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4 천지창조의 기원과 종결

‘천지창조’의 기원과 종결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있는 그대로의 궁극적 실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은 천지창조의 기원과 목적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있어 벽에 부닥치게 되어 있다. /미궁에 빠지게 되어 있다. /미로를 헤매이게 되어 있다/ 궁지에 처하게 되어 있다. 고대의 과거는 불가해한 신비에 가려진 듯 하고, 미래는 완전히 봉인된 책인 듯 하다. 인간의 마음은 마야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선 기껏해야 우수한 추측 이상은 할 수가 없다. 인간의 마음은 이들에 대한 최종적 지식에 도달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 관해서 무지한 상태로 만족하지도 못한다. “어디에서부터?”와 “어디로?”는 인간의 마음에 신성한 초조함을 일으키는, 불후의 절실한 두 질문이다.

기원과 종결

인간의 마음은 이 세계의 기원을 찾는 연구에 있어, ‘무한 후퇴 이론'(infinite regress)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목적도 끝도 없이 그저 변해만 가는 것이라는 이론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만일 진화 과정에 있어 최초의 원인이 없다면, 그것은 이해불가한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도달할 종점도 없다면 진화에는 그 어떤 방향도 의미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진화 과정에 있어 최초의 원인도 도달할 종점도 없다면, 그것은 방향도 의미도 없는 이해불가한 것이 될 것이다. 어디에서부터?”와 “어디로?”, 이 두 질문은 진화하는 창조세계에 기원과 종결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진화의 시작이 시간의 시작이며, 진화의 끝이 시간의 끝이다. 진화에 기원과 종결이 있는 것은, 시간에도 기원과 종결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고 있는 이 세상의 시작과 끝 사이에는 수많은 주기들(cycles)이 있다; 그러나 ‘우주적 진화 과정’은 이 주기들을 관통하여 계속해서 일어난다. 진화 과정의 실제적 끝을 마하프랄라야(Mahapralaya) 또는 ‘이 세상의 최종적 전멸’이라고 한다; 이때 온세상은 기원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즉, 무(Nothing)가 된다. 세계의 마하프랄라야는 사람의 잠에 비유될 수 있다. 사람이 깊은 잠에 들 때 다양한 체험의 세상이 완전히 사라지듯이, 마하프랄라야가 올 때 마야의 창조물인 객관적 우주 전체도 완전히 사라져 무(nothingness)가 된다. 이 때 우주는 전혀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진다. 

실재는 영원하고(timeless) 절대적이다

진화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우주는 그 자체로 상상에 불과하다. 사실은 불가분하고 영원한 단 하나의 실재(Reality)가 있을 뿐이며, 이것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실재는 시간을 초월한다. 이 무기한적인(timeless) 실재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과정(time-process) 전체는 순수한 상상에 불과하며, 지나간 수십억 년과 다가올 수십억 년은 단 1초의 가치도 없다. 마치 이 모두가 존재한 적도 없었던 것과 같다.
따라서 이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가 그 유일한 실재(One Reality)로부터 나온 실질적인 결과물이라 볼 수는 없다. 만일 이 우주가 유일한 실재의 결과물이라면, 실재는 하나의 상대적 개념(relative term)이 되거나 {실재와 상상이 합성된} 일종의 합성적인 존재(composite being)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유일한 실재는 절대적이다.

실재와 무

유일한 실재는 안에 모든 존재를 포함한다. 실재는 유(Everything)다; 그러나 자체의 그림자로 무(Nothing)를 지닌다. ’전체-포괄적인 존재'(all-inclusive existence)라는 개념에는, 그 무엇도 존재의 바깥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 암시된다.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비존재(nonexistence), 즉 무(Nothing)의 개념은 존재(being)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정의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비존재’ 즉 ‘무’는 ‘존재’를 보완하는 측면이 된다. 그렇다고 ‘무’가 고유의 분리되고 독립된 존재성을 갖췄다고 볼 수는 없다. ‘무’는 그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다. ‘무’는 그 자체만으로는 그 무엇의 원인도 될 수 없다.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는 ‘무’, 그 자체만에서 나온 결과물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유일한 실재에서 나온 결과물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는 과연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실재(Reality)와 우주

다면적으로 진화하는 우주는, ‘유일한 실재’와 ‘무’가 혼합되면서 발생한다. 우주는 ‘유일한 실재’의 배경에 ‘무’가 비추어질 떄, ‘무’에서 솟아난다./우주는 ‘무’가 ‘유일한 실재’를 배경으로 드리워질 때, ‘무’에서 솟아난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가 부분적이나마 유일한 실재의 결과물이라거나, 조금이라도 실재하는 요소를 지닌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주는 ‘무’에서 나온 결과물이며, 아무 것도 아니다. 우주는 존재성을 지닌 듯할 뿐이다. 우주가 존재하는 듯한 원인은, ‘유일한 실재’가 말하자면 ‘무’의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즉 ‘무’가 ‘유일한 실재’에 더해질 때의 결과물이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다.
무한하고 절대적인 ‘유일한 실재’는 이로 인해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다. ‘유일한 실재’는 절대적이기에, 그 어떤 더함이나 뺌에 의해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 ’유일한 실재’는 언제나 있던 그대로 있으며, 그 자체로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무’로부터 솟아난 천지창조의 파노라마와는 무관하게 관심도 없이 남아있다. ‘무’는 수학의 영(0)의 가치에 비교될 수 있다. 영(0) 스스로는 양(+)의 가치가 없으나, 다른 번호에 덧붙었을 때 다수(many)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진화하는 다면적 우주는 ‘무’가 유일한 실재와 결합될 때, ‘무’로부터 솟아난다.

자신과 주변 환경 사이의 상상의 분리  

진화 과정 전체는 상상의 영역 안에서 벌어진다. ‘유일한 실재의 바다'(one ocean of Reality)에 실체 없는(apparent) 상상의 동요가 일어나면, 이로부터 각각의 분리된 의식의 중심들로 구성된 다면적 세계가 솟아난다. 여기에는 생(生)을 자아(self)와 비-자아(not-self)로 나누는, 즉 ‘나’와 ‘환경’으로 나누는, 기본적인 분리가 수반된다. 그러나 의식은 (실제로는 분리될 수 없는 전체성을 상상으로 나눈 일부인) 이 ‘한정된 자아’와의 동일시에 영원히 만족할 순 없다; ‘한정된 자아’의 허위성과 불완전성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은 끊임없는 초조함에 갇히게 되고, 이 초조함은 의식으로 하여금 ‘비-자아’와의 동일시를 시도하게 만든다. ‘비-자아’적 부분 즉 주변 환경 중에서 의식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 성공한 것들은, ‘내 것’의 형태로 자아와 연계된다. 그리고 ‘비-자아’적인 부분 중에 자신과 성공적으로 동일시하지 못한 부분들은 주변환경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그 자아를 제한하고 자아와 대립되는 요소가 된다.
따라서 의식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이원성의 종말에 이르는 대신, 그것의 변형에만 이르게 된다. 의식이 헛된 상상의 작용에 지배받는 한, 이원성을 끝내는 데 성공할 수 없다. 비-자아적인 요소들(즉, 주변환경)과 동화되려는 의식의 다양한 시도들은, 애초의 이원성을 무수히 다양한 형태의 생소하지만 전과 다름없는 이원성으로 대체하는 결과만을 낳는다. 주변 환경의 특정 부분들에 대한 수용과 거부는 각각 ‘원함’과 ‘원하지 않음’으로 표출된다; 이에 따라 즐거움과 고통, 좋음과 나쁨 등의 반대극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수용’도 ‘거부’도 결코 이원성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올 수 없으며, 그래서 의식은 이 반대극들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게 된다. 개체의 전체적 진화 과정은 이 반대극들 사이를 진동하며 오가는 특성을 지닌다.

산스카라의 철저한 결정론

한정된 개체의 진화 과정은, 수억겁에 걸쳐 그 개체가 축적해온 산스카라들에 의해 완전히 정해진다; 이 모든 것도 환상에 속하긴 하지만, 산스카라의 결정론은 자동적이며 철두철미하다. 모든 행위와 체험은 (아무리 짧은 순간의 것일지라도) 정신적 신체(mental body)에 인상(impression)을 남긴다. 이 인상은 정신적 신체에 객관적(objective) 수정을 가한다; 같은 하나의 정신적 신체가 계속 유지되듯이, 개체가 축적해온 인상들도 여러 생애를 거쳐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축적되어 온 산스카라들이 (정신적 신체에 단지 잠재적으로 남는 대신) 스스로를 표현하기 시작하면, 개체는 이것을 욕망으로서 체험한다; 즉 그 욕망을 주관적(subjective)으로 감지한다. 객관성과 주관성은 산스카라의 두 측면이다: 객관성은 산스카라가 잠재된 수동적 상태고, 주관성은 산스카라가 발현되는 활동적 상태다.
축적된 산스카라들은 활동적인 단계를 통해, 한정된 자아가 체험해야 할 각각의 체험과 행위를 일일이 정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많은 양의 필름이 필요하듯이, 한정된 자아의 하나의 동작을 결정하는 데도 많은 경우 수많은 산스카라들이 관여된다. 산스카라들은 이런 식으로 ‘표현’과 ‘충족’(실현)의 체험을 통해 소모된다. 약한 산스카라들은 정신적으로(mentally) 소모되고, 좀더 강한 산스카라들은 욕망의 형태 내지는 상상 속의 체험을 통해 기적으로(subtly) 소모되며, 강력한 산스카라들은 육체적 활동을 통해 표현됨으로써 물질적으로(physically) 소모된다.
산스카라들이 소모되는 과정은 이렇게 계속해서 진행되지만, 산스카라들로부터의 해방에는 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행동을 할 때뿐 아니라 이미 있는 산스카라들을 소모하는 과정에서도 불가피하게 새로운 산스카라들이 창출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산스카라의 짐은 계속해서 늘어만 가고, 개체는 스스로 그 짐을 떨쳐버리는 문제에 대해 무력함을 맞이하게 된다.

반대극들을 통한 균형

어떤 특정한 행위나 체험을 통해 축적된 산스카라들은, 그와 비슷한 행위나 체험으로 마음이 유인되도록 한다. 그러나 그 경향이 한계점에 이르면 자연적인 반작용에 의해서 정반대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되고, 이제는 반대편 산스카라들이 작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간이 마련된다.
많은 경우, 두 개의 반대적 요소들이 동일한 ‘일련의 상상'(chain of imagination)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유명 작가로 부와 명예, 좋은 아내 등 삶의 모든 유쾌한 것을 체험한 사람이 말년에는 부와 명예, 아내 등 삶의 모든 좋은 것을 잃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련의 상상’의 두 반대 요소들이 한 생애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평생을 강력한 왕으로 전쟁에서 늘 승리만 거두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는 다음 생에서 패배나 이와 비슷한 체험을 거듭함으로써, 체험의 균형을 이루어 ‘일련의 상상’을 완성해야 한다. 이처럼 산스카라들의 순수-심리적인 지배력은 영혼의 더 깊은 목적론적(teleological) 필요에 종속된다.

살인의 예

어떤 사람이 이번 생에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자. 이 행위는 그의 정신적 신체(mental body)에 ‘살인’의 산스카라들을 예치시킨다. 만일 의식이 단지 이 산스카라들이 창출하는 초기의 경향성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그는 무한정 계속해서 살인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그 행위를 할 때마다 탄력이 붙어, 그와 비슷한 행위를 이후에 더더욱 하게 될 것이다. 만일 ‘체험의 논리’(logic of experience)에 이런 경향을 전환시키는 기제가 마련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풀이되는 결정론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쪽 체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머지 않아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대쪽으로 넘어가려고 하게 된다.
따라서 살인을 하는 체험이 있었던 사람에게는 살인을 당해야 하는 심리적 필요성과 살인을 유도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는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가 연관된 전체 상황의 한쪽 부분, 즉 죽이는 부분만을 체험한 것이다. 전체적인 상황의 반대쪽 짝인 살인당하는 역할은 아직 그에게 낯설고 생소한 정보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미 그의 체험에 소개된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자신이 직접 겪은 상황의 반대쪽 체험을 유인하여 전체 체험을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며, 의식에는 이 새롭고 절실한 필요성을 충족시키려는 경향이 생겨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전체 상황을 완성하기 위해 살인당하려는 경향을 머지 않아 계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다음 생에 나타나 그를 죽일 사람은 누구인가?” 다음 생애에 그를 죽일 살인자는 그가 전생에 죽인 사람일 수도 있고, 비슷한 산스카라를 지닌 어떤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개체들 사이에 오가는 행위와 상호-행위(inter-action)의 결과로, 산스카라적 인연 또는 연결고리가 생겨난다; 새로운 물질적 신체를 취할 때, 개체는 과거에 산스카라적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과 더불어 태어날 수도 있고, 비슷한 산스카라들을 지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환생에 대한 이러한 조절은, 이원성의 진화 과정이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구성된다.

반대들을 통한 반대들의 초월

옷감을 짜는 베틀의 북이 왔다 갔다 하듯이, 인간의 마음(mind)도 양극 사이를 오가는 씨실과 날실처럼 삶(생애)이라는 옷감을 짠다.영적인 삶의 발달 과정은 직선 코스라기보다는, 지그재그 코스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강의 양쪽 둑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강둑이 없었더라면, 강물은 사방으로 흩어져 목적지인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체의 생명력(life-force)도 반대극들의 양 끝 사이에 한정되지 않았더라면,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한없이 흩어져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삶이라는 강의 양쪽 둑은 두 개의 평행선이라기보다는, 점점 가까워져서 종국에는 해탈의 지점에서 만나는 두 선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양극 사이의 교호작용/ 진동작용(oscillation)은 개체가 목표에 가까워질수록 줄어들다가, 마침내 목표를 실현했을 때 완전히 멈추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오뚜기의 움직임이 중력에 의해 서서히 줄어들다가 가만히 앉는 자세에 이르는 것과 같다. 오뚜기를 흔들면 한동안 양쪽으로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흔들림의 진폭은 점차 짧아지다가, 결국 고정된 상태에 이른다. 우주적 진화의 경우에, 반대극들 간의 작용과 반작용(교호작용)이 이렇게 점차 감소되어 멈추는 것을 마하프랄라야(Mahapralaya)라고 한다; 그리고 개체의 영적 진화의 경우에 이를 해탈(Liberation)이라고 한다.

의식의 역진화(involution)의 경지들

이원성(duality)의 단계에서 비이원성(non-duality)으로 가는 것은, 다만 의식 상태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 두 단계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의 차이는 무한하다. 이원성은 ‘신-아닌 상태'(not-God state)고 비이원성은 ‘신의 상태'(God-state)다. 이 두 경지 사이의 무한한 차이는 6경지 의식과 7경지 의식을 가르는 심연을 이룬다. 그 아래에 있는 6개의 의식의 경지들*도 상당히 먼 계곡들로 서로 갈라져 있다. 이들 사이의 차이는 광대하지만, 그래도 무한하지는 않다; 이 경지들은 모두 (양극 사이의 교호 작용으로 이뤄진) 한정된 체험의 양극성(bi-polarity)의 지배를 동일하게 받기 때문이다.
1경지와 2경지의 차이, 2경지와 3경지의 차이, 이런 식으로 6경지에 이르기까지 각 경지들의 차이는 엄청나긴 하지만, 무한하진 않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원성에 속한 여섯 경지들 중 그 어느 것도 실제로 7경지와 더 가깝다고 할 순 없다. 6경지와 7경지의 차이가 무한한 것처럼, 여섯 경지 중 그 어느 경지와 7경지의 차이도 무한하다. 여섯 경지를 거쳐 오르는 영적 진보는 상상 속에서 벌어지지만, 7경지의 깨달음은 상상의 멈춤이다; 그리하여 깨어난 개체는 참진실-의식(Truth-consciousness)에 드는 것이다. 

내적 경지를 거쳐가는 영적 진보

하지만 여섯 경지를 거쳐가는 환상의 영적 진보를 전적으로 피해갈 수는 없다.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상상이 완전히 소진되어야 한다. 완벽한 스승이 있는 경우, 그 제자는 반드시 여섯 경지를 모두 거쳐가야 한다. 완벽한 스승은 제자를 경지들로 이끌 때, 제자의 눈이 뜨인 상태 내지는 눈을 베일로 가린 채로 이끈다. 만일 두 눈을 가린 채 이끌어서 제자가 자신이 거치고 있는 경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제자의 욕망은 7경지 직전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두 눈을 뜨게 한 채 이끌어서 제자가 자신이 거치고 있는 경지를 의식한다면, 제자의 욕망은 5경지에 도달할 때부터 사라지고 없다. 만일 완벽한 스승이 우주적 작업을 위해서 왔다면, 그는 주로 제자의 눈을 가린 채 이끈다; 왜냐하면, 눈을 가린 상태의 제자가 눈을 뜬 상태의 제자보다 우주적 작업에 있어 현실적으로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경지들을 거쳐가는 내내, 산스카라의 풀림(unwinding) 과정이 동반된다. 이러한 산스카라의 풀림 과정(unwinding)은 산스카라의 소모 과정(spending up)과 주의깊게 구분해야 한다. 산스카라의 소모 과정에서는, 산스카라들이 동력화되어 행위나 체험으로 방출된다. 그러나 이 소모 과정은 산스카라들로부터의 최종적 해방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 이유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축적되는 새로운 산스카라들이 소모되는 산스카라들을 대체하고도 남으며, 게다가 소모 과정 자체도 또다른 산스카라들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풀림 과정에서는, 무한을 갈망하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산스카라들은 약해지고 소멸된다.

무한에 대한 갈망은 심한 영적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고통의 강도와, 경지들을 건너가는 사람이 겪어야 하는 영적 고통의 격렬함은 비교도 할 수 없다. 일반적인 고통은 산스카라에서 야기되는 효과이고, 영적 고통은 산스카라의 풀림(unwinding)에서 야기되는 효과다. 육체적 고통이 극에 달하면, 사람은 기절을 해서(무의식이 돼서) 고통에서 구제받는다; 하지만 영적 고통에는 그런 식의 자동적인 구제가 없다. 그래도 영적 고통에는 일종의 쾌감도 때로는 섞여 있어서 지루해지지는 않는다.

깨달음의 평온함

무한에 대한 갈망은 절정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격렬해지고 극심해진다; 그리고 극에 달한 뒤 점차 식어가기 시작한다. 갈망이 식어간다고 해서, 의식이 무한에 대한 갈망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무한을 깨닫겠다는 일념은 그대로 지속된다. 갈망이 식었지만 잠재된 이 상태가, 무한을 깨닫기 위한 {최종} 예비단계다. 이 단계에서 ‘무한에 대한 갈망’은 다른 모든 욕망들을 전멸시키는 도구이며, 이제는 그 갈망마저 무한함의 불가해한 고요함 속으로 삼켜질 준비가 된 것이다. ‘무한에 대한 갈망’이 무한을 깨달음으로써 충족되기 위해선, 우선 의식이 제6경지를 너머 제7경지에 도달하여야 한다. 의식이 이원성을 넘어 비이원성에 도달하여야 한다. 즉 의식이 상상 속을 헤매는 대신, 상상의 끝에 도달해야만 한다.
완벽한 스승은 하나뿐인 실재가 유일한 실재임을 이해하고, 무(Nothing)는 단지 실재의 그림자라는 것을 안다. 그에게 시간은 이미 영원 속에 삼켜지고 없다. 그는 실재의 무시간성(timeless aspect)을 깨달았기에 시간을 넘어서 있으며, 스스로의 존재 안에 시간의 시작과 끝을 담고 있다. 그는 다수들(many)의 활동과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현상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일반적인 사람은, 천지창조(creation)의 시작과 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거대하고 불가피하게 보이는 세상 만사의 행진에 압도된다; 이것은 그가 시간에 사로잡혀 올바른 시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산스카라의 충족 또는 불충족의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깊은 혼란을 느낀다. 그에게 있어 객관적 우주 전체는, 극복하지 않으면 인내해야만 하는 달갑지 않은 제약으로 보인다.
반면 완벽한 스승은 이원성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이원성의 특징인 산스카라들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는 모든 한정성으로부터 자유롭다. 우주의 온갖 폭풍과 스트레스도 그의 존재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온갖 북적거림은(건설적인 과정이든 파괴적인 과정이든), 그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는 영원한 의미가 머무는 참진실/진실(Truth)의 안식처로 이미 들어갔기 때문이다; 영원한 의미는, 환영처럼 스쳐가는 창조세계의 찰나적 가치들 안에서는 부분적이고 어렴풋하게 비춰질 뿐이다. 완벽한 스승은 일체 모든 존재를 자신의 존재 안에서 헤아리며, 펼쳐지는 현상세계 전체를 그저 놀이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