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10 폭력과 비폭력

폭력과 비폭력

구호를 넘어서

인간은 유행하는 구호(catchwords)에 달라붙어 이 글귀에 담긴 살아있는 지각(living perception)을 자신의 행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도 않은 채, 자신의 행동이 거의 기계적으로 결정되도록 허용하는 경향이 있다. 삶에 있어 단어들은 그들 고유의 몫과 용도가 있다; 그러나 행동이 현명해지려면 이 단어들이 전하려는 뜻에 대한 주의깊은 분석이 필요하며 그들이 지닌 뜻을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탐구가 필요한 단어들 중에 ‘폭력’과 ‘비폭력’만큼 중요한 단어는 많지 않다. 이 단어들은 이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특정한 행동뿐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tenor)까지도 좌우한다. 

영적 이해는 공식을 넘어선다

영적인 삶의 과제는 지각 전환(perception)의 문제지, 아무리 우수한 가치를 지지하는 규칙(rules)이라 해도 그 규칙에 대한 기계적인 순응은 아니다. 이러한 지각에는 언어나 공식이 담을 수 없는 이해가 함축된다. 모든 언어와 공식은 진실(Truth)을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공식들의 근원에 있는 참뜻을 끌어내려는 이들은 많은 경우 공식화된 원칙을 연구하기 위해 나서게 된다; 그들은 생활에서 찾아지는 구체적인 예들을 계속해서 동원하여 그들의 연구를 보충해나간다.이는 특히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두 반대되는 개념의 공식화된 ‘적용 원칙’(guiding principles)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상황들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폭력’과 ‘비폭력’ 두 단어는 현실의 너무도 다양한 상황들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설일지라도 완전하려면 그 다양한 상황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상황들을 해설의 시점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해설을 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 두 단어에 해당되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고려할 필요는 없다. 가장 대표적인 상황들만 고려해도 충분하다. 아래에 예로 드는 대표적인 상황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두 개념의 중심에 있는 근본적인 가치들을 충분히 보여주기 때문에 선택된 것들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

제1번 상황 :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판에, 주변에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 그를 구조하려고 한다고 하자. 물에 빠진 사람은 구조하러 온 사람을 필사적으로 붙드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구조를 방해해서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구조자마저 익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구조자가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를 세게 쳐서 기절시킨 후에 구조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를 치는 것은 ‘폭력’으로도, ‘비폭력’으로도 볼 수 없다.

수술의 경우

제2번 상황 : 수술을 통해서만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고통받고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 병이 남에게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외과 의사가 감염된 부위를 잘라내야 할 수도 있다. 이 때 칼로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행위 역시 ‘폭력’이나 ‘비폭력’으로 볼 수 없다.

침략국의 경우

제3번 상황: 만일 공격적인 국가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약한 국가를 침략했다고 하자; 이 때 어떤 다른 국가가 약한 국가를 구하려는 오직 고귀한 영감에 의해서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에 나섰다고 하자. 약한 국가를 방어해주기 위한 이런 싸움을 ‘폭력’이나 ‘비폭력’이라 볼 수 없다; 대신 ‘비폭력적 폭력’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미친 개의 경우

제4번 상황: 만일 초등학교 주변에 날뛰는 광견이 있어서 선생들이 학생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그 광견을 죽였다고 하자.이 광견을 죽이는 것은 ‘폭력’을 의미하지만, 그 안에 증오(hatred)는 없다. 

강자의 비폭력

제 5번 상황 : 만일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에게 더 약한 체격의 거만한 사람이 얼굴에 침까지 뱉어가며 모욕했다고 하자. 이 거만한 사람을 짓밟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강한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해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차분하게 사랑의 복음을 이야기했다. 이 행동은 ‘비폭력’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강자의 비폭력’이다.

섬세한 고려의 필요성

위에 언급된 첫 세 상황들은 그 상황이 폭력 또는 비폭력을 암시하는지의 여부에 대답하려면, 우선 그 상황의 다양한 세부적인 내용과 여러 미묘하고 섬세한 점들 그리고 그 행위를 하게 된 동기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대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준다. 마지막 두 상황은 폭력과 비폭력이 암시되면서도, 그 상황의 특정한 요인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폭력’과 ‘비폭력’의 의미를 넘어서는 경우들을 보여준다. 

물에 빠진 사람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1번 상황을 좀더 세부적으로 분석하면, 비록 피해자의 사전 동의 없는 무력(force)의 사용이 연관되지만, 빠진 사람을 살리려는 좋은 의도였음을 보여준다. 당하는 이의 동의 없이 무력(force)을 사용하는 것은 폭력의 경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력(force)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이익을 주려고 사용되었지 그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경우는 폭력의 경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별한 경우에도 폭력과 비폭력이 둘다 각기 관련되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과 ‘비폭력’이 적용됐다고는 볼 수 없다.

외가 수술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2번 상황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여기서도 (신체를 자르는) 무력/폭력(force)의 적용이 있다; 이것은 환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수술에 대한 환자의 사전 동의가 있다.  더불어, 수술은 병으로부터 환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을뿐 아니라, 병의 전염으로부터 타인들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 무력의 적용(행사)은 환자뿐 아니라 그와 접촉할 수 있는 많은 타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섞임-없는 좋은 동기에서 솟아난 것이다.  전혀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적용된 무력은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을 철저하게 비-폭력이라고 볼 수도 없다; 이것은 살아있는 신체의 일 부를 분명히 절단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침략적인 구가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3번 상황도 상당히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이 교전(fighting)은, 어떠한 개인적 이익이나 이기적인 동기 없이 단지 약한 국가를 방어하려는 목표로 침략에 저항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무력의 행사는 침략국에게 상당한 손상을 입힐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 국가의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러한 무력의 행사는 상대의 사전 동의도 없을 뿐 아니라, 상대의 의식적이고 고의적인 의도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상황도 분명한 폭력의 경우가 아니다.

Even in this situation we do not have a clear case of violence.

관련된 손상과 상해를 불구하고, 이러한 무력의 적용은, 피해자인, 약한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의미로 침략국 그 자체를 위함이며, 그 이유는 자체의 공격에 대한 저항을 통해 침략국이, 약한 구가들을 침략하고 착취하려는 자체의 영적 약점 또는 영적 질병에서 서서히 완치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력은 실제적으로 폭력이 아니어서,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비-폭력적 폭력이라고 한다.

침략적인 국가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침략국을 대항하는 전쟁(교전)의 경우는 감염된 부분을 수술하는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침략국을 대항하는 전쟁의 경우에는, 약한 국가를 위한 것이 일차적인 결과로 보이며, (무력의 적용으로 대응한) 침략국을 위한 것이 이차적인 결과로 보인다.  수술의 경우에는, (무력의 수취자인) 환자를 위하는 것이 일차적 결과로 그리고 타인들을 위하는 것이 이차적인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미비한 혜택의 차이일 뿐이며, 두 상황들을 좀더 주지하여 분석하고 비교하여보면, 무력의 표적뿐만 아니라 상황에 관련된 여러 다른 사람들의 혜택을 동등하게 증진시킨다는 것이 인식된다.

약자의 방어는 사심 없는 봉사의 일종이다

약자의 방어는 중요한 형태의 사심 없는 봉사이며, 갈마-요가(Karmayoga)의 한 부분이다.  무력의 활용이, 만일 이러한 용도로 필수적이라면, 바라는 목표의 달성을 위한 절대적인 도구로 완전히 정당하다.  그러나 약자의 방어를 위하여 착수된 어떠한 투쟁(fighting)도, 진정한 영적 중요성을 지니려면, 일치의 어떠한 이기적인 동기도 또는 증오도 없어야만 한다.  이것은, 어떤 남성에게 비열한 의도의 공격을 당하고 있는 여성을 방어하여 여성의 명예와 생명을 방어하고 동시에 공격자를 처벌하며 뉘우치도록 하여 그를 수정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광견 그리고 강자의 비-폭력의 경우에 대한 해석

제4번 상황은 분명한 폭력의 경우지만, 증오가 없으며, 국민학생들을 광견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대의적인 좋은 의도가 있기에 정당하다. 거만한자에게 복수를 노리는 대신에 설교를 하였던 강인한 자의 경우는(제5번 상황), 비록 비-폭력을 의미하지만 비-행동적(inaction)이지는 않다. 이것은 무저항적이거나 또는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인한 것이며, 객관적인 근본(impersonal nature)의 참된 창조적인 행동이다. 이것은 강자의 비-폭력이다.

영적 이해가 규칙의 상류에 있기 위해서는 신성적 사랑이 필요하다

위의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비교들은 폭력과 비-폭력의 정의, 또는 이것들의 정당성, 또는 이것들의 진정한 가치 내지는 가치의 부족 등에 대한 여부는, 아무리 명확하게 진술된 형식을 갖춘 전반적인 규칙이어도, 그것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에는 많은 섬세한 영적 문제들과 함축들이 포함된다.  영적 가치관의 전체적인 윤곽 속에 폭력과 비-폭력의 지위(status)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으려면, 존재의 원인과 뜻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폭력 또는 비폭력에 대한 불충분하며 불완전한 사상들을 기반으로 하는 어떠한 구호들에 의해서도, (아무리 듣기에 높아도)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원성(duality)을 초월하는, 영적 이해가 담긴, 그리고 규칙들 보다 상류에 있는, 선성적 사랑(Divine Love)에서 자발적으로 나와야 하는 결과다.