 가져올 수 있는, 무욕 상태, 즉 원함-없는 상태의 준비과정이다. 원함(Wanting)은충족이 되건 않되건 상관없이 필히 속박(binding)적이다. -> 충족의 여부와 상관 없이 원함(Wanting)은 반드시 구속력을 지닌다.  충족되면 더 많은 원함으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혼/영(spirit)의  소박을 영속시킨다.  충족되지 안을 때 이 따르는 실망과 고통은 연관된 산스카라들을 통해 나름대로 혼/영(spirit)의 자유를 속박한다. 마음(mind)의 외적 및 내적 자극들은 원함의 상태 내지는 (원함의 일종인) 실어함의 상태로 마음을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에, 결국 원함에는 끝이 없게 된다. 외적 자극(external stimuli)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이 있다.  내적 자극(internal stimuli)은, 인간의 마인드-물질(mind-stuff)에 있는 현생의 기억에서 발생되는 자극들과, 의식이 진화과정을 거치는 동중과 인간으로 살아온 도중에 축적해온 전체의 산스카라들에서 솟아나오는 자극들이다. 모든 외적 및 내적 자극들이 있는 상태에서 흔들림 없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마음(mind)이 훈련 되면, 무욕(non-wanting)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자극의 이원성/반대들(opposites)을 초월한 절대적인 실재를 제외한) 그 무엇도 원하지 않음으로써, 원함의 산스카라들을 푸는 것이 가능해진다.

무욕(non-wanting)의 자세는 ‘네티, 네티’(Neti, Neti)로 자극을 직면하는 것이다.

원함의 상태는 마인드의 균형이 흐트러진 상태고 무욕의 상태는 마인드의 균형이 안정된 자세다. 흔들리지 않는 무욕의 자세는 (즐겁고 고통스러운, 기분 좋고 불쾌한) 모든 자극으로부터 끊임없이 해방상태(disentanglement)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상의 기쁨과 슬픔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으려면, 외적 및 내적 자극들로부터 마음이 완전히 독립/분리되어야만 한다.  아무리 마음이 스스로의 건설적인 제안으로 방비를 계속해서 강화한다 하여도,  주변환경 및 정신적 환경의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예기치 않은 어떤 갑작스런 파도에 외딴 전초(outpost)의 방어벽이 휩쓸릴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면, 그대는 당분간이나마, 길을 완전히 잃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반-집착적인(non-attachment) 자세는 그대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이 자세는 “내티, 내티”(Neti, Neti)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니요”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자세는, 한정된 체험의 매혹적인 반대들(opposites)에 대한 초연함(detachment)을 주의 기우려 유지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맘에 드는 자극들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집착을 유지하면서 불쾌한 자극만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마음이 반대들/이원성(opposites)의 밀어닥침에 흔들리지 않고 평형을 유지하려면, 애정적 표현들에 대한 집착을 유지할 수 없으며, 이것들에 의한 영향을 받아서도 안된다. ‘평형자세’(equipoise)는, ‘양쪽을 다'(both alternatives) 아무런 집착 없이 완전한 초연함(detachment)으로 맞이 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다양한 형태의 금욕주의가 지닌  부정적인 요소의 한계

긍정적 산스카라들(positive sanskaras)이 의미하는 “좋아,하자”(yes, yes)는  “아니/ 말자”(no)의 주장/행세(assertion)을 통해서만 무효화 할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요소는 단념, 독거(고독), 단식, 계행, 욕구충족의 보류(withholding), 및 무욕으로 표현되는 금욕주의의 모든 방면에 필이 존재한다.  이 장에서 이미 개별적으로 설명된 여러 방식과 자세의 조화로운 혼합은, 무리하게 고역스럽거나 힘들지 않은 건강한 형태의 금욕주의를 형성/조성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보장하기 위해선, 그들이 지닌 부정적인 요소들이 왜곡되거나 더 많은 한정들을 가져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금욕주의의 삶을 살도록 강제로 마음을 강요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금욕주의의 삶을 자신에게 강제적으로 적용시키려는 어떠한 노력도, 오히려 여러 좋은 성품/자질들의 성장을 방해하기 쉽다. 인간 본성의 건강한 자질/성품들이 자연스럽게 천천히 성장할 수 있도록 허용되면, 상대적 가치들에 대한 지식이 펼쳐지게 되고 그리하여 금욕주의의 삶으로 자발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스스로의 마음에 금욕 생활을 독촉한다거나 강요하는 모든 시도들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하기 쉽다.

많은 경우 어떤 집착으로부터의 석방과정에는, 또 다른 어떤 새로운 집착의 형성과정이 동반된다. 가장 물질적인(grossest) 형태의 집착은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사물들의 세계에서 분리될 때, 마음은 더 고질적이며 주관적인 종류의 집착에 도달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어느 정도의 초연함(detachment)을 숙련하는 대에 성공하게 되면, 고고한 태도와 오만함(superior air)으로 표현되는, 기적(subtle) 형태의 이기주의(egoism)가 발달하기 쉽다. 초연함(detachment)은, 애고(ego)가 달라붙을 수 있는  중심점(nucleus)을 형성하여서는 아니된다; 동시에, 세속생활의 스트레스와 혼잡함을 감당할 능력부족에서 비롯되는 표현이 되어서도 아니 된다. 순수하고 무한한 존재(Infinite being)를 제한하는 요소들의 포기는, 순수함 및 영적계몽에서 비롯되는 엄청나게 강한 자세를 통한 포기여어야만 한다; 맞선 삶의 투쟁과 분투에 대한 무력함에서 비롯되는 포기여서는 아니된다.  더불어 진정한 초연함(detachment)은 (때로는 영적계몽에 대한 심오한 갈망도 없이 마음이 강하게 집착할 수 있는) “네티, 네티”의 공식(formula)에 무조건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부정적 공식에 대한 이런 관심은 많은 겨우 오히려 그 유혹들에 대한 내적 애착심과 나란히 공존한다. 초연함은 자신의 본질(성품)의 일부분이 될때만 전심적이 되고, 필수불가결 해질 수 있다./ 완전해질 수 있다. 

부정적 산스카라들도 사라져야만이 영적계몽(깨달음)이 따를 수 있다

진화과정과 인간환생기간 도중에 축적해온 긍정적인 산스카라들을 푸는 방법은 오로지 “아니, 아니”(no, no)의 부정적인 결심/실행/행사(assertion)뿐이다.  비록 이 과정은 긍정적 산스카라들을 파괴하긴 않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마음을 제약(condition)하여 새로운 문제를 창출하는 부정적인 산스카라들의 형성을 초래한다. 이 “아니, 아니”(no, no)의 결심/실행/행사(assertion)은 충분히 강하여야만이 모든 육체적, 기(기)적(subtle), 정신적(mental) 산스카라들을 근절하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성과를 거둔 후에는 결코 버려져야만 한다. 영적 체험의 최종적임/절정(finality)은 메마른 부정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공식/방식(negative formula)에 소속시키는 것은, 영적 체험을 지적인 개념으로 한정시키는 것 밖에는 안 된다. 부정적인 공식은, 마음이 스스로의 제약들을 제거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이전에 필이 단념해야만 하는 것이다. ->  마음이 스스로의 제약들을 제거하는 용도로 부정적인 공식은 필이 사용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이전에 필이 단념해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 자체의 활동에 의해 설정된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활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목표가 완료되고 나면, 생각 그 자체도 버려져야 한다. 바로 이것이 마음을 초월하는 과정이며, 이것은 마음과 그것의 욕망들에 대한 비-일체감/동일시/동질감(non-identification)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자신의 신체, 모든 생각, 및 낮은 충동들(lower impulses)을 객관적인 견지에서 보는 것은, 초연함의 지복(blissful)속에 확립되는 것이며, 모든 산스카라들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이말의 뜻은,  “나는 이 몸이다,” “나는 내 마음이다” “나는 내 욕망이다” 등의 스스로를 가둔 환상으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나는 신이다,” 즉, “아날 핰”(Anal Haqq) 또는 “아함 브라마스미”(Aham Brahmasmi)의 계몽된 상태로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