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7 산스카라의 제거 2부

산스카라들의 제거

2부

산스카라들의 분산과 소진

제어(control)를 통한 산스카라의 무효화 

앞장 끝에서는 양성 산스카라들(positive sanskaras)을 부정하는 원칙에 의해 산스카라를 제거하는 방법들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의식으로부터 진실(Truth)을 가린다는 일종의 부작용을 일으킨다; 따라서 온 천지가 존재하게 된 유일한 이유인 참나의 깨달음마저 가로막게 된다. 양성 산스카라들을 무효화시키는 모든 방법들은 결국 몸과 마음의 제어(control)에 기반한다. 마음의 습관적 경향을 제어하는 것은 신체적 행동을 제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순간에 스치고 지나가거나, 잘 잡히지 않는 마음의 생각과 욕망들은 강한 인내와 지속적인 연습으로만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작용과 반응을 제어하는 것은 새로운 산스카라의 형성을 방지할 뿐 아니라 정신적 작용과 반응의 근원인 과거의 산스카라들을 마모시키고 풀어주기 때문에 필수적인 방법이다. 초기에는 제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진심으로 노력하다보면 점차적으로 자연스러워지고 이루기 쉬워진다.

산스카라들의 제거를 통해 마음이 스스로를 비-조건화(de-condition)하려 노력하는 한, 제어는 의도적이어야 하며 반드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마음이 산스카라들의 영향으로부터 석방되면, 이 석방된 마음은 참된 이해와 자유 속에서 기능하기 때문에 그 후부터의 제어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제어는 강한 인품과 건전한 마음의 결과물이며, 반드시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광대한 평화로움, 고요한 침착함을 불러온다. 제어되지 않고 방종하게 기능할 때 약해 보였던 마음은, 제어가 되면서부터 위대한 힘의 원천이 된다. 창의적 용도에 중요하기 때문에 절약하며 사용해야 할 정신력(thought force)의 보존과 심령적 에너지(psychic energy)의 알뜰한 활용을 위해서, 제어는 절대 필수적이다.

진정한 제어는 참된 가치관의 이해를 통해서 솟아나는/ 참된 가치관에 비추어 생겨나는 창의적인 교정이다

제어의 본래 목표는 마음을 비조건화(decondition)하여 마음이 자유롭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이 문장이 7 버전에 없음) 하지만 만일 제어가 전적으로 기계적이 된다거나 원래의 방향을 잊어버리게 되면, 마음을 자유롭게 하려는 본래 목표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진정한 영적 가치를 지닌 제어는 생각과 욕망의 기계적인 억압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체험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가치(관)들에 의해 인식(perception)이 전환됨으로써 저절로 자제되는 제어다. 따라서 진정한 제어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어떤 긍정적인 가치들에 의식의 관심이 집중되면, 일상 생활에 표현되고자 하는 그 가치들의 주장(claim)은 의식 안에 정신적 반응을 일으킨다; 이 정신적 반응은 그 가치들의 자유롭고 완전한 표현을 방해하는 모든 정신적 경향들을 결국 모두 제거하게 된다. 즉 순수하고 관대하고 친절한 삶의 가치를 공감하여 알아봄으로써 육욕, 탐욕, 분노의 경향성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일정하게 생각하고 반응하는 습관에 익숙해진 마음은, 과거의 사고방식과 행동에서 비롯된 인상들의 타성 때문에 새롭게 전환된 지각(知覺)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가치관의 주장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참된 가치들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지각을 교정하는 과정은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컨트롤’(제어)은 마음을 억지로 또는 기계적으로 뒤트는 것과는 다르다. 이 제어는 자체의 타성을 이겨내려는 마음의 노력이다. 이 제어는 삶의 참된 가치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도록 스스로의 지각을 교정해가는 마음(mind)의 시도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제어는 근본적으로 창의적이며, 목적에 있어 부정적일 수가 없다. 

산스카라들의 분산(dispersion)과 소진(exhaustion)

’창조적 제어’가 가능한 것은 그 빛의 근원이 모든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비록 깨달음은 산스카라의 베일에 가려 불가능하지만, 일반 사람의 의식 수준에서도 완전한 어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빛의 광선은 참된 가치들에 대한 일종의 감각(영감)으로 구성되며, 그 사람이 지닌 산스카라의 베일이 얼마나 두꺼우냐에 따라 영감의 선명도가 달라지며 이에 따라 각자의 영적 진보를 인도한다. 산스카라들을 무효화하는 과정이 바로 참된 가치들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영적 진보는 참된 가치들의 이해를 선호함으로써 산스카라들의 그릇된 가치들을 단념하는 양면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승화는 더 낮은 가치들을 더 높은 가치들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거치는 각 단계마다 흥미진진한 관심거리들로 가득하며, 충족감은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산스카라들에 갇혀 있던 정신적 에너지를 이렇게 전환시킬 때, 그 산스카라들은 분산되고 소진된다.

그치지 않는 관심에 의해 지속되는 승화 과정

승화는 오래된 산스카라들의 틀을 뚫고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자연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은 모든 단계에서 갈망자(aspirant)가 계속해서 관심을 잃지 않는다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승화가 없는 단순한 부정의 방법은 때로는 지루해질 수 있으며 공허함(vacuity)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승화는 더 낮은 가치들을 더 높은 가치들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거치는 각 단계마다 흥미진진한 관심거리들로 가득하며, 충족감은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정신적 에너지(Psychic energy)는 다음의 세 가지 영적 경로로 승화시킬 수 있다; (1) 명상 (2) 인류를 위한 사심없는 봉사 (3) 헌신

명상의 본성과 목적

명상은 ‘이상적인 대상’에 대한 깊고 꾸준한 집중이다. 어떤 ‘이상적인 대상’에 이런 식으로 집중하면, 그 사람은 몸과 마음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명상의 대상만을 의식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형성은 방지되고, 오래된 산스카라들은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적 활동을 통해 분산되고 소진된다. 마침내 그 산스카라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 집중의 강렬함 속에 영혼의 개체성은 용해되어 그 ‘이상적인 대상’ 속으로 흡수된다

명상의 종류

사람마다 적성(aptitude)이 다양하듯이, 여기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명상이 존재한다.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의 천재적 상상력은 대개 과로로 인해 메말라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명상은, 자신의 생각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 자신의 육체와 그 생각들을 객관적(objectively)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와 생각들을 완전히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데 성공한 갈망자는, 그 다음에 ‘나는 무한하다’, ‘나는 만물 속에 있다’, ‘나는 모든 것 안에 있다’ 등의 건설적인 제안을 통해 자신을 우주적 존재와 동일시하려고 한다.
선명하고 활발한 상상력을 지닌 사람은 어느 한 점에 강렬하게 집중하는 방법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점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이 방법을 피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정신적 에너지는 온갖 {이런 저런} 생각에 흩어져 있다.  한 점에 집중하는 명상은 마음을 한데 모으고 안정시키는 데 매우 유익하다; 하지만 기계적인 과정이다보니 창의적이고 지복어린 체험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형태의 명상은 다른 더 효율적인 형태의 명상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명상의 초기 단계에서 사용될 수 있다.

신의 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과 비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

더 효율적이고 깊은 형태의 명상들 이전에는 신(즉 비러벳)에 대해서 의도적이고 건설적으로 생각하는 기간이 앞선다. 신에 대한 명상이 영적으로 가장 유익하다. 신은 비인격적인 측면 내지는 인격적인 측면으로 명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신의 비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은 이것에 맞는 특별한 적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적당하다. 이 명상은 자신의 모든 생각을 신의 추상적인 존재성과 신의 ‘현상화되지 않은 존재성’(unmanifest existence)에 집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반면에 신의 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은 모든 생각을 신의 형상과 속성(특징)에 집중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집중하여 명상한 뒤, 명상의 대상 대신 명상 도중에 느꼈던 광대한 평화와 안정감을 되새겨 그 느낌 속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순간들은 상상력의 피로로 인해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그대로 격려하는 것이 좋다. 명상은 자발적이어야지, 강제(억지)로 해선 안 된다. 신성한 충동들이 샘솟는 순간에는, 상상력이 높이 비상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좋다. 이 상상의 비행은 육욕, 탐욕,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의 흐름에 의해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 이 비행은 오직 무한함과 하나가 되겠다는 애초의 목적에 의해서만 방향이 잡혀야 한다.

명상의 장애물들

집중에 성공하는 것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며 초기에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초보자는 낙담하기 쉽다. 많은 경우 그가 느끼는 실망감은 그날의 명상을 시작하고 지속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게으름이나 건강 문제와 같이 극복하기 어려울 수 있는 다른 장애물들도 있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고정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정기적으로 연습하는 명상으로 극복할 수 있다. 조용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이 명상에 특별히 좋다; 하지만 다른 어떤 시간에 해도 괜찮다.

명상에 있어 독거의 중요성

독거(solitude)는 명상에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다. 생각의 세계 안에서는, 온갖 형태와 색깔의  생각들이 서로 끊임없이 뒤섞이고 있다. 어떤 강력한 생각들은 통합을 촉진시켜 마음을 강하게 하는 반면, 어떤 하찮은 생각들은 마음을 약하게 한다. 마음은 정신적 환경에 수두룩한 각양각색의 생각들에 대해 ‘끌림’ 아니면 ‘거부감’, 둘 중 하나를 느낀다. 스스로만의 이상적인 생각(ideal thought)에 확립되려면, 이런 여러 잡다한 생각들의 영향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목적에 있어 독거(solitude)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다. 독거는 정신적 에너지(mental energy)의 절약과 집중력의 증가를 의미한다.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마음에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들이 더이상 없으므로 그대는 스스로의 내면 속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게 되고, 그대에게 힘이 되고 광대한 평화와 지복을 줄 수 있는 더 높고 고귀한 {생각의} 흐름에 마음을 여는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사심 없는 봉사(Selfless service)

신의 ‘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과 ‘비인격적인 측면’에 대한 명상을 실천하기 위해선 우선 의식이 가슴의 성전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신의 ‘우주적인 측면’에 대한 집중을 위해서는 {의식의 외부적 활동인} 인류를 위한 사심없는 봉사가 가장 효과적이다. 인류를 위한 봉사에 완전히 몰두할 때, 그 사람은 명상할 때와 다름 없이 자신의 몸이나 마음, 심지어는 이들의 기능마저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명상할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산스카라들은 형성되지 않는다. 더불어 마음을 속박하는 오래된 산스카라들도 부스러지고, 분산된다. 이제는 그 사람의 관심이 자신의 이익이 아닌 남들의 이익에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그 에고의 핵심은 더이상 자양적 에너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사심 없는 봉사는, (항상 구속력을 발휘하는) 산스카라들 안에 묶여있는 에너지들을 전환시키고 승화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사심 없는 봉사의 시사점

사심없는 봉사는 봉사의 결과나 보상에 대한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을 때, 그리고 스스로의 편안과 안락에 대한 생각이나 남의 오해를 살 가능성에 대한 근심이 전혀 없을 때에만 성취된 것이다. 남들의 복지(welfare)에 전적으로 열중하다 보면,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 틈도 없어진다. 그리고 스스로의 편안이나 안락, 건강과 행복에 대해서는 더이상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대는 그들의 안락(wellbing)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한다. 그들의 안락이 그대의 편안함이 되고, 그들의 건강이 그대의 기쁨이 되며, 그들의 행복이 그대의 즐거움이 된다. 그들의 삶 속에서 그대 자신을 잃음으로써 그대의 삶을 찾는 것이다. 그대는 그들의 가슴(heart) 속에 살며, 그대의 가슴은 그들의 안식처다. 가슴과 가슴이 하나가 되면, 그대는 그 사람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게 되다. 타인을 돕는 그대의 행위나 위안의 말은 그들에게 부족한 무엇이든 제공해준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감사와 호의로 인해, 그대는 준 것 보다 실제로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

봉사를 통해 얻는 자유와 충족

따라서 그대의 삶도 남을 위해 삶으로써 증폭되고 확장된다. 그래서 사심 없는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이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의 의무감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명성을 얻기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심 없는 봉사는 남에게 봉사할 때 느끼는 행복감이 남에게 봉사를 받을 때 느끼는 행복감과 동일할 때만,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사심 없는 봉사의 이상은 권력욕과 소유욕의 산스카들로부터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며, 자기 연민과 질투의 산스카라들, 그리고 이기심이 야기한 악행의 산스카라들로부터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준다

사랑

사랑에 의해 영감받은 ‘사심 없는 봉사’와 명상은 둘다 자발적이다. 그래서 최고(Highest)의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길로서 마땅히 사랑이 손꼽히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영혼은 비러벳(Beloved)에 완전히 몰두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행위에 대해서는 초연해진다. 이러한 사랑은 삶의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열어줌으로써,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형성을 막으며 오래된 산스카라들의 무효화(undoing)를 야기한다. 사랑의 강렬함처럼 ‘자아를 잊은 상태‘(self-forgetfulness)를 자연스럽고 완전하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산스카라들의 속박에서 의식을 해방시키는 방법들 중 가장 최고의 자리가 ‘사랑’에 주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정화력

사랑은 해탈(emancipation)에 이르는 다른 경로들이 지닌 이점들을 {헤아리고} 그 자체 안에 다 내포한다; 사랑은 그 자체가 가장 탁월하고 효과적인 {영적} 경로다.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행복함을 찾는다는 두 가지 특징을 동시에 지닌다. 사랑은 독점적으로 비러벳에게만 전심을 다해 모든 것을 바치며, 비러벳 외의 다른 모든 대상의 요구(주장)에 굴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신적 에너지(mental energy)는 다른 곳으로 셀 여지가 없어지고, 집중은 완전해진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매우 독특하다. 사랑에 든 사람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생명적,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들을 한데 모아 ‘비러벳의 목적’을 위해 오롯이 바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랑은 ‘역동적인 힘'(dynamic power)의 원천이 된다. 진정한 사랑의 긴장은 너무나도 극심하기 때문에, 어떤 낮선 느낌일지라도 그 즉시 추방되고 만다. 따라서 배출력과 정화력에 있어, 사랑에 비할 상대는 없다.

사랑은 창조 세계에 편재한다

사랑은 전혀 부자연스럽거나 인위적이지 않다. 사랑은 진화 과정의 시초부터 존재했다. 무기물의 단계에서, 사랑은 응집력(cohesion)이나 인력(引力)의 형태로 투박하게 표현된다. 사물들을 서로 끌어당기고 붙어있게 해주는 자연적인 친화력(affinity)도 일종의 사랑이다. 천체(天體)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중력의 끌어당김도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랑 중 하나다. 사랑은 드디어 생물체의 단계(organic stage)에 이르러 스스로를 감상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아메바와 같이 가장 낮은 형태로부터 가장 진화된 인간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랑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면, 의식적인 희생에 의해 그 사랑의 가치는 더욱더 높아진다.

의식적인 희생으로 표현되는 사랑

사랑의 희생은 너무나도 완전하고 아낌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면서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은 줄수록 더 주고 싶어 하고, 줄수록 자신이 주었음을 덜 의식한다. 진정한 사랑의 냇물은 계속해서 깊어져만 가며 그칠 줄을 모른다. 그저 주는 것이 이것의 단순한 표현이다. 비러벳(Beloved)의 복합적인 성품은, 사랑이 가장 신경쓰고 조심히 돌보는 최고의 관심사다. 사랑은 온갖 일천 가지의 방법을 동원하여 오로지 비러벳의 기쁨만을 쉴 새 없이 그리고 무자비하게 추구한다. 비러벳의 단 하나의 소망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또는 무시나 무관심으로 인한 아무리 티끌만치의 고통이라도 그것을(생략) 덜어드릴 수만 있다면, 사랑은 망설임 없이 온갖 고통을 환영할 것이다. 비러벳(Beloved)을 위해서라면 러버(lover)는 기꺼이 자신의 파멸을 맞이할 자세가 되어 있다. 비러벳에 대한 근심 걱정과 고뇌로 야위어, 사랑은 자신이 거주하는 몸마저 돌보지 않게 된다. 사랑은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으며, 러버에게 비러벳은 일생 최고의 관심사다. 사랑의 성막(tabernacle)은 어쩔 줄 모르는 초조함에 억눌려 터지고, 더없는 달콤함과 사랑을 가득히 내뿜는 냇물들(streams)을 탄생시킨다; 이 현상은 러버가 스스로의 한계들을 돌파하여 비러벳의 존재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잃을 때까지 지속된다.

헌신의 단계들

사랑이 깊고 강렬할 때, 이를 박티(Bhakti) 또는 헌신이라고 한다. 초기 단계의 헌신은 상징에 대한 숭배, 신들에게 바치는 기원, 계시된 경전들에 대한 공경과 충성, 또는 추상적 사고로 최상(the Highest)을 상상함으로써 표현된다. 보다 더 진보된 단계의 헌신은 인류의 복지에 대한 관심과 인류에 대한 봉사를 통해, 성인(saint)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통해, 그리고 영적 스승(Master)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통해 자체를 표현한다. 이 단계들은 각기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그에 해당되는 상대적인 결과들을 불러온다. 살아있는 완벽한 스승에 대한 사랑은 헌신의 단계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단계다; 이 헌신은 머지 않아 파라-박티(Para-bhakti) 즉 신성한 사랑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파라-박티(Para-bhakti)

파라-박티는 강렬해진 박티가 아니다. 파라-박티는 박티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파라-박티 단계의 헌신은 일편단심일 뿐 아니라 가슴(heart)의 극심한 초조함이 동반되며, 비러벳과 합일되고픈 끊임 없는 간절함이 동반된다. 여기에는 자신의 몸과 그 관리에 대한 무관심, 주변 환경으로부터의 격리, 자신의 외모나 남들의 비난에 대한 철저한 무시가 따르는 동시에, 비러벳에 이끌리는 신성한 충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잦아진다. 이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유익하다; 그 이유는(->왜냐하면 or 삭제. 앞에도 ‘그’가 있어 어색) 사랑 자체가 육화된 이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며, 최고의 비러벳인 그 분보다 러버에게 완벽하게 반응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스승(Master)으로부터 러버가 받는 사랑의 순결함과 달콤함, 리고 사랑의 효력은 이 최고 단계의 사랑만이 지닐 수 있는, 그(‘그’가 세 번 나오므로 ‘그리고’를 생략. 마지막 ‘그’를 ‘어느’나 ‘어떤’으로 칠 수 있음) 무엇도 능가할 수 없는 영적 가치에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