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9 선과 악

 선과 악

반대들(opposites)을 통한 체험의 분석 평가

인간의 마음(mind)은 여러 체험들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체험들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다. 어떤 체험은 좋게 여겨지고, 어떤 체험은 나쁘게 여겨진다; 어떤 체험은 행복을 가져오고, 어떤 체험은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체험은 유쾌하게 여겨지고, 어떤 체험은 불쾌하게 여겨진다. 어떤 체험은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 어떤 체험은 자유와 충족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어떤 체험은 선한 것으로, 어떤 체험은 악한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것들이 특정한 관점에서 삶을 맞이할 때, 인간의 상상에 의해 창조되는 반대들(opposites)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과 ‘받아들일 수 없는'(acceptable and unacceptable)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수용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간의 개념은, 그 순간에 우세한 욕망의 본성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진화해간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어떤 종류든 욕망이 존재하는 한, 그는 그 욕망과 연관지어 스스로의 체험을 두 가지로 나누어 평가하게 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욕망의 충족에 기여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충족을 방해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마음은 삶과 삶이 가져오는 모든 것들을 어떤 기대나 얽매임, 회피 없이 맞이하는 대신, 일종의 기준을 마련하여 삶을 ‘용납되는 것’과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나눈다.

선(善)조차도 욕망과 상관이 있다(relative)

인간의 마음이 창조한 반대들(opposites) 중에, 가장 영적으로 중요한 것은 ‘선’(good)과 ‘악’(evil)의 구분(구별)이다. 선악의 구분은 모든 욕망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근거한다. 욕망의 족쇄를 강화하는 체험과 행동(행위)은 악한 것이고, 욕망들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는 경향이 있는 체험과 행동은 선한 것이다. 선한 체험과 행동들도 욕망과 상관적으로(relative) 존재하기 때문에, 악한 체험이나 행동들과 다름 없는 구속력을 발휘한다. 모든 욕망들이 사라질 때만 모든 속박이 진정으로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선(좋은)과 악(나쁜)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간에 아주 잘 융합되어, 한정된 자아에게 어떤 선택의 여지도 남기지 않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 산스카라로 시작한다

인간의 의식이 ‘완전히 발달’(fully developed)된 것은 맞다; {즉, 인간 의식의 발달이 완료된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 의식에 악한 요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의식이 인간 이하(sub-human) 진화 과정의 단계들을 거치는 도중에 주로 육욕, 탐욕, 분노와 같은 제한적인 경향들이 우세하게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ego-centered) 경향성이 창조하고 유지해 온 체험과 행동들은 그들의 인상 자국(imprints)을, 발달중인 마음에 남긴 것이다; 그리고 영화 필름이 배우의 움직임을 녹화하듯이 마음도 그 인상들을 저장(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악하기 쉽고, 선하기 힘든 것이다. 인간 의식의 선조(先祖)인 동물의 삶은 동물적 육욕, 동물적 탐욕, 동물적 분노에 의해 대부분 결정된다; 하지만 어떤 동물들은 이따금 자기-희생, 사랑, 인내 등의 선한 자질을 계발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축적되어 온 동물적 산스카라들이 모두 악하고 선한 부분이 전혀 없었더라면, 인간 의식에 선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한 산스카라를 배양할 필요성

어떤 동물적 산스카라는 선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물적 산스카라는 악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의식은 시작부터 주로 악한 경향의 추진력(영향력)을 받는다. 인간 의식의 진화 과정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해탈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선한 산스카라들을 배양하고 발전시켜 이미 축적된 악한 산스카라들에 겹쳐서(overlapping) 무효화시키느냐로 구성된다. 선한 산스카라들의 배양은 동물의 삶에서 지배적이었던 체험과 행동에 반대되는 체험과 행동을 양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육욕의 반대는 사랑이고, 탐욕의 반대는 베풂(generocity)이며, 분노의 반대는 수용성/인욕(tolerance) 또는 인내심(patience)이다. 사랑, 베풂, 인욕(忍辱)의 삶을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인간은 육욕, 탐욕, 분노의 경향을 지울 수 있다. 

성자와 죄인 

따라서 보편적으로 산스카라들의 제약에서 자신을 석방시키는 과정에는, 선을 위해서 악을 단념하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순간에 사람이 선한가 악한가의 여부는, ‘오차없이 철두철미한'(inexorable) 산스카라들의 작용에 의해 정해진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죄인과 성자는 둘 다 우주를 운영하는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둘 다 시작도 같으며 끝도 같다.
죄인은 영원한 타락의 오명을 쓸 필요가 없으며, 성자는 스스로의 도덕적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무리 성자다운 사람이라도 도덕적 실패의 삶을 거듭하지 않고 더 높은 선행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없으며,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개선하여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타락한 사람이라도 누구나 점차로 나아지고 좋아져서, 언젠가는 인류 최고의 모범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항상 희망은 있다; 그 누구도 완전히 길을 잃은 사람은 없으며, 그 누구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신성으로 향하는 길이 선의 선호와 악의 단념을 통한다
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한정된 자아는 악한 산스카라뿐 아니라 선한 산스카라 안에서도 산다 

선행이 점차적으로 펼쳐지면서, 그 뒤를 사랑과 베품, 평화가 따른다. 이러한 선한 성품들의 실현(manifestation)으로 인해 축적되는 선한 산스카라들은 이와 반대되는 육욕, 탐욕, 분노의 악한 산스카라들을 겹쳐서(overlap) 평형(balance)을 가져온다. 선한 종류와 악한 종류의 산스카라들이 서로 정확하게 겹쳐지고 평형을 이루는 순간 두 종류의 산스카라들은 모두 종결되고, 의식은 구속의 상태에서 해탈(Freedom)의 상태로 접어든다. 장부를 마감하려면, ‘대변’과 ‘차변’ 양측이 서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주로, 차변 측이 더 크던지 대변 측이 더 커서 장부는 할 수 없이 유지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차변 측이 초과할 때만이 아니라 대변 측이 초과하는 경우에도 장부는 계속해서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장부는 오직 양쪽이 서로 평형을 이룰 때에만 마감할 수 있다. 산스카라의 영역에서 이런 균형은 매우 드문 일이다; 선한 산스카라 측 아니면 악한 산스카라 측, 둘 중 하나가 항상 우세하기 때문이다. 차변이나 대변의 과잉으로 장부의 마감이 지연될 수 있듯이, 한정된 자아의 수명도 악한 산스카라 내지는 선한 산스카라의 과잉으로 지연될 수 있다. 한정된 자아는 악한 산스카라를 통해서뿐 아니라 선한 산스카라를 통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한정된 자아의 최종적 전멸을 위해서는,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가 정확하게 겹쳐지고 평형을 이루어야 한다.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의 겹침과 평형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가 정확하게 겹치고 평형을 이루는 문제는, 단순히 양쪽의 총액만 서로 맞추면 되는 수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가 순전히 양쪽의 수량만 똑같이 맞추면 되는 문제였다면, 선한 산스카라들의 끈질긴 축적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악한 산스카라들의 축적이 느려지거나 중단되는 동시에 선한 산스카라들이 더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축적된 악한 산스카라들의 수량을 선한 산스카라들이 맞추어 필요한 균형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들의 총량이 평형을 이뤄야 할 뿐 아니라 각각의 반대되는 요소들이 서로 정확하게 겹쳐져야만 한다. 따라서 ‘각각의 의식의 중심점'(개체)들이 맞이하는 과제는, 그 영혼이 축적한 다양한 산스카라들의 질적인 차이와 연관된 그 영혼만의 특정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선한 산스카라로의 에고의 이동

선한 산스카라의 축적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산스카라들의 특별한 구조와 상관없이 진행되다 보면, 어떤 방향으로는 선한 산스카라가 과도하게 축적되는 동시에 다른 종류의 악한 산스카라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자기-고행이나 엄격한 종류의 금욕을 통해 어떤 종류의 집착은 무효화되었지만, 이런 수행이 건드리지 않는 다른 형태의 집착들은 그대로 남을 수가 있다. 갈망자는 건드려지지 않은 형태의 집착들을 그대로 무시하기 쉬울 뿐 아니라, 자기-고행이나 금욕의 실천으로 인해 형성된 산스카라들의 추진력에 영향을 받아서, 하던 수행만을 계속해서 더 하게 될 수 있다. 결국 한정된 자아는 종결되지 않으면서, 선한 산스카라만 과하게 창조하는 것이다. 설사 건드려지지 않은 종류의 집착들이 나중에 사라진다 해도, 에고는 이 새로운 선한 산스카라들로 옮겨가서 계속해서 생명을 이어갈 수도 있다.

산스카라 조정(adjustment)의 필요성

해탈(Emancipation)은 단지 덕(德)만을 축적한다고 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산스카라들의 현명한 조정이 필요하다. ’각각의 의식의 중심점'(개체)들은 최후의 영적 해탈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이끌려가고 있다; 따라서 마음에는 그 상황이 요구하는 영적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정반대의 요소를 스스로에게 초대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갈망자의 현명하고 올바른 노력 없이 스스로 알아서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갈망자는 자신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완벽한 스승의 ‘한결같고 틀림 없는 도움'(unfailing help)을 받게 되는 행운이 없는 사람의 경우다; 오직 완벽한 스승만이 각각의 경우마다 그 사람에게 정확하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직접적으로, 완전하게 통찰할 수 있다.

선(善)의 감옥

이제까지 우리는 선한 산스카라들도 한정된 자아(limited self)의 생존을 지탱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스스로를 악한 존재로 보다가 선한 존재로 보게 될 때, 그는 자신이 선한 존재라는 확신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결국 ‘스스로의 존재성을 확인'(self-affirmation)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는 새로운 형태로 {자신의 존재성을 탈바꿈하여} ‘분리적 존재성’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에고가 새롭게 만들어낸 집이 오히려 더 허물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악함’과의 자기 동일시보다는 ‘선함’과의 자기 동일시가 주로 더 완전하기 때문이다. ’악함’과의 자기 동일시는 그래도 좀더 다루기가 쉽다; ‘악함’이 좋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자마자 의식에 대한 ‘악함’의 움켜쥠이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선함’의 움켜쥠을 느슨하게 만드는 문제는 좀더 힘든 과제다; ‘선함’에는 ‘악함’과 대조하여 자신을 보다 당당하게 느끼는 일종의 자기-정당화(self-justification)가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망자는 언젠가 그의 새로운 감옥-집에 실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지각을 통해서 선악의 이원성을 초월함으로써 자신의 ‘분리적 존재성’(separative existence)을 포기하게 된다.

선(善)을 악(惡)에 비교한다면

에고(ego)가 자신의 거처를 ‘악함’과의 동일시에서 ‘선함’과의 동일시로 옮기게 되는 것은 ‘선함’과의 동일시가 그 에고에게 더 확장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갈망자는 이 새로운 집 역시 제한적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후 그는 ‘선함’의 집을 벗어나는 과정이 ‘악함’을 동일시하던 이전의 집을 벗어나는 것보다 덜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악의 집’을 벗어나는 것과 연관된 어려움은 그 집의 제한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지각(perception)에 도달한 이후에 집을 어떻게 실제로 해체해나가느냐 하는 작업의 어려움이다. ‘선의 집’을 벗어나는 것과 연관된 어려움은 그 집의 해체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집도 제한적임을 제대로 지각(perception)하느냐의 어려움이다. 이러한 차이점의 원인은 동물적 산스카라들이 고대로부터 장기간 축적되어 와서 보다 뿌리 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선도 악만큼 우리를 구속한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선의 경우에는 제한성을 제대로 지각한 뒤 속박을 푸는 작업에 있어 악보다는 쉽다.

산스카라들의 겹침에 대한 비유

 

에고는 악한 산스카라들을 통해서도 살아가며, 선한 산스카라들을 통해서도 살아간다; 또는 선한 산스카라와 악한 산스카라가 뒤섞인 상태를 통해서도 살아간다. 그래서 모든 산스카라로부터의 의식의 해탈은 선한 산스카라들이 악한 산스카라들을 정확하게 겹쳐 평형을 이루는 것으로 달성할 수 있으며; 아니면 일부 악한 산스카라들이 선한 산스카라들을 겹쳐 평형을 이루는 동시에 일부 선한 산스카라들이 악한 산스카라들을 겹쳐 평형을 이루는 것으로 달성할 수 있다. 더러운 접시를 닦을 때, 보통 주방 세제로 접시를 덮은 후에 물로 씻어낸다. 이 방법은 선한 산스카라들로 악한 산스카라들을 겹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기름기 가득한 접시를 닦을 때에는, 재(ashes)로 뒤덮은 후에 물로 씻어내는 방법이 있다. 재는 기름기가 가장 없는 물질 중 하나로, 어떤 면에서 기름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름이 굳은 접시에 재를 쓰면 더 쉽게 세척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악한 산스카라들로 선한 산스카라들을 겹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산스카라로부터 자유로우며, 선악을 초월한다

선하고 악한 산스카라들이 서로 정확하게 겹쳐져 평형을 이루게 되면 둘 다 사라진다;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깨끗한 마음, 그래서 아무런 왜곡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비춰주는 마음이다. 영혼에는 그 무엇도 기록되지 않는다. 산스카라는 마음에 축적(입금)되는 것이지, 영혼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그 언제라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한 거울이 되어야만이 진실(Truth)을 비출 수 있다. 선하고 악한 인상들이 둘 다 사라질 때, 마음은 영혼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계몽(Illumination)이다.
하지만 마음이 영혼을 보는 것과 영혼이 스스로를 아는 것은 다르다; 영혼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혼은 마음을 초월하는 신(God)이다. 따라서 마음이 영혼을 본 뒤에도 영혼이 스스로가 진실(Truth)임을 알기 위해서는, 마음이 영혼 속으로 융해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깨달음(Realization)이다. 이 상태에 들면 모든 선하고 악한 산스카라들을 포함하는 마음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마음을 초월한 상태다; 따라서 선악의 구분도 넘어선다. 이 상태의 관점에서 보면, 무한한 사랑, 평화, 지복, 지식의 특성을 지닌, 불가분한 단 하나의 존재만이 있다. 선과 악 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되던 투쟁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선도 악도 없으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일하고 불가분한 신의 삶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