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2 이기심

영어 원본

이기심

이기심의 분석

이기심은 행위(action)와 체험(experience)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는 욕망들의 경향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이기심은 자신의 참된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 인간 의식은 기나긴 의식의 진화 과정 동안 축적되어온 다양한 종류의 인상들(impressions)에 의해 흐려져 있다. 이 인상들은 스스로를 욕망으로 표현하며, 의식의 활동 범위는 이 욕망들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이 인상들, 즉 산스카라들(sanskaras)은 의식의 활동 범위 주변에 일종의 테두리를 형성한다. 산스카라들이 형성하는 이 테두리는, 개체의 의식이 벗어나지 못하는 한정된 영역을 구성한다.

어떤 욕망은 잠재적으로 남는 반면, 어떤 욕망은 스스로를 행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행동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려는 욕망의 역량은 그 욕망과 관련된 산스카라들의 양과 강렬함에 달려있다. 기하학적인 비유를 든다면 욕망이 행위로 옮겨질 때, 욕망은 그 욕망과 연관된 산스카라들이 형성하는 원의 반지름과 같은 길이를 거친다고 할 수 있다. 충분한 힘을 모으게 되면, 그 욕망은 충족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행동으로 표출한다.

원함(wanting)은 불만족으로 끝난다

이기심의 범위는 욕망들의 범위에 정비례한다. 갖가지 다양한 욕망들로 인해, 영혼은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충분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삶은 편협해지고 자기 중심적(self-centered)이 된다. 개인적인 에고(ego)의 생애는 ‘원함'(wanting)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원함’은 변하고 사라질 것들을 통해 충족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을 말한다그러나 일시적인 것들을 통해서는 참된 충족이 있을 수 없다. 삶의 무상한 것들로부터 얻어지는 만족은 오래 가지 못하며, 결국 인간의 욕망은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걱정거리와 함께 전반적인 불만족만이 남게 마련이다.

육욕(lust), 탐욕(greed), 그리고 분노( anger)

좌절된 에고가 찾게 되는 표현의 주된 형태는 육욕, 탐욕, 분노다. 육욕(lust)은 많은 면에서 탐욕과 아주 흡사하지만, 실천하는 방식에 있어서 다르다; 육욕은 물질적 영역(gross sphere)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육욕은 물질적 신체(physical body)를 매개체로 스스로를 표현하며, 육체(flesh)와 연관된다. 이것은 물질적 영역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탐욕(greed)은 초조한 가슴(heart)의 상태이며, 주로 권력욕과 재산욕으로 구성된다. 재산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욕망들을 충족하기 위해서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시도들은 오직 부분적인 충족만을 가져온다; 이러한 부분적인 충족은 욕망을 소멸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 불길을 부채질하여 증가시킨다. 따라서 탐욕에는 정복해야 할 영역이 늘 끝없이 펼쳐지며, 개체에게는 끝없는 불만족만이 남게 된다. 탐욕의 주된 표현은, 인간의 감정적인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 탐욕은 기적 영역(subtle sphere)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분노는 짜증난 마음의 분출이다. 이것은 욕망의 좌절로 인해 생겨난다. 분노는 제한된 에고를 먹여살리며, 지배와 공격에 사용된다. 분노의 목표는 욕망의 충족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의 제거다. 분노의 광란은 이기주의와 자만을 키우며, 제한된 에고를 지지하는 최대 후원자 역할을 한다. 분노의 거처는 마음(mind)이며, 분노는 주로 마음의 활동으로 표현된다. 분노는 정신적 영역(mental sphere)과의 얽매임에 속한다. 육욕, 탐욕, 분노는 그들의 표현적 매개체로서 각각 육체(body), 가슴(heart), 마음(mind)을 사용한다.

악순환의 고리

인간은 육욕, 탐욕, 분노를 통해 실망을 체험한다; 그렇게 좌절한 에고는 또다시 육욕, 탐욕, 분노를 통해 더 큰 만족감을 찾는다. 의식은 이렇게 해서 끝없는 실망의 악순환에 말려들게 된다. 실망은 육욕, 탐욕, 분노 중 어느 하나의 표현이 좌절됨으로써 생긴다. 따라서 실망은 물질적, 기적, 정신적 얽매임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실망은 육욕, 탐욕, 분노가 충족되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우울함이며, 이기심과 이 세 가지는 늘 공존한다. 이들 세 가지 악덕 요소의 공통 기반인 이기심은, 모든 실망과 걱정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기심은 자멸적이다. 이기심은 욕망을 통해 충족을 구하지만, 오직 끝없는 불만족에 이를 뿐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

이기심은 필연적으로 불만과 실망으로밖에 이끌지 못한다;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의 문제는 욕망들을 버릴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러나 욕망은 기계적 억압을 통해서는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없다. 욕망의 소멸은 오직 참지식(Knowledge)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대가 단 몇 분만이라도 생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신중히 생각해본다면, 욕망의 공허함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지난 몇 년간 겪어온 모든 즐거움과 괴로움을 생각해보라. 그대가 평생 동안 즐겼던 모든 것들은 오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가 평생 동안 겪었던 모든 괴로움도 지금은 지나가고 없다. 모두 다 환상이었다.
행복함이 그대의 권리인데도, 그대는 온갖 것들을 원함으로써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한다. 원함은 끝없는 초조함의 원천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그대는 실망한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더욱더 많은 것을 원하면서 다시 불행해진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라고 외쳐라, 그리고 행복하라. 원함의 헛됨을 지속적으로 자각하는 것이 그대를 마침내 참지식(Knowledge)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자아-지식(self-knowledge)은 그대를 원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며, 항구적인(abiding) 행복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원함의 단념

‘원함’과 ‘필요’는 주의깊게 구별해야 한다. 자만심, 분노, 탐욕, 육욕은 모두 ‘필요’와 다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모두 필요하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실수다. 만일 그대가 사막에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시원한 물이지 레몬주스가 아니다.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필요한 것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필요들은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원함’은 상상에 심취한 결과물이다. 행복함이 있으려면, ‘원함’들을 주의깊게 죽여야 한다. 이기심은 그 자체가 욕망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원함’의 단념은 곧 죽음의 과정이 된다. 일반적인 의미로 죽음은 육체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낮은 욕망들의 단념을 뜻한다. 성직자들은 천국와 지옥에 대한 우울한 그림을 그려 사람들로 하여금 가짜의 죽음을 준비하게 한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이 지속되기 때문에, 이러한 죽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진정한 죽음은 욕망의 중단으로 이루어지며, 이 죽음은 서서히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사랑과 봉사(보시)

밝아오는 사랑의 여명은 이기심의 죽음을 수월하게 한다. 존재란 사랑함으로써 죽어가는 것이다. 그대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자신을 고문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기심의 한계성들은 무지(無知: ignorance)에서 비롯된다. 한 개인의 관심사와 활동 영역을 확대하면, 그는 더 명예로운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봉사(보시)의 삶으로 향하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은 선한 욕망들을 많이 품게 된다. 그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도와줌으로써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한다. 이러한 선한 욕망에도 간접적, 잠재적으로 흔히 자아가 수반된다; 그럼에도 선행은 편협한 이기심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선한 욕망들도 악한 욕망들과 마찬가지로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더 깨어나고 확장된 이기심의 한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한 욕망들을 계속 품다 보면, 그 사람의 이기심은 결국 이기심 자체의 종말을 가져올 더 넓은 사고관을 포용하게 된다이렇게 되면 그는 고작 남의 눈에 띄고 주목을 끌려고 한다거나 소유욕을 발휘하는 대신, 남에게 유용해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기심의 발생

개인적 에고의 구조 안으로 들어가는 욕망들은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 둘 중 하나다.보통 나쁜 욕망들은 이기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좋은 욕망들은 이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나 이기심과 이타심을 구분하는 명확한 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둘 다 이원성의 영역 안에서 움직인다; 선악의 상대성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기심과 이타심의 차이는 대체적으로 범위의 차이일 뿐이다. 이기심과 이타심은 {수많은 생을 걸친} 개인적 에고의 생애에서 크게 두 단계를 형성하나, 이들은 계속적으로 이어진다. 
이기심은 모든 욕망들이 좁은 개체성을 향해 집중될 때 생겨난다. 이타심은 이 욕망들의 투박한 구조가 붕괴되어 욕망들이 더 넓은 범위로 분산될 때 생겨난다. 이기심은 제한된 범위로 관심의 폭이 좁혀지는 것이고, 이타심은 더 넓은 범위로 관심의 폭이 확장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기심은 제한된 형태의 이기심이고, 이타심은 더 넓은 활동 범위로 확장된 이기심이다.

이기심을 전환시켜 이타심으로 

이원성의 영역을 완전히 초월하려면, 먼저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선행을 끈기있게 지속적으로 행하면 이기심은 닳아 없어진다. 선행의 형태로 확장되고 표현되는 이기심은, 이기심 자체를 파괴하는 도구가 된다.  이기심의 번성과 소멸을 좌우하는 핵심 고리가 바로 선(善)이다. 애초에 악한 성향을 낳았던 이기심은, 선행을 통해 결국 스스로의 패배를 불러오는 영웅이 된다. 악한 성향들이 선한 성향들로 완전히 대체될 때, 이기심은 이타심으로 전환된다. 즉 개체적인 이기심이 우주적 공익(universal interest)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선하고 사심없는 삶도 여전히 이원성(opposites)에 얽매어 있긴 하지만, 선함은 이원성(opposites)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수적인 단계다. 선함은 영혼이 스스로의 무지를 전멸시키는 수단이다.  

우주적 자아(Universal Selfhood)

영혼은 선(善)을 거쳐서 신(神)에게로 간다. 이때 이타심은 옳고 그름, 미덕과 악덕 등 마야(환상, 무지)의 모든 이원적 측면을 초월하는 우주적 자아 속으로 녹아든다. 이타심이 절정에 이르면, 모든 것과 하나임(oneness)을 느끼기 시작한다. 해탈의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이기심도 이타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 둘은 모두가 다 나라고 느끼는 전체-자아감(전체-자아임, selfness for all) 속으로 흡수, 융해된다. ‘모든 것이 하나’라는 깨달음에는 헤아릴 수 없는 지복(bliss)과 평온함이 동반된다. 반면, 어떤 식의 영적 침체나 상대적 가치관의 망각(소멸 obliteration)도 가져오지 않는다. 전체-자아감은 흔들림 없는 조화를 가져오면서도 분별력은 전혀 상실시키지 않는다; 또한 흔들림 없는 평온을 가져오면서도 주변에 대한 냉담함은 야기하지 않는다. 이 전체-자아감은 고작 주관적인 {상상력으로} 합성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만물을 포함하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union)을 실제로 이룸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다.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합일

모든 욕망들을 제거하고 오직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만을 갈망함으로써, 그대의 가슴을 열어라. 궁극적 실재는 외부 환경의 변하는 것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존재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대의 가슴(human heart) 안으로 그대의 영혼이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가슴의 문은 잠겨 있고 그 안은 수많은 욕망들로 가득차 있다. 가슴의 문을 닫고 있지 말아라. 변함없는 지복의 원천이 사방팔방에 있는데도, 무지에서 비롯되는 욕망들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하고 있다. 영원한 행복이라는 목표가 온전히 환하게 펼쳐지려면, 제한된 에고와 그것에 따르는 모든 욕망들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소멸되어야만 한다.

영성은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다

‘욕망의 단념(renunciation)’는 금욕주의를 의미하지 않으며, 삶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뜻하지도 않는다. 그런 식의 삶의 부정은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신성(Divinity)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영성(Spirituality)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야만 한다. 영성은 인간의 모든 선하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들을  해방시키는 긍정적인 태도다. 또한 영성은 주변 환경에 있는 모든 자애롭고 아름다운 것들의 {활성화}에도 기여한다. 영성은 세속적 활동의 외형적 단념을 요구하지 않으며, 세속적 의무와 책임의 회피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영성이 단지 요구하는 것은, 세속의 활동을 하는 중이나 한 개인의 특정한 자리나 위치에서 비롯되는 의무를 이행하는 와중에도 그의 내적 정신(spirit)이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채로 있는 것이다. 완벽함이란, 이원성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얽매임들로부터의 자유는 제약 없는 창조성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얽매임이 두려워서 삶에서 도망가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도피는 삶의 부정이다. 완벽함은 자연의 이원적 표현들로부터 움츠러드는 것에 있지 않다. 삶의 얽매임들에서 도피하려는 시도에는 삶에 대한 두려움이 암시된다. 영성은, 이원성(opposites)에 의해 압도되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고 완전하게 삶을 맞이하는 것에 있다. 영성은 모든 환상들에 대해 지배권을 행사해야만 한다 – 그 환상이 아무리 매력적이고 강력하다 해도. 완벽한 인간(Perfect One)은 삶의 다양한 형태들과의 접촉을 피하지 않으면서 강렬히 활동하는 와중에도, 완전히 초연한(complete detachment) 채 기능을 완수한다.

Comments

  1. 김은희 says

    선생님, 2장까지 잘 읽었습니다. 1장은 영문과 대조해가며 대략 읽었고, 2장부터는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선생님 번역 내용만 우선 보았습니다.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12월 중순경까지 ‘유와무’의 완성에 전념하고, 이후에 구체적인 통화를 하겠습니다. 뒷장의 내용들도 무척 궁금합니다.

  2. maya49 says

    행동 – 주로 움직임, 몸이 움직이는 것을 겉에서 본 측면
    행위 – 어떤 행동에 의지를 갖고,어떤 의도로 행한다는, 그 아래 동기적 측면까지 고려.

  3. maya49 says

    wanting – 원함
    wants – 도 원함? 욕망 정도가 어떨지요? 너무 다 원함으로 쓰기보다 약간 다른 표현으로 쓰는 게 좋을 듯.

  4. maya49 says

    육신 vs 육체
    최상의 실재 vs 궁극적 실재
    완전함 vs 완벽함
    반대들 vs 반대극 (반대들이 정확한 번역이지만, 한국말로 무언가 부족하고 잘 와닿지 않는 느낌이라..)
    Perfection 등영문 중에 문장 맨 앞에 와서 대문자인지, 원래 대문자인지 혼동되는 경우에 대해 의논.
    영문들을 다 써줘야 할 지. 최초 한 번만 쓰면 되지 않을 지. 문장을 읽는 동안 흐름이 끊기므로.. 최초에 어떤 의미인지 알려주는 용도로 써주면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