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6 산스카라의 제거 1부

산스카라의 제거

제1부

산스카라들의 중단, 마모, 풀림

산스카라들은 참나-계몽을 가로막는다

인간이 참나-계몽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산스카라들, 즉 과거의 체험으로 인해 축적된 인상들에 의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진화를 시작했던 ‘의식하고픈 의지’는 인간 형태에 이르러 의식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의식은 대령大靈(Oversoul)에 대한 앎(knowledge)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개체적 영혼은 영혼 고유의 참된 본성인 대령을 체험하는 데 의식을 사용하는 대신, 산스카라를 체험하는 데 사용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이다->산스카라를 체험하는 데만 사용하려는 충동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산스카라적 체험은 (온갖 사람과 사물들로 가득찬 세상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한정된 신체’라는 환상에 영혼을 가두어버린다.

산스카라로부터의 석방을 확보하는 문제

개체적 영혼들은 바다 속의 물방울들과 같다. 바다 안의 각각의 물방울들이 근본적으로 바다와 같듯이, 바하스 즉, 환상에 의해 개체화된 영혼도 여전히 대령이며, 실제로는 대령과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을 감싸고->둘러싸고 있는 산스카라들은, ‘물방울-영혼'(drop-soul)이 참나-계몽을 이루지 못하게 막으며 이원성의 영역 안에 가둔다. 영혼이 자신의 정체가 대령임을 의식적으로 깨달으려면, 의식을 유지한 상태에서 산스카라들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의식의 진화 과정에 기여한 산스카라들은, 이제 대령의 본성을 깨달으려는 의식의 노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의식하고픈 의지’가 당면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식을 더욱 진화시키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의식을 산스카라들로부터 석방시키느냐’가 된다.

산스카라로부터의 석방을 확보하는 5가지 방법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석방은 다음의 5가지 방법으로 일어난다:

1. 새로운 산스카라의 창조 중단.
이 방법은 끊임없이 재개되는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창출 활동을 중단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산스카라의 형성을 막대기에 실을 감는 것에 비유한다면, 이것은 막대에 더이상 실을 감지 않고 중지하는 것에 해당된다.
2. 오래된 산스카라의 마모(wearing out).
산스카라들이 행동이나 체험으로 표현되지 않도록 억제되면, 그들은 점차적으로 마모된다. 실의 비유를 쓴다면, 이 과정은 실이 있는 그 자리에서 닳아 해지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3. 과거 산스카라의 풀림.
이 과정은 지나간 산스카라들의 형성 과정을 정신적으로 역전시켜 이들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실의 비유를 계속 쓰면, 이것은 감긴 실을 푸는 것과 같다.
4. 특정(일부) 산스카라의 분산과 소진.
산스카라들에 묶여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승화시켜 다른 경로로 전환시킨다면, 산스카라들이 분산되고 소진되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5. 산스카라의 완전한 근절(산스카라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
이 방법은 산스카라들을 완전히 전멸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실의 비유를 쓴다면, 이것은 가위로 실을 자르는 것이다. 이러한 산스카라들의 최종적 멸절은 오직 완벽한 스승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꼭 주의하여야 할 사항은, 위에서 언급한 5가지 방법들은 종류별로 정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과 산스카라들을 무효화하는 여러 구체적인 방법들은 복합적으로 함께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위의 5가지 방법들은, 산스카라들이 제거되는 도중에 벌어지는 영적인 과정을 원칙별로 구분한 것일 뿐이다. 편의를 위해 이번 1부에서는, 앞서 설명한 첫 세 가지의 원칙들(즉, 새로운 산스카라의 중단, 과거 산스카라의 마모, 감긴 산스카라의 풀림)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방법들을 먼저 다룰 것이다. 나중의 두 가지 원칙들(즉, 승화를 통한 산스카라의 분산과 소진, 산스카라의 완전한 근절)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방법들은 제2부와 제3부에서 설명할 것이다.

단념/포기(Renunciation) 

끊임없이 축적되는 산스카라들의 속박으로부터 마음이 석방되려면,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창출이 중단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산스카라들의 증식은 단념(renunciation)을 통해 중단시킬 수 있다. 단념에는 외적 단념과 내적 단념, 두 가지가 있다. 외적 단념, 즉 물질적 단념은 마음이 집착하는 모든 것들(집, 배우자, 자녀들, 친구들, 부, 안락, 물질적 쾌락 등)을 내려놓는 것으로 구성된다. 내적 단념, 즉 정신적 단념은 모든 욕구, 특히 육체적 쾌락의 대상에 대한 욕구를 버리는 것으로 구성된다.
외적 단념 그 자체만으로 내적 단념이 반드시 따라온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많은 경우, 외적 단념은 내적 단념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 영적인 자유는 내적 단념으로 이루어지지, 외적 단념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외적 단념은 내적 단념을 이루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자신의 소유물들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졌거나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의 연결을 끊는다. 이것은 그가 포기한 것들이 더이상 그에게 새로운 산스카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산스카라의 형성 과정을 중단시킴으로써, 그는 산스카라들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외적 단념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이것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단념함으로써 그는 과거의 속박들 역시 단념한 것이다. 그의 소유물들과 연결된 오래된 산스카라들은 그의 마음에서 분리되며, 표현이 억제된 그 산스카라들은 마모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외적 단념은 산스카라들의 마모에 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부와 권력을 소유한 사람은 사치와 방종의 삶에 노출된다. 그의 상황은 유혹에 더 빠지기 쉬운 환경이다. 인간은, 환경이라는 조각가가 찍고 파서 빚은 것이 그 사람의 대부분을 형성한다. 한 사람이 자신의 환경을 넘어설 수 있는가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다. 만약 의지가 강하다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온갖} 행동과 반응을 하는 와중에도 그의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자유롭다. 만약 그가 약하다면, 주변 환경의 영향에 굴복하고 만다. 그러나 설사 그가 강하다고 해도, 집단적인 형태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에 휩쓸리기 쉽다. 맹렬하게 밀려오는 사상의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주변상황에 굴복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주변 환경에 저항한다 해도 언젠가는 어떤 집단적 열정에 휩쓸려 이제는 내려놓을 수 없는 어떤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러한 환경의 영향에 저항하고 그것을 이겨내기란 어렵다; 오히려 그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쉬운 길이다. 사치와 유혹에 둘러싸이지만 않았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소박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모든 불필요한 것들의 단념은 산스카라들의 마로를 돕기 때문에 ‘자유의 삶'(life of freedom)에 기여한다.

독거(solitude)와 단식

 

독거(獨居)와 단식은 특별한 영적 가치가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외적 단념이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속적 삶의 스트레스를 벗어나 가끔씩 고독 속으로 은거하는 것은, 사교적인 본능과 연관된 산스카라들을 마모시키는 데 유용하다. 그렇다고 해서 독거 자체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독거와 마찬가지로, 단식에도 상당한 영적 가치가 있다. 먹는 것은 충족이고, 단식은 거부다.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단식은 육체적 단식이다; 식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먹는 즐거움과 집착 때문이 아니라 단지 신체의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은 정신적 단식이다. 외적 단식은 정신적 단식을 이루기 위해 음식과의 직접적 접촉을 피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음식은 삶에 필수적인 요소며, 음식에 대한 계속적인 거부는 건강에 심각한 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외적 단식은 주기적으로, 단기간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식으로 음식에 대한 갈망을 극복하는 데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동원하여 음식에 대한 갈망을 이겨내면, 마음이 음식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나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외적 단식은 아무런 영적인 가치가 없다. 단식은 자기 주장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신체의 한계에 도달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해서도 안 된다. 장기간의 금식을 통한 자기 고행이 반드시 식욕으로부터 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금식의 반작용을 초래하여 음식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생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외적 단식을 영적 목적을 위해서 적당히 한다면, 이는 내적 단식의 성취를 돕는다. 외적 단식과 내적 단식이 진심어리고 충실할 때, 식욕과 연결된 산스카라가 풀리기 시작한다.

속죄(penance)

여러 다른 종류의 산스카라들은 속죄(penance)를 통해 풀 수 있다.  속죄는 한 사람이 어떤 잘못된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느끼는 죄책감을 확대하고 표현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회개/참회(repentance)는 속죄를 불러 일으키는 다양한 상황이나 사정을 되새기거나,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자신의 마음을 연약한 상태로 놔두거나, 과거의 일들을 가슴 깊은 후회와 예리한 자기 비난과 함께 의도적으로 회상하는 것 등으로 촉진시킬 수 있다. 이러한 속죄는 그 행위를 야기한 산스카라들을 풀어준다. 깊은 감정을 동반한 자기 비난은 분노, 탐욕, 육욕의 산스카라들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제되지 않은 탐욕과 분노, 육욕 때문에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언젠가 그는 자신을 죽일 듯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이라는 반응을 겪게 되어 있다. 만일 이때 그가 저지른 악행의 책임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그의 의식에 동반된 감정적 강렬함은 자기-비난(self-condemnation)의 소재인 악행을 야기한 그 경향성->경향을 소모시키게 된다.
자기-비난은 여러 형태의 자기-고행(self-mortification)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어떤 갈망자들은 참회하는 상태에 들면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자책의 표현은 전반적으로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기적인 수행법으로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or 정기적인 수행법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표 각주 처리} 어떤 힌두교 갈망자들은 겸허함을 기르기 위해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의 발에 절을 하는 것을 의례로 한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들은 공감적이며 다정한 지도 아래 고행을 행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속죄가 주의깊게 숙달되고 수행될 때, 바람직하지 않은 사고의 경향성과->경향과 행동 습관은 언젠가 반드시 정신적으로 제거된다; 그래서 순수한 봉사의 삶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속죄에 있어 늘 신중히 유념해야 할 것은, 마음이 과거의 그릇된 행동을 너무 오랫 동안 곱씹어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조차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병적인 습관으로 발전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감정적인 사치는 대개 무분별한 정신력의 낭비며, 산스카라들의 풀림이나 마모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속죄는 그날그날의 결점들에 대해 나날이 뉘우치는 참회(repentance)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속죄는 자신의 실수들에 대해 우울하고 과도하게 숙고하는, 지루하고 메마른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심어린 속죄는, 그릇된 행동에 대해 영원히 슬퍼하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속죄는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그 행위를 미래에는 더이상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다. 만일 속죄가 자신감이나 자존감의 부족함으로 이어진다면, 그릇된 행위의 반복을 방지하려는 속죄의 진정한 목적을 벗어난 것이다.

욕망 충족의 자제
 
욕망의 표현과 충족을 거부하는 것 또한 산스카라들의 마모와 풀림에 있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욕망을 거부하는 능력 또는 기질은 사람마다 다르다. 욕망의 충동이 급속도로 강하게 솟아오르는 사람들은 그 욕망을 근원에서 제압하지 못한다; 그래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음으로써 그 욕망의 충족을 자제할 수는 있다. 강한 욕망의 솟아오름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욕망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행동의 통제를 통한 욕망의 거부는, 미래에 뿌려질 수 있는 욕망의 씨를 말린다. 행동의 통제를 통한 욕망의 거부는, 미래에 뿌려질 수 있는 욕망의 씨를 말린다.
반면에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면, 어떤 인상들은 소모되고 소진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인상들도 창조한다; 그리하여 그는 미래에 충족을 요구할 욕망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욕망의 표출과 충족을 통한 인상들의 소모 및 소진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산스카라들로부터 해방을 이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욕망들이 솟아날 때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을 막으면, 이 욕망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사색(cogitation)할 충분한 겨를이 생긴다. 이러한 사색의 결과, 그 욕망에 해당하는 산스카라들은 마모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인 사색이 상상 속에서 그 욕망을 탐닉하는 방종의 형태를 취한다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고의적으로 마음 속에서 욕망을 반기고 품는 일은, 어떤 영적 가치도 없는 사색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기적(subtle) 산스카라들의 창출을 야기할 수 있다. 사색(명상)에는 의식 안에 일어나는 욕망에 대한 어떤 의식적인 승인이 함께 하면 안 되고, 욕망에 대한 기억을 계속 유지하려는 노력도 없어야 한다. 욕망의 표출과 충족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거부되고, 그 욕망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사색적 의식의 강렬한 불을 거치도록 하면,  욕망의 씨앗은 시들어 소모된다. 욕망들의 거부와 육체적 반응의 억제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자동적이며 자연스러운 과거 산스카라들의 무효화(negation)를 가져온다.

무욕의 상태(Desirelessness) 

 

욕망의 거부는 진정한 자유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상태인 무욕(無慾), 즉 원함이 없는 상태의 준비 과정이다. 원함(wanting)은 충족이 되든 되지 않든, 반드시 구속력을 지닌다. 욕망이 충족되면, 더 많은 원함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신(spirit)의 속박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실망과 고통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야기하는 산스카라들은 또다른 방식으로 정신(spirit)의 자유를 구속한다. 

마음(mind)의 외적, 내적 자극들은 원함이나 (원함의 또다른 형태인) 싫어함의 상태로 마음을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에, 결국 원함에는 끝이 없게 된다. 외적 자극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이 있다. 내적 자극은 현생의 기억으로 인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과, 진화 과정과 인간의 삶들을 거치는 도중에 의식에 축적된 산스카라들 전체로부터 솟아나오는 것들이 있다. 마음이 모든 외적, 내적 자극들이 있는 상태에서도 흔들림 없이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훈련되면, 무욕(nonwanting)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자극의 이원성(opposites)을 초월한 절대적인 실재를 제외한) 그 무엇도 원하지 않음으로써, 원함의 산스카라들을 푸는 것이 가능해진다.

무욕의 자세와 ‘네띠 네띠’ 원칙    

원함은 마음의 균형이 흐트러진 상태고, 무욕은 마음의 균형이 이루어진 안정된 상태다. 흔들리지 않는 무욕의 상태는, (즐겁거나 고통스러운, 유쾌하거나 불쾌한) 모든 자극들의 얽매임으로부터 끊임없이 해방상태를 유지할 경우에만 지속될 수 있다. 이 세상의 기쁨과 슬픔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마음이 외적 및 내적 자극들에서 완전히 초연해야만 한다. 마음이 아무리 스스로의 건설적인 제안으로 방비를 계속해서 강화한다 해도, 주변환경 및 정신적 환경의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파도에 마음의 어떤 외딴 전초기지의 방어벽이 휩쓸릴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그대는 당분간이나마 완전히 길을 잃은 듯할 것이다; 그러나 비집착(nonattachment)의 자세는 그대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

이 자세는 ‘네띠 네띠'(neti neti),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오’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자세는, 한정적인 체험의 매혹적인 반대들(opposites)에 대해 주의깊은 초연함(detachment)을 유지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맘에 드는 자극들에 대해서는 내면적으로 집착을 유지하면서, 불쾌한 자극만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이 반대들(이원성)의 밀어닥침에 흔들리지 않고 평형을 유지하려면, 유쾌한 자극들의 표현에 집착을 유지할 수 없으며 그것들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평형 자세(equipoise)는, 이원성의 양쪽 모두를 완전히 초연한 자세로 맞이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모든 금욕주의의 모든 측면들이 지닌 부정적인 요소

긍정적(positive) 산스카라들이 의미하는 ‘좋아, 하자'(yes, yes)는 ‘아니, 하지 말자'(no, no)라는 부정적 선언을 통해서만 무효화할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요소는 단념, 독거, 단식, 속죄, 욕망 충족의 보류, 무욕으로 표현되는 금욕주의의 모든 방면에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이 모든 방식과 자세의 조화로운 조합은, 무리하게 힘들거나 고역스럽지 않은 건강한 형태의 금욕주의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보장하기 위해선, 그들이 지닌 부정적인 요소들이 왜곡되거나 더 많은 한정들을 가져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만 한다. 

금욕주의의 삶을 살도록 마음에 강요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삶에 금욕적인 노선을 적용하려는 어떤 강제적인 노력도 오히려 여러 선한 자질들의 성장을 방해하기 쉽다. 인간 본성의 건강한 자질들이 천천히,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게 허용되면, 상대적 가치들에 대한 지식이 펼쳐지고 그럼으로써 자발적인 금욕주의의 삶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마음에 금욕적인 삶을 강요하거나 재촉하는 모든 시도들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하기 쉽다.

많은 경우, 어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벗어나는/석방되는(최종검토 리스트) 과정에는, 또 다른 어떤 새로운 집착이 형성되는 과정이 동반된다. 가장 물질적인 형태의 집착은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마음은 사물들의 세계와 분리될 때, 주관적인 종류의 더 섬세한(finer) 집착에 이르는 경향이 있다.

마음이 어느 정도의 초연함을 기르는 데 성공한 뒤에는, 고고하고 거만한 태도로 표현되는 기적(subtle) 형태의 자기중심벽(egotism)이 자리잡기 쉽다. 초연함(detachment)은, 에고(ego)가 달라붙을 수 있는 또다른 중심점(nucleus)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세속생활의 스트레스와 혼잡함을 감당할 능력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순수하고 무한한 존재(Infinite being)를 제한하는 요소들의 포기는, 순수함 및 깨우침에서 비롯되는 매우 강한 태도를 통한 포기여야만 한다; 삶의 투쟁과 갈등에 대한 무력함에서 비롯된 포기의 표현이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진정한 초연함은, 깨달음에 대한 심오한 갈망도 없이 강박관념이 될 수 있는 ‘네띠 네띠’의 공식에만 무조건 매달리는 것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부정적 공식에 대한 이런 식의 강박 관념은 많은 경우 그 유혹들에 대한 내적 애착심과 나란히 공존한다. 초연함은 그 사람 성품의 불가분한 일부분이 되어야 전심적이고 온전해질 수 있다. 

음성 산스카라들도 사라져야만이 깨달음이 따를 수 있다

진화 과정과 인간의 환생 기간 동안 축적해온 양성 산스카라들(positive sanskaras)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 아니'(no no)의 부정적 의지-선언/결심(assertion)의 행사뿐이다. 물론 이 과정은 양성 산스카라들의 파괴를 가져온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마음을 조건화(condition)할, 그리하여 또다른 새로운 문제를 창출하게 될 음성 산스카라들(negative sanskaras)의 형성도 초래한다. ‘아니, 아니’의 의지-결심(assertion)의 강도가 충분히 강해야지만이 모든 물질적, 기적, 정신적 산스카라들을 뿌리뽑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결국 버려야만 하는 방법이다. 영적 체험의 최종적 결과란, 고작 메마른 부정으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부정적인 공식(negative formula)에 귀속시키는 것은 영적 체험을 지적인 개념의 수준으로 한정시키는 것이다. 부정적인 공식은 마음이 스스로의 조건화(condition)를 제거하는 용도로 활용해야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인생의 최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그 이전에 반드시 버려져야만 한다.

’생각’(thought)의 활동으로 인해 설정된 제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각’의 활용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 목표가 일단 완료되고 나면, ‘생각’ 그 자체도 버려져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마음을 초월하는 과정이며, 마음과의 동일시를 버림으로써 그리고 마음 속 욕망들과의 동일시를 버림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육신뿐 아니라 모든 생각들, 그리고 모든 낮은 충동들을 ‘객관적’(objectively)으로 바라보는 것은 초연함의 지복(至福)에 확립되는 것과 다름 없으며, 모든 산스카라들을 무효화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이 말의 의미는 ‘나는 이 몸이다’ ‘나는 이 마음이다’ ‘나는 욕망이다’ 등 스스로가 초래한 환상에서 영혼이 자유로워졌다는 뜻이며, 깨달음의 단계인 ‘나는 신이다’의 상태를 향해서 한 걸음 나아갔다는 뜻이다. (이 ‘나는 신이다’의 단계는 ‘아날 하크'(Anal Haqq) 또는 ‘아함 브라마스미'(Aham Brahmasmi)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